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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기 Nov 10. 2024

[시필사] 반달과 5펜스

- 일주일에 다섯 번 펜을 들어 시를 만납니다.

 반달서림 어느 북토크가 있던 날. 강연자의 북토크 강연이끝나고 저자서명을 받거나 자리를 정리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서가를 둘러보는데 반달서림 대표님이 쓱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필사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함께 하지 않으시겠어요?” 그 당시 시필사라는 단어가 너무도 생소하여,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과 성향의 사람인지라 시에 관심이 없어 읽은 적도 없으며 잘 모르고, 굳이 시를 필사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노라’며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첫 시필사 노트가 된 몰스킨 노트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보시라는 말을 남기고 대표님은 자리를 옮겼는데, 불현듯 몇 년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몰스킨 노트가 떠올랐다. 만만치 않은 가격의 노트라 함부로 쓰기 아까워 어디에 쓸까 고심하였으나, 좀처럼 용처를 찾지 못하고 가끔 마음에 드는 글귀를 옮겨 적곤 했던 노트. 이 참에 그 노트에 시필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물건의 딱 맞는 용도를 찾았을 때 느끼는 이 희열! 게다가 시필사 모임 창립멤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사실 '시' 자체보다 '창립멤버'라는 이름에 끌렸다. 일단 시작하고, 시필사가 체질에 정 맞지 않으면 그만두면 되니까…… 그렇게 2021년 3월 “반달과 5펜스” 모임의 회원이 되어 난생 처음 자발적으로 시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시필사 모임 이름은 진작에 “반달과 5펜스”라고 정해졌다고 했다.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를 떠올리게 하면서 '반달서림 시필사 모임 회원들이 한 주에 다섯 번 펜을 든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는데, 참 멋진 이름이다.

 이름에서 보듯 “반달과 5펜스” 운영 방식은 이렇다. 참가비를 내고 모임에 참여하면,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다섯 번 한 펜을 들고 그날의 시를 필사한 후, 필사한 페이지를 사진 찍어 매일 “반달과 5펜스” 온라인 카페방에 올린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모임의 회원들과 스무 편의 시를 함께 필사하게 되는 셈이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 주까지는 대표님이 선택한 시를, 마지막 주는 회원들이 제안하는 시를 필사하는데, 대표님은 시집 한 권에서 한 주의 시 다섯 편, 여성시인과 남성시인, 젊은 시인과 연륜이 있는 시인, 국내 시와 외국 시를 골고루 고려하여 시를 고른다고 한다. 이렇게 한 달에 스무 편 시 필사를 완료한 회원은 그 달 함께 필사한 시가 포함된 시집 혹은 서점에 와서 고른 시집 한 권을 상품으로 제공한다.

 시필사 참가비가 있지만 한 달 후 시집 한 권을 상품으로 받으니 참가비는 그냥 시집 한 권을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 시를 선택하는 물만두의 노력에 비하면 참가비는 적다고 느껴졌다. 비록 시집 가격이 오름에 따라 참가비를 최근 조금 올리긴 했지만, 여전히 돈은 되지 않는 시필사 모임을 하는 이유를 반달서림 대표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를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 많고, 책장에 시집 한 권 꽂혀 있지 않는 집이 많은데, 그 사람들이 시 한 편 읽는 삶을 살면 좋겠고, 그 집 책장 한편에 시집이 몇 권이 꽂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런 시필사 모임을 생각했어요……

들으면서 딱 나구나 싶었다. 시집이라고는 고등학교 때 국어수업 때문에 구입한 한샘출판사의  "한국 현대시를 찾아서" 한 권밖에 없었고, 그 시집도 다 읽지는 않았으니......

 그렇게 시작한 시 필사가 이제 3년 8개월째 접어들었고, 창립회원으로 시작한 후 빠지지 않고 매달 스무 편을 필사했다. 종합하면 그동안 필사한 시가 880편이 넘고 약 200명가량의 시인과 200권이 넘는 시집을 접한 셈이다. 리워드 시집은 44권이고, 개인적으로 구매하였거나 선물 받은 시집도 세어보니 20권이 넘는다.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나의 모습에 내가 신기할 따름.

1기부터 44기까지 리워드 시집 44권을 순서대로 정렬

 그날 그날 시를 나지막이 입술로 읊고, 예쁜 노트에 정성껏 옮겨 적는 필사만으로는 뭔가 아쉬웠다. 모임 회원 몇 분처럼 캘리그라피의 멋진 글씨체로 필사했다면 만족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악필까지는 아니어도 그다지 아름다운 글씨는 아니어서 페이지에서 허전함이 느껴졌다. 시가 실이라면 그림은 바늘. 시화전이 떠올라 시에 맞는 그림을 색연필로 그려보았다. 그림 그리는 솜씨 또한 빈약하기 그지없지만 시를 읽으며 느껴지는 감정을 어떻게 든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처음엔 12색 색연필로 끼적대다가, 두 번째 시필사 노트를 쓰면서 72색 색연필을 마련하여 약간 다채로워진 그림을 그렸다. 더 다양한 색깔의 색연필이 마음을 들뜨게 하고, 하얀 노트에 골라 뭔가를 그린다는 행위 자체만으로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필사 노트의 일부

