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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멘달 Jul 22. 2023

나이트클럽 ‘부킹’으로 만나 결혼했다고요?

이상형 남자와 연애 6년, 결혼 19년 차 이야기

  어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몇 번째 기념일인지 세어보려 왼쪽 손가락을 접어 보았는데 두 번이나 접었다 폈다를 해야만 했다. 무려 19주년이었다. 연애 기간 6년까지 합하면 25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나는 이 남자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문득 25년이란 세월을 가늠해 보려 예를 들어 보았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고 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유구한 시간이 흘렀고 아직 함께라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남편을 처음 만난 건 1998년 겨울이었다. 이제 막 대학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여대생으로 몇 번의 미팅과 그저 그런 연애로 일 년을 보내고 있던 나는 그즈음 누군가와의 헤어짐으로 나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남자 친구와 헤어진 나를 달래어 주겠다는 선배들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호텔 나이트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당시 청담동에 위치한 엘루이 호텔 ‘줄리아나’는 청춘 남녀들에게 가장 핫한 장소였다.


  그곳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는 어두컴컴한 홀은 귀가 터질듯한 음악 소리에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도 불가능했다. 선배들은 한 시간 후 우리 테이블에서 다시 만나자고 소리치더니 이내 모두 웨이터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내 손목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부킹’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이트클럽에서는  웨이터들이 여자들 손목을 잡고 남자들이 있는 테이블에 데려가 소개를 시켜주는 ‘부킹’이 흔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왜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 있고 여자들만 여기저기 끌려다녀야 했단 말인가! 아무튼, 요즘은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이제 더 이상 주선자 역할을 했던  웨이터는 지금 세대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일 것 같다.


   내가 웨이터 손에 이끌려 처음 부킹을 간 곳은 하필이면 넥타이를 맨 아저씨들이 가득한 룸이었다. 부킹을 해본 적 없는 나는 엉거주춤 들어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서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 안쪽 소파에 앉아있던 한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헤집고 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나를 정중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자세히 보니 유일하게 넥타이를 메지 않은 그 아저씨는 그나마 그중 제일 젊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맛있는 안주가 가득했다. 맥주만 시켜서 마시는 홀의 테이블과는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 룸은 조용했고 대화가 가능한 곳이었다. 젊은 아저씨는 같은 회사 식구들끼리 회식을 왔는데 먹지도 않는 안주를 많이 시켰다며 “부킹 하느라 배고프실 텐데 좀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농담이 싫지 않았고  마침 배도 고팠던 터라 나는 이것저것 안주를 집어 먹으며 젊은 아저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생각보다 대화가 재미있었던지 꽤 룸에 오래 머물렀던 모양이다. 선배들은 만나야 할 시간에 내가 나타나지 않자 룸마다 나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마침내 한 선배가 내가 있던 룸의 문을 열고 아저씨 부대 틈에 끼어 앉아 있는 나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쉬며) “야, 너 거기서 뭐 해? 빨리 나와~” 라며 나를 잡아끌었다. 아마 내가 소심해서 나가고 싶다는 말도 못 한 채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젊은 아저씨와 미처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선배 손에 이끌려 다시 시끄러운 홀로 나왔다. ‘재미있었는데..’ 나는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웠다. 그렇게 선배들과 함께 시끄러운 홀에 앉아있는데 한 웨이터가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누가 찾는데 잠깐만 같이 가실래요?”


   웨이터가 이끌고 간 곳은 넥타이 아저씨 부대가 가득했던 그 룸이었다. 아까 보았던 젊은 아저씨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인사도 못하고 보내서 아쉬웠다며 룸 안에 있는 모니터로 홀에 있는 나를 찾아냈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다음 날, 그 젊은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휴대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긴 통화를 했는데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저 너무 웃겨서 빵빵 터졌던 기억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리는 첫 데이트를 했고 결국 6년의 연애 끝에 그 젊은 아저씨는 지금의 내 남편이 되었다.


  지금도 선배들을 만나면 나이트에서 만나 결혼까지 한 우리 부부의 이야기는 늘 도마 위에 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은 늘 어린 나이에 시작한 연애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바람에 다른 남자랑 연애도 못해본 내가 제일 불쌍하다며 놀려들 댄다. 자꾸 듣다 보니 살짝 억울한 것도 같다.


  결혼기념일에  마침 남편은 긴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저녁 7시쯤 집에 도착한다는 남편의 문자를 받고 퇴근길에 베이커리에 들러 케이크를 하나 사고 소박한 저녁을 차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 하트 모양의 촛불에 불을 밝히며 문득 나는 남편에게 뜬금없는 고백을 하고 말았다.


“내가 오빠랑 왜 결혼했는 줄 알아?”

“왜 결혼했는데? 잘 생겨서? “

“아니. 웃겨서.”

“……..”


  뜬금없는 나의 고백에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자상하고 따뜻했던 남편과 결혼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웃게 만들었던 남편의 개그 본능은 지금까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제 막 오십을 넘은 남편은 요즘 잔소리가 부쩍 늘었다. 주말부부고 툭하면 해외 출장을 떠나면서도 그나마 며칠 집에 있을 때는 나를 아직 가르쳐야 할 게 많은 21살 여대생처럼 대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44살 아줌마. 더 이상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는 않는다. 남편이 잔소리를 할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말한다.(그때의 통쾌함이란!) 그럴 때마다 우리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흐르지만 곧 숨길 수 없는 남편의 아재 개그로 무장 해제되고 만다.



  ‘부부는 싸워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라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반대다. 부부라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각자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들수록 수면의 질은 또 얼마나 중요한가. 각자의 공간에서 나의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고 난 후 부부가 함께 한다면 오히려 더 성숙한 두 남녀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텅 빈 집에서 남편과 불편하게 얼굴을 마주하며 불필요한 말들을 주고받는 삶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가끔 우리 부부는 노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남편은 아직 에너지가 넘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꿈 많은 청춘이다. 그 옆에서 정적이고 소심한 나도 물론 꿈은 꾼다. 결코 소박하지 않은 나의 꿈은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면 일 년 중  7~8월은 우리 부부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서 지내는 것이다. 유난히 한국의 여름을 싫어하고 동시에 유럽의 여름을 사랑하는 나는 늘 이 멋진 계획을 꿈꾸듯 남편에게 말한다. 결심한 일은 바로 실행에 옮기는 추진력 좋은 남편 덕분에 그동안 많은 곳을 다녔고 참으로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우리 노년의 삶에도 백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느라 도무지 일에 진전이 없는 나 대신 남편이 부디 그 일을 저질러 주길 바란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 남편은 다시 직장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함께 있는 동안 몇 번의 신경전이 있었지만 남편이 떠난 뒤에는 늘 나를 웃겼던 그 아재 개그의 여운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설거지를 하거나 운전을 하던 중에 문득문득 떠올라 슬며시 나를 웃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내 이상형은 키 큰 남자도 아니고 잘 생긴 남자도 아닌 그저 웃긴 남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상형과 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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