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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빈 Sep 16. 2022

말레이시아의 국적 없는 사람들과 싱가포르의 부자들

14일 동안 8만 원, 4일 동안 30만 원 쓰며 느낀 셀프 빈부격차

    스물셋이라는 나이에 조기취업을 했고 그때부터 생존에 목숨 걸고 커리어를 쌓은 결과 또래보다 평균 몇 배의 자산을 모았다. 그럼에도 서울의 높은 물가와 집값을 고려해 돈을 제한적으로 분배해 착실히 가계부를 작성하며 청년 정책 수혜는 다 받아먹으며 가계부를 짠다.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의 일상이다. 이번 청년 월세 지원받은 2만 명의 청년 중 한 명도 나였다.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돈 들어왔단 알람이 울릴 때 울컥함은 사회초년생이라면 다 알 거다. 직장인들끼리 독서모임이나 스터디그룹을 자주 가기 때문에 대화하다 보면 모두가 공감한다. 돈을 버는 능력, 관리하는 능력, 불리는 능력 이 세 가지는 완전히 달라서 월급이 들어오는 순간부터 고민이 시작된다고.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며 돈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참 많다. 내가 배워야 할 사람들이다.


  원래 나는 돈 공부에 항상 반감이 있었다. 내가 실력 많이 키워서 어느 정도 많이 벌면 공부할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다. 또래보다 더 잘 벌면 부족함 없이 잘 살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를 퇴사하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고, 버킷리스트가 늘어나는 변수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한 거다. 내가 나를 모른 거다. 사회를 모른 거다. 내 인생의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잘 안다고 교만했던 거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격변하는 내 인생에 대비하고자 돈만 필요하지 않은 걸 안다. 난 높은 지위에 대한 욕심도 물론 있다. 남의 밑에서 일하느니 내가 사장이 되겠다며 스타트업 차리려는 대학생들 수가 통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책임 많은 CEO 자리는 싫고, 차라리 뒤에서 회사를 조종하는 직무가 낫겠다 싶어 찾다가 PM으로 커리어를 정착했다.


  미국에서 유망 직종 3위, 한국에서 2위인 직무를 선택한 건 높은 지위와 연봉을 얻어야 내가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국가의 시스템이 그렇다면 나는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는 거다. 그리고 이건 나뿐만 아니라 부족한 재정에 갈증이 큰 중산층 대한민국 청년들이 취하려는 성공의 길이기도 하다. '평균'의 기준은 매년 올라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선택지가 다르지만 목표가 편안한 삶이라는 걸 안다.




  말레이시아의 바자우족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 동쪽 및 필리핀 남쪽 일대에 퍼져 사는 사람들로, 바다에 설치한 수상가옥이나 뗏목 위에서 생활해 '바다의 유목민'으로 불린다. 죽어서야 땅에 돌아가는 이들은 먹을거리를 찾아 수심 70m까지 잠수할 수 있다. 바다에서 먹고사는 이들은 가끔 말린 해산물을 부둣가에 가지고 와 팔기도 한다. 한 번 관심을 보이면 살 때까지 옆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셈포르나의 길을 걷다 보면 더러운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작은 아이들이 보인다. 이들 중 일부는 바자우족 부모가 버리고 간, 혹은 잃어버린 국경 없는 아이들이거나 필리핀에서 넘어온 불법이민가족들의 자식들이다. 가난한 이들은 내가 거리를 걸을 때마다 1링깃(300원)만 달라며 손을 뻗었다. 주머니에 항상 쿠키를 넣고 다녔다가 주었다. 어떤 남자애들은 자신은 돈이 필요하다며 다시 찾아오기도 했다.


  15KG의 가방을 유지해야 하기에 비싼 옷과 장신구는 다 놓고 온 나는 셈포르나에서 철저히 저렴한 삶을 살았다. 14일 동안 하루는 매끼 300원어치 인도 난만 카레에 찍어 먹은 적도 있다. 관광 점보다 현지 해산물 음식점을 찾았다. 쇼핑도 현지인들이 한 벌에 1500원씩 무더기로 파는 창고에서 했다.


  화장은 주의를 끌까 봐 최대한 안 했고 옷도 긴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물이 차가워서 빠르게 샤워하느라 린스를 건너뛴 덕분에 머리는 항상 부스스했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하루 종일 숙소에 머문 적도 있었다.


  셈포르나는 관광지지만 가난한 마을이었다. 외국인에게 돈을 달라고 오는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 중 어린아이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 내 재정도 빠듯한데 내가 서울에서 하루 동안 쓰는 돈이 이들에게는 얼마나 큰돈일까 생각해봤다.




    굳이 싱가포르를 방문할 이유가 처음에 없었지만 유명한 대학에서 석사를 공부하는 대학 동창이 있어 핑계가 생겼다. 이 나라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싱가포르로 오자마자 서울과 다를 것 없는 도시 풍경에 넋을 잃었다.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쇼핑, 먹거리, 카페, 오락거리가 여기도 있었다. 가격은 비슷하거나 비싸다. 싱가포르 1달러가 최근 천 원을 넘었고, GDP가 한국보다 높을 정도로 잘 사는 국가라는 걸 알았다. 한국어만 안 쓰지 서울과 다를 게 없었다.


종로를 연상시키는 싱가포르 도시에서.
한국과 비슷한 물가, 더 다양한 과일과 인종


  회색 고층 빌딩이 빽빽이 늘어진 거리는 내가 일했던 회사가 위치한 종로를 연상시켰다. 녹색 조경이 좀 더 잘 조성되어 있을 뿐 느낌은 한국과 다를 게 없었다. 정장 입은 회사원들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나는 평일 놀고 있다는 왠지 모를 희열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시간만 날아왔을 뿐인데 천국이 펼쳐졌다. 일주일  번은 비싼 바에서 와인을 홀짝이던 서울 생활을 여기서 다시 시작했다. 특별한  없지만 느껴지는 익숙함에  쓰는 재미가 다시 몸에 붙기 시작했다. 친구나 센토사(Sentosa) 섬을 들려 놀이기구를 타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비싼 식료품을 주저 없이  집에서 요리해 먹는, 서울에서의 '평범한' 일상을 이곳에서 다시 시작한 느낌이었다.


싱가포르의 섬 센토사(Sentosa)에서.


  그렇게 익숙한 환경에서 여유롭게 지내는 나 자신을 보며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전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부자였다. 나보다 높은 연봉과 실력의 사람들을 닮아가고 싶어 하던 나의 모습은 누군가가 나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다.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풍요로운 인생이라는 사실에 모순을 느낀다. 나는 더 위로 올라가기 바라는데 여기가 이미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고 바라는 위치라는 사실이 용납하기 어렵다.


  비교적 빨리 시작한 지금보다 높은 곳에 설 거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사회라는 계급 꼭대기에 올라가도 나는 내 인생에 만족할까?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진 않을까.


  내가 아는 기준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더 나은 삶'의 기준은 그저 평범하게 먹고사는 삶일 수도. 말레이시아의 바자우족처럼 수상가옥에서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삶일 수도 있다. 한국 청년들처럼 사장이 돼서 회사를 거느리는 삶일 수도 있다. 싱가포르에서 여유롭게 쇼핑할 돈이 언제나 충분할 삶일 수도 있다. 나처럼 부족함 없이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인생일 수도 있다.


두리안 케이크.


  더 나은 삶은 남들보다 풍요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기준이 확고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두 나라의 빈부격차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내 인생의 목표를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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