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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일관성과 이중성 II

일관성과 이중성에 대해서 더 고민하게 되었다. 미디어가 지금처럼 활발히 발달한 시대에서 일관성과 이중성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것보다 사회가 정의한 의미가 더욱 정확하리라 생각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니, 일관성은 하나의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성질이며, 이중성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이라 한다. 사전적인 의미라서 나에게 깊이 있게 그 의미를 전달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중성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른,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않은 작금의 정치, 사람, 그들의 행태를 보면서 분노의 글을 써본다.


중립성, 객관성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특정인물의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기로 하면서 시작해 보고자 한다. 현 정권을 탄생하게 한 촛불집회, 촛불혁명을 나 역시 존중하고, 그 시작과 끝을 역사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역사의 소명 앞에 앞과 뒤가 다른 정치인들에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보수 정권의 부패와 부정에 대해 비판해 왔었고, 보수의 현실 앞에 분노했었기에 현 정권 인사, 다시 말하면 진보의 이중성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 경제, 부동산, 정치, 법무, 노동, 복지, 행정, 여성, 안보, 국방, 외교 등의 개혁 앞에 진보와 보수 정책이 다른 게 무엇이고, 지금까지 달라진 게 무엇인지, 변화된 게 무엇인지, 사실 구분 조차 되지 않는다. 개혁, 혁신을 부르짖으나, 과연 그 목적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최근 진보 인사가 국무위원으로 되면서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그 진보 인사는 디지털 SNS를 통해 그동안 수많이 보수 인물의 낙마를 주도 했었고, 그게 자의든 타의든, 의도했든 의도 하지 않았든 간에 수많은 논란 가운데 섰었고, 그 논란으로 인해 진보진영의 대표 목소리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가 주장했던 수많은 논리, 근거가 자신의 삶 앞에서는 앞과 뒤가 다른 이중성이 드러 났고, 그게 강남 좌파의 본색이었다고 판단된다. 다시 말하면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부와 세습은 당연시 되는, 자신과 가족은 엘리트 계급이고,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는 계급의식이 그 저변에 있는 것이 실제였던 것이다. 무엇이 진보의 가치관이고, 무엇이 보수의 가치관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이중성이 아닌가!


일관성이란 무엇인가! 정치에서 일관되고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정책이 만들어지고, 움직여 지는 것이 있는지, 어떤 목적하게 정책이 만들어 지고, 그 비전이 만들어 지는지 사실 우리 정치에 있기는 한가 싶다. 우리의 정치 수준은 어디까지 왔는지, 삼류 정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는지, 언제 우리는 정치 선진국이 될 수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이 미래를 더 우울하게 만든다. 나조차 사실 모든 것이 일관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럼에도 진보 진영이 외쳤던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그들 조차 이미 기득권의 기성세대가 되어 버렸고, 그 다음 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사실 우리나라에 일관성 있는 보수와 진보가 있기는 했는가 싶기도 하다. 보수든 진보든 제대로된 인물조차 찾아 보기 힘든 지금의 정치 세대가 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떻게 될 것인가를 늘 고민해 본다. 난 보수나 진보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합리적 세대이길 원한다. 어차피 정치라는 것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없고, 그 중에서 최선의 자원 배분을 하는 것이 바로 정치임을 난 알고 있고, 그렇게 배웠고,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기에 끊임 없이 투쟁할 것이다. 비합리적인 모순, 이중성이 가득한 정치 세대에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나라, 더 변화된 나라를 다음세대에 넘겨주는 그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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