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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미투 신드롬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냐로 볼 수 있다. 통제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그러함을 가진 동물을 우리는 인간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이론적 분류를 해 놓고 보니, 역시 현실과 이론은 차이가 있었다. 생각 속에 그러함과 실제의 그러함은 달랐다.


인간의 모습과 행동,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통해 인간이라는 특성을 구분하였지만, 그렇지 않는 인간도 있으며,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었고, 인간의 모습만 있었으나, 인간의 행동이기를 거부한 인간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그러한 점을 나는 인간의 이중성이라고 보며, 이것이 바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빛과 어둠, 앞과 뒤, 겉과 속의 차이처럼 본성 이면의 이중성을, 본성이라는 양면의 이중성을 우리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이중성을 이용하는 것 역시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런 이중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미투를 생각해 보자. 우리 사회는 최근 미투를 통해 알게 된 가해자 인간들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고, 분노하고 있다. Me Too 라는 말은 "나 역시 그렇다." 는 뜻으로 좀 더 직설적으로는 "나도 당했다"로 특정 인간의 모습, 그 이중성을 고발함을 말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개인적 미투 공유가 SNS의 빠른 공유로 미투 신드롬을 일으켰다. 미국 영화계의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으로 시작된 그의 성추행 폭로 미투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 한국 사회도 그와 전혀 다르지 않다. 아마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 일 것 같다. 공간과 사람만 다를 뿐 미투,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이중성은 어디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나는 미투를 통해 본 인간의 이중성에 분노하고 있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권력의 추악한 민낯, 그릇된 욕망의 범죄에 분노를 표함과 동시에 언제어디서나 오늘의 미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이 사회에 반드시 변화되어야 할 필요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미투가 말해 주는 인간의 이중적 추악함이 오늘에만 있었겠는가? 아니다. 단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을 거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지 않았을 거다. 밝혀지지 않았을 뿐...과거에는 언론의 기능도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조작도 얼마든지 가능했고, 통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다른나라의 일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왔다. 1인 미디어의 엄청난 파급력이 생겼다. 누구나가 핸드폰으로 주변의 일상을 다른 사람에게 실시간으로 공유가 가능하다. 과거에는 그런 SNS의 기능도 없던 시대여서, 우리가 알지 못할 뿐 우리 사회 곳곳에 그러한 추악함이 더 했었었다. 미투가 신드롬을 일으키기까지  SNS의 지대한 역할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아니 SNS가 절대적이다. 1인 미디어의 발달, 이동통신의 발달, 네트워크를 통한 공유의 일상화가 가져 온 사회의 변화이다. 이런 디지털의 변화만이 미투 신드롬을 가져 왔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의 의식의 변화, 남녀 평등성의 강화, 여성지위의 향상으로 인해 과거의 성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미투 신드롬의 큰 역할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중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지만, 디지털의 변화와 우리 의식의 변화가 인간의 이중성을 더 잘 고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 미투로 추악한 인간의 이중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원래 인간의 이중성이 권력 속에 묻혀져 가려졌으나,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공유의 일상화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중성이 권력이라는 무기를 가지게 되면 욕망의 이중적 분출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더욱 더 강해진다. 권력의 부패 속성과 인간의 이중 본성이 만나면서 최초의 목적과 방향을 잃어 버려 동물적 본능에 충실해 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미투 신드롬을 통해 세상은 또 한번의 진일보한다고 본다. 추악한 이중성은 사회 매장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우리모두는 그 추악한 모습을 경멸하며 그러한 모습을 모두가 조심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추악한 민낯은 어쩌면 더욱 더 이중적인 모습에 가려질 수 있지만, 조직과 사회의 권력의 추악함은 현저히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중적 본성은 그대로 있기에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의 제도적, 의식적, 구조적으로 우리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사회제도, 권력구조의 개방성을 항상 고려해야 하며, 권력을 이용한 욕망의 제한하기 위해 권력의 분립, 견제와 균형을 가져 올 수 있는 제도적 개방성을 항상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의사결정 구조의 공개, 재정의 공개, 권력형성,유지 과정,결과의 공개성을 늘 가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또한 개인은 건전한 가치관, 윤리적 가치관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되고, 교육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종교지도자, 교육자, 기타 권력 지도자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인정과 교육, 지속적인 소통, 타인에 대한, 약자에 대한 배려를 늘 염두해 둘 수 있는 생각을 늘 머리와 가슴에 새길 수 있어야 하겠다.


지금 미투 사건에 대해 분노하지만,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투가 하나의 시대적 유행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가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그 몫은 바로 우리 모두가 고민할 때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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