 시는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특별히 기대하는 바 없이 시필사 세계에 입문한 이래 필사한 시노트가 여덟 권이 되었다. 몰스킨 노트로 시작하였기에 그 후 두 권까지는 몰스킨 노트를 구매해서 사용했지만, 어느 순간 가격이 급격하게 상승하여 차마 더 이상 몰스킨 노트를 쓸 수가 없었다. 빈 노트 가격이 시집 두 권 가격을 훌쩍 넘긴 지경이 되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뒤로 같은 크기의 가성비 좋은 노트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몰스킨 노트 구매 때에도 애용했던 표지의 제목 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트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겨우 찾은 각인 서비스는 판촉용품으로 대용량 구매하는 경우에 적용되는 서비스. 차라리 적당한 노트를 사서 주변에 각인기를 갖춘 곳을 찾아가 각인 서비스를 의뢰해야 하나 싶었던 때, 기쁘게도 딱 맞는 노트를 발견하였다.

 종이의 두께와 색깔 필기감 모두 마음에 들어, 구매한 노트를 끝까지 쓰고 다음번 그 노트를 재구매하려고 들어간 사이트에, 더 이상 각인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다른 노트를 찾아 쓰고는 있지만, 이 노트는 종이 두께가 얇아 뒷면 비침이 약간 아쉽다. 아무래도 좀 더 나은 시필사 노트를 찾는 여정은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

반달과5펜스 시필사 노트 Vol.1 ~ Vol.8
몰스킨 노트 3권, 어프로치 노트 2권, 로이텀 노트 3권

 필사하는 시는 여전히 알쏭달쏭 긴가민가한 시가 대부분이지만, 신기하게 읽자마자 마음에 스며드는 시도 몇 편 생겼다. 그렇게 시가 마음에 스며들면 머릿속에서 맑은 샘이 퐁퐁 솟는 듯한 느낌을 느끼곤 했다. 때로는 더운 여름 계곡의 시원한 옹달샘 느낌을, 때로는 추운 겨울 야외의 뜨끈한 온천 느낌을……

 시의 주제는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것까지 다양하였고, 주제를 표현하는 방식은 직접적인 것부터 함축적인 것까지 다채로웠다. 언어의 연금술사 시인이 변신시킨 언어의 향연. 시에서 난생처음 접한 어휘나 어려운 어휘를 알게 되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흔히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로 정곡을 찌르며 표현한 생활 밀착 시를 만나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같은 것도 새롭고 다르게 보는 시인의 눈을 갖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시창작 수업을 들을 때가 올 수도 있겠다 싶다. 시창작 수업은 반달서림이 문을 연 후 대표님이 기획한 첫 프로그램이고, 현재까지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진행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반달서림 대표 프로그램이다. 2021년부터 3년째 이어오고 있는 시창작 수업을 들은 회원들의 시와 산문을 모아 『시인은 못 돼도 2021』, 『시인은 못 돼도 2022』와 『시인은 못 돼도 2023』 세 권의 문집을 펴내고 시낭독회도 열었다. 2022년까지는 시창작회 회원만 참여할 수 있었던 시낭독회가 2023년에는 일반인에게도 참여의 문이 열렸기에 호기심으로 신청 후 참석하였다.

 다른 글로 이야기할 “반달과 5펜스가 사랑한 시인들”의 시인과 함께하는 시낭독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 자신 안의 시인을 찾아내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하는 회원들이 맑은 얼굴을 밝게 빛내며 소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특히, 그중 2명은 온라인 시창작 수업을 들은 회원이었는데, 시낭독회 참석을 위해 각각 동해와 일산에서 먼 길을 달려와 반달서림을 찾았다고 말해 다른 회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나이와 성별, 삶의 경험이 모두 다른 회원들이 진솔하게 쓴 시를 듣고 있노라니 문집 ‘시인은 못 돼도’ 제목이 겸손하다 생각될 만큼 이미 모두 멋진 ‘시인이 되었다’ 여겨졌다. 앞으로도 매년 출간될 『시인은 못 돼도』 시리즈. 그 어느 편에 참여할 그날까지 시창작 수업이 지속되길 소망한다. 그때까지는 시필사를 계속하며 시의 감정과 언어 근력을 키울 예정이다.

반달과 5펜스 회원모집 포스터들

 한 달 전인 10월 10일 한강작가의 노벨상 소식이 너무 기쁜 나머지, '나에게는 리워드로 받은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가 있다!'는 괜한 뿌듯함에 시집을 다시 읽었다. 당시에도 일상의 언어를 간결하게 사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시라는 느낌과 함께, '마크 로스코와 나' 연작시와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시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다시 찬찬히 읽으니 시어를 곱씹어 보게 되고 뭉클한 감정이 느껴진다. 아울러, 조현정 문학평론가가 해설에 기재한 것처럼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2013,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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