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한국인 PM으로 살아남기
PM으로서 미국 회사에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뉴욕에 본사가 있는 이 회사는 Web3/블록체인이라는 산업군 특성상 전 직원이 리모트로 근무한다. 미국까지 갈 필요 없이 성수동의 내 월세방에서 일할 수 있다.
회사에 취직하게 된 건 전에 다니던 직장의 동료가 CEO에게 나를 직접 추천한 것이 계기였다. 내 포트폴리오를 동료를 통해 받아본 CEO는 감탄했다며 내게 텔레그램으로 연락했다. 나는 그때 프리랜서로 일하며 유럽을 혼자 여행하고 있었고 여행에 취한 나머지 직장이 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이 일어 편하게 대표와 만나기로 했고 그렇게 구글밋으로 두 번 만났다.
이후 리더십 팀 멤버들과의 세 번 추가적인 온라인 만남을 가졌고 최종 합격 소식을 받고 업무를 시작했다.
면접 때부터 난 CEO에게 날 뽑기 전에 알아둬야 할 몇 가지를 확실히 알려줬다.
1. 나는 Web 2 프로덕트만 기획해 보았고, Web 3와 크립토 지식이 없다.
2. 세일즈 팀이 있는 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에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직접 해본 적 없다.
3. 인하우스가 아닌 에이전시에서의 프로젝트 매니징을 해본 적 없다.
사실 이것만 하더라도 불합격 사유가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CEO의 대답이 이랬다.
1. 배우면 된다, 배우려는 생각은 있는가?
2. 배우면 된다, 배우려는 생각은 있는가?
3. 배우면 된다, 배우려는 생각은 있는가?
그렇게 프리랜서 PM을 평생 할 줄 알았고 언젠가는 PM을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하려던 생각이 접혔다. 내가 직업은 PM으로 지냈지만 내게 없는 스킬들을 나열하며 욕심이 생겼나 보다. 사업 아이템도 사실 명확하지 않고, 당장은 직업인으로 좀 더 탄탄하게 성공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생각보다 많은 스킬을 요구했고, 처음 한 달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모르는 건 너무 많은데 잘하고 싶어서 스트레스를 왕창 받았다 허허
시간이 지나며 여전히 업무량은 많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며 회사의 지독하게 솔직한 팀 문화, 언어, 구조 등에 익숙해지고 팀과 다 같이 헤쳐나가야 하는 난제들과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눈에 보인다. 진정한 스타트업인이라면 이런 부분이 많이 보일 때 해결하고 싶어 흥분하는 법이다.
첫 두 달 동안 회사에 적응하며 깨달은 참 많은 것들을 적어본다.
인하우스 회사는 하나의 프로덕트를 다룬다. 그 프로덕트의 비전을 전체 팀원이 공유하고, 공감하고, 전념한다. 반면 에이전시는 고객들의 프로덕트를 받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고객별로 다양하다. 고객의 산업군은 같은 Web 3/블록체인 산업계지만 성격이 모두 다르다.
(블록체인 업계인들은 이해하겠지만) Dex, Money market, swap 등 강화하고픈 기능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그것도 고객의 비즈니스 모델을 고려해 브랜딩까지 해줘야 하는 아주 다양한 프로덕트를 만들어야 한다. 프로젝트가 프로덕트별로 천차만별 다양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하우스에서의 PM은 프로덕트 매니저, 기획과 데이터 분석을 좀 더 중점적으로 한다면 에이전시에서는 프로젝트 매니징, 팀 리딩, 프로덕트 분석에 좀 더 힘을 싣는다.
에이전시는 고객이 원하는 방향성에 맞춰주는 동시에 비즈니스 모델에 맞게 기획을 해줘야 한다.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아쉬움과 여러 프로덕트를 만들어내는 재미가 동시에 있다.
일부로 '프로젝트 매니저'로 포지션을 잡은 것은 내가 산업군 프로덕트에 대한 지식이 아직 없고 고객과 직접 이야기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프로덕트를 잘 아는 이들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리소스를 매니징하고, 고객과의 프로덕트 싱크를 맞춰주고, 스케줄 조정, 팀원 커뮤니케이션 조정부터 꼼꼼히 맞춰주는 것이다.
타임라인과 로드맵을 짜주고 이미 기획된 건들을 이슈화하여 개발자와 디자이너에게 전달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래 이미지처럼 백엔드, 프런트, 디자인 등으로 나눠 인하우스에서 에픽과 이슈를 세부화하는 것처럼.
프로젝트 매니징은 엄연한 기술이다.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애자일 하게 진행해야 하는 유연성과 방법론에 근거한 원칙을 고집하는 밸런스가 필요하다. 프로덕트 매니저가 반드시 가져야 할 기술로 팀의 생산성을 오케스트라 무대 뒤에서 조종하는 아주 매력적인 포지션이란 말이다.
부끄럽지 않았다. 인터뷰 때부터 난 솔직했으니까!
CEO에게 내게 공부해야 할 프로덕트 리스트를 달라고 했다. 크립토를 모르니 업계의 유명한 모든 회사 리스트가 필요했다. 1분 만에 리스트를 만들더니 내게 보여주고는 기능에 따라 알아서 찾아 공부해 보란다.
상사에게도 크립토를 직접 거래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프로덕트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스크린숏을 찍어, 공통된 기능을 찾아보고 모르는 단어는 찾아봤다.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솔직함이 불편했다.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고 알려야 대표가 '그래, 너 모르니까 큰일 났어. 널 해고하고 싶지 않으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널 도울게. 이 자료를 줄 테니 공부 열심히 해. 필요한 책도 회사 돈으로 사도 돼'라 말해줄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작은 스타트업일 수록 대표에게 도움 요청하는 게 빠르다. 대표가 가장 잘 안다.
후에 프로젝트를 아는 척하다가 망치는 것보단 나으니 말이다. 실리콘밸리의 팀장들(Radical Candor)에서 말하는 모든 솔직함과 피드백의 원칙을 하루하루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나날들이다
나는 내가 현지인만큼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한 번도 해외에서 길게 산 적 없고 검정고시 출신이지만 코피 몇 번 터뜨리며 공부했던 만큼, 또 전 직장에서 유럽 동료들과 일해봤던 만큼 영어로 일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고객과 일하며 처음으로 내 영어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고객이기 때문에 완벽한 문법을 요구하는 건 기본이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만이 아는 슬랭, 톤과 간접화법이 담긴 모든 표현법까지 알아야 하는 건 토종 한국인인 나에게 무리한 요구였다.
회사 리더들은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이고 앞으로 더 많은 고객을 나에게 맡기고 싶어 하는 듯하여 유독 나에게만 엄격한 기준으로 내 메시지들을 검토하는 거 같아 좀 서러웠던 것 같다. 그래도 어떡하는가, 내게 더 큰 일을 맡기고 싶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챗 GTP와 Grammarly 등 인공지능이 해줄 수 있는 영역을 넘어 고객의 마음을 녹이는 영어화법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외국인'이고 PM이라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