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 주는 안정감이 좋다. '어.'는 친밀한 관계에서 가능하기에 나도 드러나는 것이라 솔직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나마 '어?'로 끝나는 말은 감정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아서 낫다. ‘그래?‘는 서로를 환기시켜서 시원하고, ’응.’은 명료한 전달이라서 편안하다. 그날 ’야!‘가 어떻게든 시작이었다.
테이블석이 8개이고, 2인석이 두 개인 술집에서 오늘도 시작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는 0458 여자는 다찌석이라고 하는데 테이블석이요?라고 응답하는 나도 참 답 없다. 몇 년 전에 먹어본 8킬로그램짜리 문어숙회가 원인이었다. 머릿속에서 착착착 진행되었다. 작은 술집, 2차나 3차에 오는 술집, 종업원 없는 1인 술집, 조리가 쉽지만 차별성이 있는 안주를 파는 술집, 바로 1년 6개월 만에 빚 방석에 앉게 한 이 술집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공수래공수거요, 내가 망하면 누군가는 살아나는 것 아니겠냐고 호기롭게 말했는데 현실은 고통과 슬픔으로 답을 해줬다. 처음엔 문어숙회와 어묵꼬치 두 개 메뉴로만 하겠다고 고집하다가 6개월이 지나서 마른오징어와 견과류, 멍게, 낙지 숙회를 추가했고, 지금은 육전, 해물라면과 홍합탕, 곱창김 김밥까지 하게 되었다. 솔직히 곱창김 김밥은 어느 음식 블로거가 운영하는 소금 김밥을 그대로 쓰기는 좀 그래서 들기름과 참깨를 듬뿍 넣은 뜨거운 밥에 곱창김을 둘러서 내놓고 있다. 중간에 알바도 잠깐 썼는데 인복이 없는지 다 폭망이었다. 알바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힘든 말 못 하는 내 탓일 것이다. 그래도 단골도 생기고, 안주 칭찬하는 말을 듣는 재미로 식당에 오는 맛은 생겼다. 생물 택배를 받아서 하기에 저녁 6시에 식당에 와서 8시에 문을 연다. 식당에 작아서 예약하는 분들로 빨리 채워지고 워크인은 10시가 넘어야 되는데 잘 될 때는 12시까지도 워크인이 안될 때도 있다. 장사는 잘되지만 돈은 안 되는 악순환의 현장이다. 그렇다고 여길 떠나서 다른 일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대화, 웃음소리, 은밀한 이야기, 가끔 있는 싸움이 나를 붙잡는다.
그날은 10시가 되니 한산해졌다. 2인석에 남녀가 있었고, 테이블석에 남자 둘이었다. 안주는 이미 나가서 한숨 돌리고 있었다.
“야. 집착과 중독의 차이를 아냐?”
테이블석에 앉은 남자 중 하나의 말이었다. 8시에 들어올 때부터 거나하게 취해있었고, 셋이서 왔다가 좀 전에 한 명은 가서 두 명이었다. 다행히 서로 들리기는 하지만 불편할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었다. 여자의 조곤조곤한 일상이야기를 남자가 적절히 호응해 주는 남녀 둘은 이 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새끼, 많이 취했네. 야 아니고 형이야. “
”아. 형. 집착과 중독의 차이를 알아요? “
”난 모르니 자 짠. 그래도 함 들어보자. 이야기해 봐. “
“이 소주로 이야기해볼게요. 내가 이렇게 취해서 형한테 야라고 하고 있어. 근데 형은 이제 집에 가고 싶어. 그래도 내가 소주 한 병만 더 시키자는 거야. 당연히 형은 야 그만 가자라고 해. 내가 우기는 거지. 딱 한 병만 더 하고 가자고. 형은 말리고. 그게 집착이야. 그럼 중독은 뭐냐. 나 혼자 술집에 가서 내 한계치인 소주 두 병을 마시고도 한 병을 더 시키면 그게 중독이라는 거지.”
“뭔 뻘소리야. 술이나 마셔.”
술을 마시면 다들 자기만 안다는 말들을 한다. 술집 사장의 힘든 점 중에 하나가 저런 소리를 필터링 없이 듣게 된다는 것이다.
“사장님 여기 한 병 더요.”
“야, 됐어. 사장님 아니요.”
“딱 반 명만 마시고 가자. 사장님 주세요.”
“네, 사장님 주세요. 진짜 반 병이다.”
