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의 절반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게리 켈러와 제이 파파산이 쓴 <원씽>에 나오는 이 말은 너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반평생을 살아오면서 삶의 괴로움은 불덩이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을 때 온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과 신념의 부재 때문이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에 대한 삶의 의문은 석사 학위를 받고 직장 생활과 애정사가 시작되면서 늘 따라다녔다. 이는 네 자신의 부족을 상기시켰고 풀리지 않는 시퍼런 멍울로 맺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사 지도 교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전화 한 통이 너를 또 다른 운명의 길로 이끌 어줄 서막이 될 줄이야.
박사 과정을 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일 년을 수학하고, 중국 사회과학원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한중 복수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확답은 생각의 여지도 없이 전화선을 이미 넘고 있었다. 그 때 네 나이 불혹의 세계는 네 삶과 타자에게 평온이라는 프레임을 씌운채 혼돈 그 자체였다.
다시 학문의 길로 들어서면서 중국과의 인연은 네 인생에서 떼 놓고 생각할래야 할 수 없다.
사실 인연이라고 하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색채가 농밀하다. 그래서 나는 인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판을 깔아 주는 것은 어쩌면 하늘의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판에서 춤을 추고 안 추고는 본인의 결정에 달렸기 때문이다.
새 삶에 대한 갈등과 목마름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나이, 돈, 직장, 가정, 남은 인생을 관통하는 불확실성이라는 변수를 과감히 떨칠 수 있었을까 싶다.
중국 행 티켓은 부친의 반대, 사랑이라는 불덩이를 내려놓고서 쥘 수 있었다. 그 결단이 빨랐던 이유는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게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한동안 너의 사고를 굼뜨게 만들었고 육체도 꼼짝달싹 못 하게 했다.
당시 중국 사회 과학원이 베이징 왕징에 있었는데 학교가 협소하고 기숙사가 턱없이 부족했다. 외곽에 짓고 있던 양산 캠퍼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당장 들어 갈 기숙사도 마련 못 하고 정신없이 베이징에 도착했다.
잠시 중국 대학에 교사로 파견되어 왔을 때 친하게 지냈던 중국 동생 기숙사에 3개월을 얹혀 살았다. 두 평 남짓한 방이었지만, 중국은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고 다니는 문화라 아무리 공간이 없어도 침대가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중국 학교 생활은 새벽 첫차를 타고 나가서 밤하늘을 보며 돌아오곤 했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해서 살 맛이 있다고 곧잘 중얼거리면서.
한국에서 수학할 때 많은 동창이 대만으로,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왔지만, 네게는 별나라 가는 이야기였다.
지금 그 곳에 네가 있다.
새 캠퍼스에 기숙사생을 받는다는 통지를 받고 드디어 본격적인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같은 중국 지도 교수 문하생으로 동창 두 명이 이미 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스물 네댓 살 되는 남학생이었고 얼굴만 알고 있었다. 처음 중국 학교에 가서는 교양 과목을 위주로 수업하다 보니 동창들과 만날 기회도 적었다.
기숙사는 외국 학생과 중국 학생 기숙사 건물이 따로 있어 함께 생활할 수 없었다. 대만 학생도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외국인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1인 1실과 2인 1실이 있는데, 너는 1인 1실에 들어갔다. 가구는 침대, 책상, 작은 옷장 하나가 다였다. 방에 딸린 화장실에 서서 샤워를 해야 했다. 돌아설 공간조차 없었고, 세탁은 공동 세탁실에서 세탁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가장 적응이 안 되었던 게 식사였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학생들이 각자 자기 도시락을 하나씩 지참하고 가서 밥을 타왔다. 반찬과 밥이 한 개의 도시락 속에서 덮밥이 되었다.
당시 중국 학생들 중에는 만터우(앙금 없는 찐빵) 하나에 반찬 하나 얻어 한 끼를 해결하는 학생이 꽤 있었다.
너는 도시락을 들고 식당에 가 줄을 서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다. 같이 식당에 갈 친구도 없었지만, 도시락을 들고 뻘쭘하게 줄을 선 네 모습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소를 하려고 열어둔 방문 틈으로 누군가의 얼굴이 반쯤 들어 왔다.
“새로 이사 왔니, 어느 나라에서 왔어?”
“응, 나 한국인이야.”
“이름이 뭐야”
“성은 이(李), 이름은 아름다울 미(美)자에 풍경 경(景) 자를 써.”
“아? 하하하, 아름다운 풍경! 아마 네 이름을 잊는 사람은 없을걸.”
사실 중국에서 '美景'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어휘다.
나는 자라면서 내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날 때 달력에 있던 예쁜 모델 이름이 ‘미경’이라서 부모님이 지어 준 거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한 반에 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기본 세 명씩은 있었다. 성을 같이 붙이지 않고서는 호명을 하면 세 명이 함께 일어서는 일이 웃고픈 일이 너에게는 울고픈 일이 다반사였다.
그후 너는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풍경 같은 사람,‘메이징’(美景)으로.
그래서일까?
창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네 중국 생활에 비치는 서광 같은 예감이 드는 이유가.
네가 중국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하나 있다.
‘원씽’에 나오는 이 말이 그 생각을 대변해 줄 것 같다.
“삶의 매 순간 가장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떳떳하게 ‘여기가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고, 나는 내가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의 삶 속에 숨어 있는 모든 훌륭한 가능성이 현실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