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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빈 Oct 18. 2022

브루나이 정글에서 한 달 살기

꽃과 비는 좋지만 이 나라는 불편하다 

  비가 온다. 마당에 심어놓은 알록달록한 꽃들, 옥수수밭, 달콤한 코코넛 나무와 거북이가 사는 연못과 그 뒤로 펼쳐진 정글이 조금씩 젖는다. 오후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 세차게 내리는 비가 오면 원래도 조용했던 마을은 더욱 정적이 돈다. 빗소리와 개구리 우는 소리, 지나가는 차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자세히 듣고 있으면 빗소리가 다 제각각이다.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는 '툭' 소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탁탁' 소리,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컹'한 소리까지.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 같다. 곧 있으면 보고 있는 연못에 백조가 날아올 거다. 원숭이도 물 마시러 나올 수 있다. 가끔 악어같이 생긴 커다란 도마뱀이 찾아오기도 한다.


머무는 집 뒷마당 - 브루나이


  뒤뜰의 숲을 지나면 맑은 계곡이 나온다. 지난주 강가에서 낚시하다가 잡은 물고기를 데려왔는데 벌써 아기 물고기들을 낳은 듯하다. 거북이도 뻐끔뻐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다.


  집 안에서 어제 사놓은 꿀통을 열었더니 개미가 뚜껑 주위를 핥고 있다. 물로 씻어내고 빵에 버터와 바르니 완벽한 아침이다. 방에 작은 도마뱀이 우는 소리가 나니 개코가 창문을 타고 들어왔음을 직감한다. 집 자체가 수상가옥처럼 높게 지어졌기 모기나 메뚜기 등 고소공포증이 있는 곤충들은 들어오지 않는다. 비로 씻겨진 맑은 공기를 맡고자 온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누가 건든 것이 아닌데 그 자체만으로 예쁜 자연의 매력은 도시의 휘황찬란함과 다르다. 자연의 매력은 '평화로움'이다. 평화로운 고요함 뒤에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깊은 기쁨이 있다. 






  브루나이의 모든 도시가 정글인 건 아니다. [정글의 법칙] 쇼로 한국에 알려지긴 했지만.  브루나이는 석유 강국으로 나라가 재정적으로 부유하며 때문에 복지정책이 좋다. 나라 내에 일할 거리가 많이 없어 국민들을 위해 정부가 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일거리의 수가 제한적이라, 국민 한 명이 일을 가져가면 평생 그 일을 할 확률이 커, 젊은 세대인들이 가져갈 일이 없다는 거다. 


  국민들에게 복지정책이 좋으니 일의 강도가 세지 않다. 전체적으로 여유로운 나라다. 브루나이의 국왕 술탄은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부자 중 한 명인데, 그가 가진 왕궁은 침실만 몇 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도시의 중심이라 불리는 곳은 번잡하지 않다. 한국 경기도 시골 풍경을 연상시킨다. 


브루나이 도시 중심지


  납작한 건물 몇 개와 넓은 도로, 가끔 크게 솟은 쇼핑몰이라 불리는 3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그 뒤로 넓게 펼쳐진 논이 있다. 도시 중심이라기에 사람이 너무 없고 조용하다. 브루나이에서는 법적으로 라이브 음악을 거리에서 연주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지도 위의 브루나이



  내가 사는 정글 템부롱(Temburong)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다. 브루나이의 시골이다. 도시에서 한 시간 이상 차로 달려야 도착하는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다. 이웃들은 서로 잘 교류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칠 때 환하게 웃으며 인사할 뿐이다.


  문명과 동떨어진 이곳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정글이다. 잠시 머물게 된 두 번째 부모님의 집과 이곳의 모든 집들은 바닥에서 떨어진 수상가옥의 형태로 지어졌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악어나 가축 등이 집 안으로 돌아오는 걸 막기 위함이다. 모기 등의 해로운 곤충도 높은 곳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높게 짓는 것이 유리하다. 둘째는 홍수가 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정글이라 비가 넘치게 오는 경우가 있다. 셋째는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공기가 잘 순환되어 찬 공기가 적절히 집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을의 듬성듬성 떨어진 이웃집들 - 브루나이, 오후 7시


  이곳에 오게 된 건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나의 두 번째 백인 부모님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14살 홈스쿨러 시절 선생님은 없는데 영어가 너무 배우고 싶던 때가 있었다. 교회에서 영어예배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반주자로 들어갔다. 그때 처음 만난 외국인들 중 키 크신 부부 두 명이 내게 다가와 자진하여 첫 영어 선생님가 되어주시겠다며 날 딸처럼 챙겼다. 아이가 없는 그분들에게 나는 한국인 딸이 되었다. 


