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서부터, 서울 직장 취업까지 평생 날 괴롭혔던 그 언어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인천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 온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 열리기 한참 전이라 그 도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황무지같이 도로는 모두 비포장이었다. 시청, 경찰서, 마을 작은 도서관, 편의점 등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건물들은 때가 끼어 지저분했다.
유일하게 좋은 건 아파트 앞에 주문진 바다가 넓게 펼쳐져있다는 것이었다. 도깨비 촬영 전까지 이 바다는 정말 지저분하고 도로가 없었다. 흙이 바닥에 먼지처럼 일렁여서 멀리서 보다가 갯벌인 줄 알았었다. 동해안 바다가 그렇게 못생겨 보일 수 없었다.
자퇴를 하고 이 마을이 정말 싫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교육적 기회도 적었으며 자퇴한 나와 여동생을 바라보는 시골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았다. 아침부터 도서관에 갈 때마다 왜 학교에 안 갔는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어른들에게 수시로 질문을 받는 것이 싫었다.
학교를 그만둔 걸 내가 정신적 장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방식의 교육을 받고 있는 거라고 인식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런 고급스러운(?)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님과 QT를 했다. 성경책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지루하지만 독후감 형식으로 글도 쓴 다음에 도서관에 가 하루 종일 손에 집히는 책 아무거나 읽었다.
부모님과 다니고 있던 교회는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속초에 위치해있었다. 내가 13살일 때, 크리스마스 날 외국인 두 명이 교회에 찾아왔다. 덩치가 거인만 한 키 크고 유럽계열 백옥 피부를 지닌 백인 40대 중년 부부였다. 외국인이 너무 신기했던 나는 교회에서 영어 가장 잘한다고 소문난 언니 소매 잡고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물론 언니와 외국인 부부와의 대화를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후 외국인 부부는 교회 한국인 예배에 매주 찾아왔다. 몇 주 후 이 분들을 위해 교회 목사님께서 교회 맨 꼭대기층 방을 영어 예배실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여름에는 선풍기가 없고, 겨울엔 난방이 되지 않는 아무도 쓰지 않는 방이었다. 매주 스태프들이 들어가 해외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한 설교 영상을 틀어주고, 예배 후 성경 스터디를 한다고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스태프를 모집하고 계신 집사님을 찾아갔다. 내가 피아노를 조금 칠 테니 반주자로 들여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내게 바로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셔서 딱히 좋지 않은 실력으로 무작정 코드를 쳤다. 어차피 반주자가 필요한데 지원하는 다른 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스태프가 되었다.
예배가 열리는 첫날 오신 외국인들 가운데 그 부부가 왔다.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며 (바디랭귀지로) 그분들은 내게 지도의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끝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그리고 자기들이 '남아공'이라는 나라에서 왔으며, 남성분은 독일계, 여성분은 네덜란드계 유대인 혈통이시라고 소개했다.
그분들은 자식이 없으셨다. 어쨌든 당시 궁금해도 실례가 될까 물어보지 못했고, 또 "How are you"조차 못하는 나였기에 영어를 못해서 못 물어봤다. 아이가 없으신 두 부부는 나를 보자마자 딸아이처럼 귀여워해 줬다. 왜 아이가 없으신지는 그분들을 알고 몇 년 후에 물어봤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셔서"라셨다.
그분들은 "Janet"이라는 내 영어 이름보다 한국 이름에 더 예쁘다셨다. 나는 한자어로 '은혜 은'자에 '빛날 빈'을 종이에 써줬는데 너무 아름답다며 놀라워하시더라. 그때부터 영어 이름을 쓰지 않고, 어딜 가든 "EunBin"을 쓴다.
그분들이 내가 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 공부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원어민 선생으로 계신 학원에서 쓰는 교재를 가지고 오시더니
"은빈, 우리가 매주 일요일 예배 후 영어를 가르쳐줄게. 주제를 정해줄 테니 에세이를 매주 써와 볼래?"
라며 무료 수업을 제안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수업은 그분들이 한국을 떠나기까지 2년 동안 계속되었고, 수업 후 날 데리고 설악산이나 아이스크림 가게에 데려가기도 하시며 대화가 안 되는 나와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셨다.
