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와 카르페 디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말이 있다.
바로 '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단순히 현재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으라는 의미를 넘어, 인간은 언제나 죽는 존재라는 것을 계속해서 깨우치는 다소 무섭게 느껴지는 말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보니, 또 다르게 느껴지는 이 영화의 장면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영화에서는 종소리에 맞춰 다같이 날라가는 새의 모습을 자주 등장시킨다.
마치 획일화된 인간은 새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말이다.
우리가 삶의 주체성을 갖지 않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 세상이 보여주는 것만을 보고 살아갈 때, 우리의 인간성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말이다.
새는 하늘을 멀리멀리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를 갖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새들은, 그리고 우리는, 왜 멀리멀리 날아오르지 않고 있는가?
대사 한마디 나오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기도 하였다.
쏘로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산다'고 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쏘로우씨는 매우 똑똑한 사람인가보다. 우리는 대부분 해야할 일과 스트레스에 쌓여 절망적으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근데 왜 그래야 하는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났고 한 번의 인생을 사는데, '인생은 원래 절망적이니까'라며 절망적이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키팅 선생님은, 그렇게 물러나지 말라고 조언한다.
한국에서 정상적인(사실은 비정상적이지만 한국 내에서는 정상적이라고 통용되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정을 겪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국어 시간에 우리는 늘 '저자의 생각'을 찾는 연습을 했다.
이 시의 저자는 이 문구를 무슨 의미로 썼니? 무슨 수사학적 구조를 썼니?
그 누구도, 나에게 그 시에 대한 나의 감상을 물어본 적이 없다.
물론 저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읽고 있는 나의 생각도 그 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는 주체적으로 나의 생각을 하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나 또한 그러했다. 삶의 유지하는데 필요한 의학, 법률, 경제, 기술과 같은 수단 그 자체를 갈망하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사치스러운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러한 인생은 꽤나 건조하고 퍽퍽하다. 조금의 충격으로도 쉽게 바스라진다.
삶의 목적과 삶의 수단을 구분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이 구분되고, 아름다운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내 인생도 물기 가득하여 곧 꽃이 필 수 있지 않을까.
키팅 선생님은 아이들을 교정에 모아두고 구호에 맞춰 걷도록 한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구호가 울려퍼지자 같은 발, 같은 손, 같은 길로 걸어간다. 마치 새들처럼.
우리는 획일화되면 그 때부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흐려진다.
이 길이 맞는지, 이 움직임이 맞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그냥 생각할 필요 없이 따라가는 것이다.
키팅 선생님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바보 같은 일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생각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신만의 발걸음으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인생을 가르친다.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우리는 내가 아는 그 면만 보고 무언가를 속단하고, 그 생각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도, 내 인생도, 내 주변의 모든 것들도 다른 각도에서 보이게 된다.
우리는 내 시야 안의 세상만 바라보는 편협한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고 의식적으로 교탁 위에 올라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낭만과 참교육을 잃은 우리 사회에 여러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