  덕분에 세계를 배우기 전 아프리카를 배웠고, 이는 훗날 한국외대에서 아프리카 지역학을 전공한 계기가 되었다. 그분들이 케냐, 에티오피아, 남아공, 태국,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근무하실 때마다 해당 나라를 방문했었다. 그리고 10년 후인 이번 해 2022년, 이번엔 브루나이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남아공 부부와 정글 강가에서 - 브루나이


  시골의 학교에서 국제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계신 남아공 부부 덕분에 나는 자연 속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야 하는 환경에도 오전 프리랜서로 고객들과 소통하고, 오후에는 베이킹이나 요리, 밤에는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느라 매일을 생산적으로 바쁘게 보냈다. 덕분에 시간이 남을 때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살게 된 집 바로 옆에는 빈 수상가옥이 한 채 있다. 늙은 할아버지가 살던 집인데 돌아가신 지 오래고, 따라서 아무도 안을 정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집을 재산으로 물려받았지만 처리하기 귀찮았는지 그대로 두고 한참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가신 이웃 할아버지의 집 - 브루나이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죽은 자의 집은 저주가 깃든다는 미신이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 가옥 근처에 다가가지 않는다. 나의 두 번째 부모님은 집 근처에 버려진 유리그릇과 컵을 주어왔다. 깨끗하게 씻어서 선반에 보관하고 나도 컵에 커피를 담아 마셨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의 일부분은 자라난 덩굴 꽃들로 뒤덮여 있다. 두 번째 부모님은 가끔 버려진 집 근처의 잡초를 뽑는다. 둥지를 튼 새들을 위해 먹이를 주러 가기도 한다. 떨어진 꽃은 주워서 집으로 가져와 병에 꽂아놓는다. 




  와이파이가 잘 되지 않아 대용량 파일을 업로드하거나 유튜브 업로드가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급한 나의 '빨리빨리' 성격이 시험되는 수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도심지로 차를 끌고 가기 때문에 그날까지 오매불망 기다리다가 스타벅스 카페에 도착. 스타벅스에서도 와이파이가 너무 느려 분통이 터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와이파이가 나라 전체적으로 느리다더라.


  악어가 수시로 출몰한다는 강가에서 새우를 잡으러 낚시를 나간 적이 있다. 보트를 모는 현지인 아저씨와 다섯 곳을 돌았는데 그날 새우가 잘 잡히지 않았다. 네 시간 동안 나를 포함한 네 명이 8대의 낚싯줄을 던지고 기다렸지만 달랑 커다란 새우 다섯 마리만 잡혔다. 그중 한 마리에게 손이 긁혀 피가 났다. 긴고 긴 과정 끝의 보잘것없는 결과는 내 분노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었다. 브루나이는 내게 인내심을 배우도록 강요했다.


현지 마켓에서 - 브루나이





  나는 엄격한 이슬람 국교 나라인 브루나이를 여행하며 종교적인 충격을 받았다. 인종이 말레이라면, 혹은 브루나 이인이라면 태생적으로 이슬람인이라는 신분이 법적으로 부여된다. 타 종교로 바꾸는 것을 국가에서 허락하지 않으며 여성이라면 머리카락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술탄이나 이슬람 신에 대해 반대하는 발언을 하면 모욕으로 간주되며 감옥형이 내려질 수 있다. 현지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유일신이라는 발언을 한 목사가 종교 경찰들에게 붙잡혀갔다는 소문이 돈다.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스타벅스 카페 근처 표지 - 브루나이 다루살람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에 온 이상 얼굴과 발 말고는 노출하지 안 도로고 매일 옷차림을 점검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나와는 너무나 다른 가치관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느낀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니 외계인처럼 서로를 경계하게 되는 순간들을 경험하며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 생각해본다.


현지 학교 들렸을 때 만난 6학년 졸업반 아이들


  소수 종교인 기독교를 섬기는 현지 교회를 들렸다. 이슬람 국가인 브루나이에는 교회 찾기가 드물다. 무대에서 춤추며 찬송가를 부르는 그들의 탐스럽고 긴 검은색 머리들이 무대 위에서 찰랑이며 빛을 반사했다. 브루나이 3주째인 그날, 나는 처음으로 히잡을 쓰지 않은 브루나이 여성들을 보았다. 현지 여성들의 아름다운 미모를 그제야 봤다. 


  교회에서 눈을 질끈 감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브루나이 할머니를 보았다. 이 나라에서 다수가 믿는 종교에서 떨어져 소수 종교로 취급받는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까 생각해봤다. 종교를 떠나 유리하지 않은 환경에서 하나의 가치관을 끈기 있게 붙잡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존경스럽다. 나는 그럴 용기가 아직 많지 않아서다. 


수상가옥 숙소 아래, 정글을 보며 작업 중 - 브루나이


  이 작은 나라는 참으로 흥미로운 곳이다. 나는 한국에서 멀지 않지만 참 먼 느낌을 주는, 나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한 달을 살아본다. 결국 여행 패키지를 알아보거나 현지 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보다는 정글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자연 풍경만 창밖으로 하루 종일 감상하기를 택했다. 아무래도 그게 더 편했다. 나는 이곳을 알아가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브루나이 출국날, 스쳐지나간 현지 지인들이 선물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러 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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