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직전에야 알게 된 사실
요즘에는 퇴직연금에 가입한 사업장이 많다. 퇴직연금을 크게 분류하면 DB형과 DC형으로 나뉘는데, 회사에서는 DC형 퇴직연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노동 상담을 할 때, 근로자가 퇴직급여에 관하여 질문하면, 나는 퇴직연금 가입 여부를 먼저 확인한다. 그런데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는지를 잘 모르는 근로자가 많다. 실제로 가입이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오래전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사실, 회사에서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고, 퇴직연금 교육을 제대로 실시했다면, 근로자가 퇴직연금 가입 사실을 모르기는 어렵다. 물론, 회사에서 이러한 절차와 교육을 모두 이행했는데도, 근로자가 무관심하여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 상담을 할 때마다 이러한 근로자를 만나면서, 단순히 근로자의 무관심을 탓할 수가 없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DC형 퇴직연금의 경우, 연금계좌는 근로자의 명의로 개설되고, 적립금을 운용하는 주체도 근로자다. 하지만, 퇴직연금 상품을 선택하고 가입 절차를 진행하는 주체는 회사다. 즉, 회사에서 퇴직연금 가입에 필요한 서류를 금융 회사에 보내고 관련 절차를 밟는다. 이 과정에서 근로자는 배제된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가입 여부와 퇴직연금 상품 등에 대한 선택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현실이 제도적으로 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퇴직연금 가입에 있어서, 근로자의 '개별' 동의는 필수 요건이 아니다. 근로자가 입사한 회사에서, 모든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을 때, 입사한 근로자가 동의하지 않아도, 회사는 입사한 근로자를 퇴직연금에 가입시킬 수 있다.
아주 흔한 상담 사례를 살펴보자. 근로자 A는 퇴사를 앞두고 상담을 요청했다. 회사가 어려운지 월급이 자꾸 밀리고, 퇴사하는 직원이 많아져서 그들의 업무까지 떠안는 상황에서, 곧 퇴사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나는 먼저 어떤 종류의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는지를 물었다. 근로자 A는 애매하게 답했다. 퇴직연금에 가입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를 통해 퇴직연금 가입 여부를 정확히 확인하고, 가입되어 있다면 계좌 적립금을 확인한 뒤에 다시 상담하자고 하였다.
며칠 후에 근로자 A는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노무사 님, 제가 입사할 때 DC형 퇴직연금에 가입되었는데, 회사에서는 입사 후에 3달 정도 부담금을 계좌에 납입했고, 그 후에는 납입한 내역이 없습니다. 제가 3년 8개월을 근무했는데, 퇴사를 앞두고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나는 종종 입사할 때부터 퇴사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퇴직연금 문제도 이에 해당한다. 입사할 때, 퇴직연금 가입 여부를 꼭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 사례의 근로자 A처럼, 퇴사 직전에서야 퇴직연금에 가입한 사실을 알게 되고, 퇴직연금에 적립금이 제대로 쌓여 있지 않은 현실과 맞닥뜨릴 수 있다.
특히, DC형 퇴직연금은 적립금의 운용 주체가 근로자이므로, 가입 직후부터 적립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수익을 내야 한다. 근로자 A는 퇴사 직전에야 가입 사실을 알았으므로, 당연히 적립금을 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익은커녕 원금도 제대로 적립되지 않은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면 근로자 A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밀린 퇴직연금 부담금과 지연이자 납입을 회사에 요구해야 한다. 납입이 완료되면 자신의 IRP계좌로 적립금을 옮기는 방식으로 수령하면 된다. 만약, 회사에서 제대로 납입하지 않으면, 노동청에 임금체불로 신고하여 다툴 수 있다.
그런데 회사에 납입을 요구하거나 임금체불로 다툴 때, 미리 자신이 받아야 할 퇴직연금 적립금을 계산해 두어야 한다. 노동 상담을 통해 도움을 받아서라도 스스로 계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DB형 퇴직연금은, 기존의 법정 퇴직금처럼, 일정 금액이 보장되므로 입사 때부터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DC형 퇴직연금은 다르다. 입사 때부터 확인하고 적립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제는 DC형 퇴직연금에 가입된 근로자가 무척 많은데도, 근로자는 가입 사실조차 모르거나, 기존의 퇴직금처럼 인식하고 신경 쓰지 않는 사례가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다음 편에서는 DC형 퇴직연금 부담금을 산정하는 사례를 다루어 보려 한다. 근로자가 스스로 부담금을 산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똑똑하고 야무지게 퇴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