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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저녁이 꾸는 꿈

아침, 점심, 저녁 삼시 세끼를 회사에서 회사 사람들과 먹었을 때가 있었다. 매일 6시에 일어나 씻고 통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도착해서 7시에 아침을 먹고 7시 30분에 자리에 앉아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럴 때가 있었다.


제조업, 공장에서 일한다면 아마 이런 일상패턴이 자연스러울 거다. 제조 프론트라인은 빨리 시작하고 빨리 업무가 종료된다. 그래서 정상업무 시간은 오전8시부터 오후5시까지이다.


오전7시 반부터 점심 12시까지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한참 일을 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 오전9시 반밖에 되지 않았을 때가 꽤 있었다. 그 땐 그랬다.


오전 10시에 생산라인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10분 쉬고 12시까지 오전 업무 종료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팀원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1000명 정도가 동시에 식사 가능한 대형 구내식당에서 바로 식판에 자율배식을 하고 밥을 초스피드로 먹고 자리로 올라왔다. 먹고나면 넓은 공장은 산책할 수 있긴한데 뭐랄까...느낌이 좀 그랬다. 산책의 느낌이라기보다는...그 땐 그랬다.


점심을 먹고 오후의 일과가 또다시 시작된다. 정형화된 스케줄, 제조라인에 맞추어진 업무 일상이 사실 이해가 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직무 특성과 조직의 성격, 업무의 난이도가 전혀 고려 되지 않은 대규모 조직 운영 효율성이 중요시 되던 그 때의 시대 정신이 그런 시절을 만들어 놓았다.


저녁 5시 업무 종료 벨소리와 함께 제조라인 근무자의 퇴근, 야간 작업자의 저녁식사가 시작된다. 나도 이 틈에 끼여 역시 팀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 주로 라면이 제공되기에 간단히 라면을 먹고 야근에 돌입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마무리 업무를 하곤 했다. 그땐 그랬다.


그리고 두 세시간이 흐른 여덟 시 경 선임사원의 한 마디에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가방을 싼다. 그것은 공포의 치맥한잔!!! 거의 매일이 치맥이었다. 좋았던 치맥도 있었고, 가기 싫었던 치맥도 있었지만, 열외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볍게 목 좀 축이고 집에가자. "

마감종소리다. 그 땐 그랬다.


대단위로 움직여 지는 가운데 생기는 운영의 효율성이 개인의 자율성보다 더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의 장점도 분명있다. 쪽수를 활용한 구매력이 크고, 그에 따른 가격 협상력이 좋아 비용이 절감되어 기업 복지가 상대적으로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통근버스도 운영할 수 있고, 기업회원 콘도, 복지카드 등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분명 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굉장히 제한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저항이 크기에 그 누구하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그런 분위기, 문화가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그렇기에 개인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의미가 없었다. 저녁이 주는 기쁨, 저녁에 꾸는 꿈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도 그 문화에 조금씩 젖어 갔고,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근데, 그 때 항상 의문이 있었고, 왜 그래야 하는지, 이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매일의 일상이 좀 낯설었다. 그러면서 변화의 목소리도 내고, 조직문화 프로젝트도 하고, 구성원의 대표가 되어 다르게 접근하는 여러가지 활동도 실행해 보았다. 완전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름의 신선한 시도였고, 모두가 긍정적으로 봐 주기도 했었다.


어느 평일 저녁, 법정근로시간을 한 참 오바된 그 때,

모두들 오전 9시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오후 7시30분 즈음 팀장님께 오늘은 먼저 퇴근을 해야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눈이 휘동그래진 팀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집에 무슨일 있어?"


그렇게 하고 나왔는데, 내 머리 속에 지금 퇴근 시간이 한 참 지났는데, 내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며 나가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는지 이 상황이 굉장히 좀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 때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도 완전히 그런 조직문화가 없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시대와 세대가 확실히 바뀌긴 했다. 우리 아버지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는 그 삶 자체가 일이었다.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물아일체의 세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아버지랑 평일 저녁을 먹은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굉장히 바쁜 일상이었던 것 같다. 주말, 휴일에도 일을 했으니... 그렇다고 대기업 직원이거나 민간기업이 아닌 지방공무원이셨는데, 그랬었다. 아버지가 일을 한 시대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왔다.


지금은 생활수준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소득수준, 경제상황, 문화수준, 교육수준, 여가생활 어느 것 하나 과거와 비교할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다. 개인의 삶의 가치가 굉장히 중요해 졌으며, 시간의 활용 가치, 일과 삶의 균형, 삶의 질 등 시간과 일상에 대한 생각의 깊이, 활용의 정도가 매우 다른 시대가 되었다.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를 모를 때가 있었다. 조직 생활이라는 것에 묻혀 얼마나 개인의 가치관, 목적성을 잃었는 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서 조직과 개인 중 늘 조직이 우선시 되던 때도 있었다.


나도 그렇다. 그런 그 때의 시절도 경험했지만, 그 시절의 시대가치와 정신이 있었고, 그 가치에 도전도 했고, 변화를 하고자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의 세대가 되었고, 나도 그 세대의 일부로 존재한다.


저녁이 꾸는 꿈이 누구나 있다. 그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는 각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과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저녁이 되는지는 정답은 없다. 조직에 충성을 하는 것도 맞을 수 있고, 개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맞을 수 있고, 어떤 저녁이 꾸는 꿈에 따라 달라진다.


나도 오늘 저녁이 꾸는 꿈을 꾸었다. 그 때 그 시절에도 나의 저녁이 꾸는 꿈을 꾸었고, 오늘도 똑같다. 그 저녁에 내가 책임지고, 결정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 이끄는 저녁이 되면 된다. 그 목적을 늘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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