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통제 불가능한 돌발 상황들을 마주하며
혼자 여행하는 건 새로운 도전인 만큼 흥미롭지만, 가끔 고통스럽다. 일정이 바뀌는 등 사소한 돌발상황도 힘들어하는 내게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요란한 나날들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걷고, 땀 흘리고, 표현하고, 설득하고, 도와달라고 붙잡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다. 그럼에도 그 와중에 만난 인연들의 도움과 태국이란 나라의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 음식에 위안을 얻으며 버티고 있다.
이런 조용하고 예쁘고 신기한 사람들로 가득한 지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여행만 하려는 나를 괴롭히는 상황들이 생긴다. 단순히 낯선 곳에 있으니 뭐가 뭔지 몰라서 헤매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뜻대로 상황이 잘 흘러가지 않아 조급해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의 꼬인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끔 있다. 조금이라도 일정이 틀어지는 등의 사소한 변화도 견디기 힘든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너무 오래 붙들고 내 힘으로 해결해보려고 한다.
포기는 어리석은 짓이라 배웠다. 다만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걸 가려내지 못한 채 해결되지 않는 것 하나를 잡고 늘어지는 것 또한 어리석다. '포기'와 '내려놓음', 이 두 개는 분명 다른데 이 둘의 차이를 그동안 알지 못했다. 내려 놓지 못하고 쥐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한국에서의 나의 이런 모습이 스트레스였는데, 여행을 시작한 이후 그 모습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스스로 답답하다.
이렇게 쓰다 보니 드는 생각이, 어쩌면 빨리 내려놓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하며 안달복달 하는 것도 내려 놓지 못하는 자세일 수도 있겠다.
힘에 의해 속력과 방향이 변하기 전까지 물체가 항상 기존의 상태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현상을 관성의 법칙이라 부른다. 이 중학교 때 배우는 과학 원리를 쉽게 풀어 설명하면, 빨리 달리던 뭔가를 제어하면 한 번에 멈추지 않는다는 거다. 물체는 서서히 멈춰야 튀어 오름 없이 안전하게 속도가 느려지며 마침내 멈출 수 있다.
인생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달리다가 너무 갑자기 속도를 멈춘 바람에 육체나 정신이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다. 여행을 와서도 하루의 절반을 노트북 앞에서 일하며 보내는 내 모습에 어제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급하게 달리다가 갑작스러운 브레이크를 밟아서 그런지 와서 즐기지는 못하고 하루의 절반을 일을 ‘창조’해서 어떻게든 하든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워커홀릭일지도 모르겠다. 일을 즐기고 재밌어하는 거라면 상관없으나, '성취'라는 희열감에 중독된 건 아닌지 의심해봤다.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평가할 눈이 생기는 것 같아 이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지도 않았을까?
나는 직업이 프로젝트 매니저니까 내 인생도 매니징 잘할 거라 생각했다. 여행하면서 일정과 예산 짜고, 버킷리스트에 하나씩 체크해가며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할 줄 알았다.
생각보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챙기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사회에 나와 돈도 벌고, 월세방도 내가 내고, 필요한 건 알아서 척척 해내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일하고 돈 버는 능력을 떠나 실생활에서 내가 못하는 게 많더라. (과일을 잘 못 깎거나 세탁기를 돌리는 법 헷갈려하는 그런 걸 얘기하는 건 절대 아니다)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아니, 어른이 될 수는 있을까, 나이가 들고 더 성숙해질수록 부족한 점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어쩌면 좋은 걸 수도 있다. 스스로가 성숙한 어른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실수가 잦아질 수도. 차라리 '난 아직 어른 되려면 멀었어'라고 생각해야 더 조심하고 실수하게 되지 않게 되니까.
어쨌든, 즐거운데, 참 힘들다. 그래 놓곤 또 갑자기 즐겁다. 오늘은 하루가 좀 덜 요란했으면.
소프트웨어 회사 PM으로 일하다가, 고된 커리어의 길에서 잠시 쉬고 있는 스물다섯입니다. 세계를 여행하는 디지털 노매드 인생으로 잠시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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