가게 앞에 담배를 피우는 손님이 문제다. 손님만 피는 게 아닌데 민원신고는 그것과 상관없이 들어온다. 상가주택에 있는 가게라서 더 신경 쓰인다. 가게 앞에서 피지 말라고 팻말을 붙였는데 소용없다. 또 한 분이 피고 있어서 밖으로 나간다.
“저기요, 여기 사시는 분들이 담배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됩니다.”
“왜요?”
“아니, 여기 가게 사장인데요. 여기서 담배 피시는 분들 때문에 민원이 제게 들어옵니다.”
“그럼 어디서 피워요?”
“거기까지 제가 결정해 드릴 수는 없는데요. 일단 저 건너편에서 피시는 게..”
“아.. 네.. 씨발. 좆같네. 담배도 내 맘대로 못 피고. 아무튼 알겠어요. 이것만 피고 갈게요.”
1초, 2초, 3초 아니다. 참자. 표정으로 감정이 올라오면 일이 생긴다. 지난번에도 비슷했다. 반복하지 말자. 경찰서에 가는 일은 만만치 않다. 경찰서에 안 가더라도 저 사람은 내가 이 가게에 있는 것을 안다. 해코지할 수 있는 일은 한 둘이 아니다.
“네. 고맙습니다.”
웃어야지. 웃어야지. 저 사람도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파서 술을 마신 것이고 아파서 지금은 아프지 않고 싶은 것이다. 덜 아픈 내가 웃어야지. 문을 닫고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커플의 여자 손님이 맥주 한 병 더 달라고 해서 다시 애써 미소의 가면으로 바꿔 끼웠다. 맥주를 드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말하고 화장실로 갔다. 영업 중에 내 휴식 시간은 화장실이다. 화장실 뒤편에 있는 의자에서 불빛을 벗어나 저 불빛의 사람 소리를 멀리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게 나를 잠깐씩 지켜 준다. 덜 아파도 나도 아프니까. 밤공기의 냄새도 맡고, 까만 하늘도 본다. 운이 좋으면 어두운 밤하늘에서 하얀 구름을 볼 때도 있다. 어릴 때 기억도 하고 옛 여자들도 생각한다. 좋았던 그때 구름처럼 떠 있다가 유유히 떠내려갔다. 가게 처음 할 때는 손님들과도 술을 많이 마시다가 천천히 줄이고 안 마신 지 네 달이 되었다. 마음이 힘들 땐 이렇게 잠시 쉬면 나아졌다. 가게로 들어가니 손님 한 분이 테이블석에 앉아 있었다. 문어숙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기본 안주로 들기름 숙주볶음과 통영산 마른 멸치를 드리고 소주를 드리고 냉장고에서 문어를 꺼냈다. 오늘 문어는 7킬로그램이다. 피문어는 명절 근처에 엄청 오르고 해마다 조금씩 올라서 그나마 오름세가 안정적인 돌문어로 바꿀까도 생각 중이다. 어차피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 대부분이 2차나 3차이고 문어 맛을 구별할 사람도 별로 없고 특히 고급스러운 집이 아니라 다 이해할 것 같다.
“이 놈. 허튼소리가 아니었네. 야. 오늘 뒤통수를 딱 얻어맞은 느낌이다. 얼얼하네. 진짜 네가 생각한 게 맞지? 들은 것도 아니고, 읽은 것도 아니고.”
“형님이 술값 내. 나도 공들여 생각한 거야.”
“당연하지. 내가 내야지. 내가 너를 너무 무시했는데.”
“그니까. 날 너무 무시했어. 흐흐흐. 갑시다.”
“사장님. 여기 계산이요.”
두 사람이 나가고 썰던 문어를 계속 썰어서 테이블석 남자분께 드렸다. 커플은 술이 조금 올라왔는지 소리도 몸짓도 웃음소리도 커졌다.
“사장님. 좀 전에 저 쪽에 앉은 분들 여기 단골인가요?”
“단골까지는 아니고 두어 번 오신 것 같아요. 왜 그러시죠?”
“사장님 없을 때 그분들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는데 말씀이 상당해서요.”
“어떤 부분이?”
“제가 웬만하면 말할 수 있는데. 아니, 보통 워딩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대략적인 내용을 말할 수 있는 정도는 되거든요. 근데 머리를 탁 치는데 제가 말할 수 없는 말이었어요. 알겠는데 모르겠다는 그런 상황이에요. 아, 미안합니다.”
