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늄_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
장맛비가 며칠째 이어지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내를 위해 생일 꽃다발을 주문한다며 오랜만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번 내 인스타 그램에서 보았던 파란색 작은 꽃이 예뻤었다며 그 꽃이 풍성하게 들어간 꽃다발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파란 꽃이란 바로 델피늄이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야리야리한 푸른빛이 투명하게 빛나는 작고 아름다운 꽃이지만 문제는 꽃말이다.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
델피늄이 너무 예쁘다며 아내가 좋아할 거라고 재차 말하는 친구에게 차마 꽃말은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이렇게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을 세심하게 주문하는 스윗한 나의 남사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한다. 2006년 네덜란드 유학 시절에 만났으니 우리는 올해로 16년 차 친구이다.(우리의 나이가… 맙소사) 한국 학생이 많지 않았던 그 시절 몇 안 되는 동기 유학생 중 우리는 유일한 동갑내기였고 그래서인지 처음 봤을 때부터 나름의 각별함이 느껴졌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긴 머리에 비니를 눌러쓰고 어두컴컴한(네덜란드 날씨는 낮에도 우중 충충한 날이 많다) 연습실 앞 복도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기타를 치던 친구의 모습이 가장 많이 떠오른다. 가끔 한국 학생들끼리 모이던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도 늘 어느 구석에서 조용히 기타를 치던 아이. 목소리와 표정에 큰 변화가 없어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었던 그 친구처럼 그의 연주 또한 더함도 덜함도 없이 늘 담백했다. 마치 감정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마치 자신은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이미 다 겪어 봤다는 듯.. 그래서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았던 잔잔한 그의 기타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몇 년 뒤 친구는 같은 학교에서 보컬을 공부하던 후배 한국 여자 친구를 사귀었고 10여 년의 길고 긴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긴 연애 시간만큼이나 크고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귀국 후 그들은 한국에서 재즈 베이스 기타 리스트와 보컬 리스트로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료 연주자로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 나가고 있다. 아, 그리고 얼마 전 두 사람은 고양이 두 마리의 집사가 되었다.
그런 친구가 아내를 위해 생일 꽃다발을 준비한다는 게 기특(?)해서
“착하네에? 와이프 생일이라고 꽃다발도 주문하고??” 라며 조금은 놀리듯 물었더니
“처음이야. 친구가 플로리스트라서.. 좋네.”라고 말하는 아이.
그때나 지금이나 더함도 덜함도 없는 그 친구의 싱거운 말투가 새삼 정겨웠다.
그나저나 난 델피늄과 어울릴 만한 꽃을 찾아야만 했다. 사실 델피늄의 꽃말 따위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나는 어떤 작품 속의 꽃을 선택할 때 꽃 속의 이야기도 함께 그 속에 녹아들어 가 작품의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세상 모든 것에는 다 스토리가 있지 않을까.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라는 말을 되뇌어 보았다. 질문형인 것 같지만 되뇌어 볼수록 말 줄임표가 있는 혼잣말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사랑이 끝난 후 서로 사랑했던 두 사람 중 사랑의 무게가 더 많았던 쪽의 독백이 아닐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순간에도 누가 더 사랑의 무게가 많은 쪽인지 혹은 적은 쪽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랑을 할 때에는 대게 모른 척을 하고 사랑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참아왔던 말들을 토해내고 만다. 그리고 토해내는 쪽은 당연히 사랑의 무게가 많은 쪽 그러니까 여전히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쪽이다. 그러므로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라는 말 줄임표 뒤에는 ‘나는 여전히 당신을 원해요’ 란 말이 내재되어 있다.
장미 중에서도 나는 주황색 장미를 가장 좋아하는데 그 꽃말이 ‘나는 당신을 원해요’이다. 정열, 유혹의 대명사인 빨간 장미보다 강렬하진 않지만 주황색 장미에게는 은은하게 풍기는 우아한 섹시함 같은 것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음악에도 같은 제목을 가진 곡이 있는데 바로 20세기 초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Je te veux’이다. 혹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몬스 침대~’라는 멘트의 침대 광고를 기억하는지… 그때 흐르던 곡도 바로 에릭 사티의 대표 곡 <짐노페디 1번>이다. 그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세련된 음악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뉴에이지라는 장르 자체가 없던 그 시절 그는 평론가들에게 늘 이단아 취급을 받았고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 여자만을 가슴에 품은 채 가난 속에서 홀로 쓸쓸하게 5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그가 그녀를 생각하며 쓴 곡‘나는 당신을 원해요’는 언뜻 들으면 왈츠풍의 흥겨운 음악이지만 그 안에는 에릭 사티의 애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슬픈 음악이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중년의 부부들에게는 당연히 서로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다. 동시에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라고 따지며 물을 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원해요”라고 애원할 일도 없다. 언뜻 보면 사랑 없는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도 분명히 ‘나는 당신을 원해요’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사랑을 시작하여 몇 번의 다툼과 헤어짐을 반복 한 뒤 결혼을 했고 이 결혼 끝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지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더 무거운 사랑을 했는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그저 ‘부부’라는 이름으로 식당에 나란히 앉아 침묵 속에 밥을 먹어도 세상 편한 사이가 되었으니 이깟 이별의 꽃말쯤이야 뭐가 대수랴.
친구가 부탁한 아내의 생일 축하 꽃다발에 주황색 장미와 델피늄을 듬뿍 넣었다. 친구 부부의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