덕분에 나는 세계를 배우기 전에 아프리카를 먼저 배웠다. 영어를 학교 교재가 아닌 성경으로 배웠다. 남들이 이른 시기부터 커리어를 쌓고자 학원을 다닐 때 교회라는 소그룹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며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시간을 더 투자했다. 지금도 인생에서 휘청이다가 다시 오뚝이처럼 쉽게 일어서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그때 그분들이 내게 심어준 곧은 가치관이 마음 깊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부부는 2년 후 한국을 떠나 태국, 케냐, 인도네시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시작하셨다.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분들을 보러 돈 모아 계신 나라들을 다 방문했다. 내가 갈 때마다 숙소를 마련해주신 것이 감사해서, 몇 년 후 한국으로 다시 여행 오셨을 때 우리 가족이 바다 바로 앞의 예쁜 숙소를 사비로 잡아드렸다.
그분들이 한국을 떠나고 난 다시 혼자였다. 영어를 같이 공부할 사람이 없으니 전국의 영어 스피치 콘테스트를 찾아보고 모두 지원했다.
충격적 이게도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이 불가능한 곳이 많았다. 억울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만큼 절실했기에 각 콘테스트 주최부에 전화를 걸어 날 받아달라고 졸랐다. 어린애가 전화기로 빽빽대니 시끄럽다고 그냥 끊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다행히 몇 군데는 공고문에서 지원자격을 수정해줬다.
무학교 소속으로 그렇게 참가한 영어 콘테스트가 열 곳이 넘는다. 그중 처음 5곳은 모두 본선에서 탈락했는데, 이유는 무대 앞에 서자마자 말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대공포증이 있었다. 본선 무대 셋째에 올랐을 때 힘차게 내 소개를 하고는 그대로 무대에서 실신해버렸다. 일어나니 구급차 실려가기 직전이었는데 내가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얘기하고 내렸다.
그 이후로 일부로라도 본선에 자주 진출해서 무대 위에 섰는데 한 일곱 번째 서니 기절하거나 머릿속에 백지장처럼 하얘지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대공포증 이겨내는 거 참 힘들었다. 지금도 발표 직전에는 떨린다. 그래서 눈 꾹 감고 시작하면 되긴 된다.
유일하게 해외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남아공에서의 한 학기 교환학생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를 받았던 아프리카 나라라서 현지인들이 거지조차 영어를 맛깔나게 잘한다.
아프리카와 한국 간 교류가 잘 없어서 학생 비자를 받는 게 참 힘들다. 엄청난 양의 서류 준비, 심지어 서류에 글자 하나가 기재되어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자를 세 번 이상 거부당했다. 그만큼 힘들게 준비했던 이유는 아프리카를 공부할 이유도 있지만 해외에서 처음으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 정착하려는 시기에 코로나가 터지며 아프리카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얼마 안 가 한국으로 도망치듯 전세기 타고 귀국했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음에도 지금 한국어만큼 영어를 편하게 구사하는 것이 기적이고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영어 배우는 데 참 많은 고생 하고 있을 텐데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영어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으며,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인 동시에 가장 날 못살게 괴롭힌 언어다.
어떻게 너무 인정하기 싫은데 아쉽게도 세상엔 쉬운 게 하나 없나 보다. 뭔가 얻기 위해 수고하고 희생해야 하는 건 바꿀 수 없는 세상 원리인 가 보다. 그런 로직으로 창조되었다면 인정하고 보기 좋게 이겨내 보려고 한다. 나는 계속 도전하고 영어를 공부해볼 테니 여러분도 주눅 들지 마시고 파이팅하시길 응원한다.
아프리카 지역학 전공하고 우연히 IT 회사로 들어가 PM이 돼버린 스물네 살 신입 직장인 스토리.
홍대 살고 종로에서 일해요. 취미는 비건 베이킹, 시간 날 때 피포 페인팅, 좋아하는 건 한강 보러 가기, 카페 가서 인스타그램 포스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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