“네. 괜찮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지난달에 한 번 온 것 같고, 그전에 한 번 온 것 같다. 혼자는 아니고 두세 명이서 왔던 것 같다. 외모는 평범한데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커서 혹시 다른 분들에게 피해될까 봐 주의를 줘야 할까 했던 사람이라서 기억이 난다.
“사장님. 오늘 문어 좋네요.”
“네. 고맙습니다.”
“부모님 고향이 안동입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먹어봐서 제가 문어 맛을 조금 압니다. 이렇게 단맛 나면서 부드러운 듯 쫄깃한 문어 먹기 힘든데. 이 가격에 참.. 고맙습니다.”
“제가 고맙죠.”
“두께도 딱 맛있는 사이즈고. 돌문어는 씹는 맛은 얼추 비슷해도 이 단맛이 안나잖아요.”
“아이쿠, 잘 아시네요.”
“사장님 술 좀 하세요?”
“예전엔 좀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하하.”
“제가 술도 좋아하고 방랑벽도 있어서요.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지역마다 재밌는 술집들이 있더라고요.”
“아. 네. 잠시만요. 미안합니다. 전화할 곳이 있어서요. 미안합니다.”
“아뇨 아뇨 아뇨. 하세요. 하세요. 제가 미안하지요.”
가게 앞으로 나와서 휴대전화를 주머니에서 뺐다. 누르는 척을 하고 전화를 하는 척을 했다. 이래야 한다. 지금이 12시. 저 손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오는 분. 술 다 마시고 집에 가기 전 마지막에 들르는 것 같다. 삼대 후반에 공무원이고 결혼한 지 5년쯤 되었고 아이가 세 살 쯤이다. 부인과 사이도 좋다. 그런데 헛헛한가 보다. 저번에 저렇게 말을 시작하더니 끝도 없이 떠들고 끝도 없이 술과 안주를 시켰다. 보통 2시에 마감을 하는데 그날은 3시에 겨우 보냈다. 나야 그래도 괜찮다. 근데 50을 넘게 살아보니 조금은 안다. 집에 보내는 게 낫다. 나에게 말하지 말고 헛헛함을 자신의 사랑에게 말해야 그다음 길이 열린다. 열리지 않는 길은 반복의 염증일 뿐이다. 술 취해서 부인에게 말하면 혼나겠지. 자신의 멋있음도 사라지겠지. 약함이 들통나 버리겠지. 그래도 낫다. 혼나고 들통난 후 선택이 이어진다. 관계가 끝나거나 다시 시작하거나 새로운 길이 열린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 가게로 들어가니 커플이 껴앉고 있다.
“싸자앙님. 이여어기 계싼이용.”
카드를 받고 계산을 하고 돌려드리니
“싸장님. 너어무 잘생겼다. 그치 오빠앙.”
”응. 맞아. “
여자분은 많이 취했고 남자분은 안 취했다. 커플이 나가고 탁자 정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소주도 절반 문어도 절반 남았다.
”저 지난주에 이혼했습니다. 두 달 동안 술을 안 마셨어요. “
내 기억은 어디부터 진짜이고 어디부터 가짜일까.
”첫째 아이는 제가 키우기로 했고 둘째는 아내가 키우기로 했어요. “
내가 기억한 그는 누구인가.
”네. 사장님 예상 맞아요. 맨날 저랑 같이 오는 그 분과 합치기로 했어요. “
하나는 맞췄다. 그는 헛헛했다. 분명 남자들과만 왔던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오늘은 저를 위한 축하주입니다. 야근하면서 뭘 먹을까 생각해 보니 이 집이 가장 먼저 생각나더라고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변호사이면서도 제 이혼과정은 너무 힘들었거든요. “
정말 그는 누구일까.
”나이 오십에 사랑이 찾아오다니. 참 제게도 이런 꿈같은 일이 있네요. “
나는 누구일까.
”내일은 하루 쉬려고요. 2시까지죠? “
”네. 맞습니다. “
0458 여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밤 12시에 매주 화요일 꼬박꼬박 예약하고 오는 손님이다. 또 언제나 그렇듯 테이블 왼쪽 끝에 앉으면서 여기 다찌석에 앉아도 되나요 하며 조심스레 물어보기에 상냥한 눈웃음으로 가능하다고 끄덕였다.
“안주 하나 더 할게요. 추천해주세요.”
“육전 해드릴까요?”
“육전 좋죠. 가격은 그대로 받으시고 양은 절반만 주세요.”
“여기요.”
“네. 뭐 드릴까요?”
