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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쌤 Nov 30. 2021

코로나 검사가 준 삶의 성찰

열 번째 코로나 PCR 검사를 받으며

'네 되었습니다. 잘 참으시네요. ' 간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파서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섰다.

열 번째로 코로나 PCR 검사를 받았지만 여전히 아픈 것은 똑같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재채기가 계속해서 나와서 할 때마다 힘든 것은 변함이 없다.

아침에 사무실에서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는데 카톡 메시지가 왔다.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니 검사를 받으라는 메시지였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어젯밤에 들었지만 규모가 작지 않은 교회라서 마주칠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었다. 공무원이고 학교에 있는 만큼 검사를 받으라는 메시지를 무시할 수 없었다. 교장, 교감에게 보고하고 수업 교환을 요청한 후, 공가 신청을 하고 부담임한테 아이들을 부탁하고 얼른 학교를 나섰다. PCR 검사 결과가 보통 오전 10시 이전에 나오니 이상 없다는 결과를 예상하고 내일 아침까지 공가를 달았다. 이런 상황들이 학교에서도 여러 번 발생하니 이제는 당연히 이렇게 조치를 한다.

정신없이 여러 가지를 처리하고 학교에서 출발을 하니 11시가 다 되었다. 요즘에 PCR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 얘기를 들었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와서 많이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통행료가 비싸서 평소에 잘 이용하지 않는 고속도로를 타고 최대한 빨리 집 근처 드라이브 스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드라이브 스루에 서있는 차량행렬이 400 ~ 500 m 이상 늘어서 있었다. 검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맨 뒤에 차를 세웠는데 안내하시는 분이 다가오더니 보건소 선별 진료소에 가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얼른 차를 돌려 보건소 선별 진료소로 향했다. 차를 근처 노변 주차장에 주차하고 뛰어서 보건소 앞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었다. 그런데 줄이 보건소 앞 주차장을 넘어 밖에 인도까지 나와있었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어서 줄을 서도 검사를 못 받을 수 있으니 2시 이후에 오라는 안내자의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리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어디 가서 밥을 먹는 것이 좀 그래서 차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분명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1시 10분쯤 다시 보건소로 갔다. 아까 보다는 짧았지만 역시 많은 사람이 줄을 서있었다. 다시 돌아가면 더 줄이 길어질 것 같아서 긴 대기줄의 맨 끝에 섰다. 비간 온 후로 날씨가 추워지고 바람도 불어 서서 기다리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학교에서 계속 걸려오는 전화들로 인하여 기다림의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왜 갑자기 이렇게 일이 많이 생기는지 거의 검사를 받기 직전까지 우리 반 아이들 문제와 학교 업무로 인하여 전화 통화를 해야 했다.


검사 순서가 거의 다 될 때쯤 내 앞에 서있는 남자분이 통화를 하면서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 추위에도 대부분 정직하게 줄을 서고 있는데 끼어들기하려는 것이 조금은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뭐라고 한 번 이야기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 앞의 남자분의 손짓에 두터운 패딩을 입고 뛰어오는 것은 초등학교 2~3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학생이었다.

순간 아무 말 안 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검사 대상자는 어린 딸이었고 아빠는 추운 날씨 속에 딸이 고생하지 않게 줄을 대신 서준 것이었다. 그 아빠는 딸이 검사를 받는 순간에도 옆에서 함께하고 있었다. 두 딸의 아빠로서 울컥한 마음이 들었고 무슨 일이든 섵부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어째튼 장장 3시간 30분의 기다림 끝에 코로나 검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받은 PCR 검사 중 가장 어렵게 받은 검사였던 것 같다.

10번 가까이 PCR 검사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뭐 이해는 되기는 한다. 내 주변의 성인들 중에 의료기관 종사자나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열 번 가까이 PCR 검사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 것 같다.

열 번의 PCR 검사 중 6번은 보호자로서 어머니가 입원해 계셨던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면서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번은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와서였고 한 번은 장기간 특정 장소에 격리되어 입소하는 출장을 가면서 받게 되었다. PCR 검사를 많이 받게 되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까지도 검사 후 고통은 똑같은 것 같다. 고통의 정도는 똑같지만 이미 경험을 해 봤기에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 드리게 되고, 고통이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시련들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었고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묵묵히 버티다 보면 어느덧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식을 위해 헌신하시며 험난한 세상을 헤쳐왔던 부모님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항상 우리가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 이셨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드리고도 묵묵하게 일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이 주는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된다.


커버 이지지 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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