“오늘은 술만 마셔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0458에게 술과 기본 안주를 내고, 육전을 준비했다. 원물 쇠고기를 사서 저민 후 핏물을 닦고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 후 냉장고에 넣어 둔 육전용 고기를 빼서 튀김가루와 찹쌀가루를 섞은 것에 묻히고 달걀 푼 것에 둘러서 프라이팬에 약불로 구웠다. 핏기가 없어야 하고, 너무 많이 익어도 문제다. 음식을 만들 때 그나마 낫다.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손님들도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알아서 술도 가져가고 잔도 가져간다. 음식을 만들다가 계산을 하는 게 귀찮아서 포스기를 입구에 두고 각자 계산하게끔 할까 하다가 빚에서 기인한 의심이 막았다. 사실 술집 시작할 때 안주 가격도 책정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마시고 먹고 자신의 기분만큼 계산하고 나가게 할 거라고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었던 적이 있다. 조금 나아지면 해야지 하다가 하다가 하다가 술병 숨기는 사람 없나 의심하는 지금이 되었다.
“사장님. 미안한데 육전 포장해 주시겠어요? 오늘 술은 여기까지만 마셔야겠어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마음이 급하네요. 하하..”
“네. 물론입니다. 금방 해드릴게요. 남은 문어도 포장할까요?”
“아닙니다. 이건 다 먹고 갈게요. 소주 한 잔에 문어 세 점. 제가 호강합니다. 하하하.”
술집이라서 포장은 첨부터 하지 않으려 했는데 누군가 포장을 부탁했다. 당연히 포장용기가 없어서 힘들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표정이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킬 것은 없어졌다. 손님들의 요구에 나를 맞췄다. 옳은 것이란 없고 손님의 만족감을 정의로 삼기로 했다. 그게 편했다. 가게 매상과 관련 없이 아니 아예 관련 없지는 않지만 손님들과 불편하게 헤어지기 싫었다.
“사장님. 다음엔 새 집사람과 같이 올게요. 잘 먹고 갑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반찬 좀 더 드릴까요?”
0458은 답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1시 34분. 휴대전화도 보지 않고 고개도 숙이지 않고 있다. 멍하니 앞만 보고 있다. 가끔씩 소주를 홀짝였다.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적막이 힘들다. 말을 걸 수도 없다. 화장실로 또 피하기로 했다. 밖은 이제 조용해졌다. 저기 멀리서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담배 생각이 난 적도 있었다. 중독은 어떻게든 남는다. 음식을 하는 사람에게 나는 담배 냄새는 서로 민망하다. 새벽 냄새를 맡는 것으로 정했었다. 장막을 뚫고 들어오는 시원한 새벽 냄새가 한 번씩 있다. 시원하다는 말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거나 차가 많이 돌아다니거나 생명체들이 많이 돌아다니면 만들어지는 냄새들로 맡지 않기로 해버리며 살다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는 것이 새벽 냄새다. 새벽에도 돌아다니는 것은 많기에 정말 어쩌다 어쩌다 한 번씩만 맡아볼 수가 없다. 오늘은 그 냄새가 아니다.
가게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하다. 술을 꺼내왔는지 두 병째이다.
“저기.”
“네. 뭐 드릴까요?”
“호칭을 뭐로 하는 게 좋아요?”
“네?”
“저는 사장님이란 말 싫어해서요. 아저씨라고 하는 건 실례인 것 같고요. 그래도 제가 이 집에 자주 왔잖아요. 호칭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맞다. 호칭을 하지 않고 주문을 했었다. 고맙습니다 할 때도 호칭은 하지 않았다.
“꼭 호칭을 해야 할까요?”
“네. 하고 싶어서요. 대부분 호칭이 정해져 있잖아요. 서로 합의한 게 아니라 정해져 있잖아요. 호칭을 합의하고 싶어요.”
“아. 그렇군요. 저도 이름은 밝히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제가 커뮤니티에서 쓰는 닉네임도 좀 그렇고요. 뭐가 좋을까요.”
“미안해요. 평생 정해진 것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모님도 친구도 회사도 애인도. 여기는 정해진 것을 하지 않아도 봐줄 것 같아서요. 지금도 저도 모르게 사장님이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요. 빨리요. 저는 도전하는 것에 익숙하진 않은데 이곳에선 용기가 나요.”
“저도 익숙한 상황은 아니네요.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보죠. 생각할 시간 좀 주세요.”
“갑자기 배고파졌어요. 안주 추천해 주세요.”
“새우완자전 어떠신가요?”
“네. 주세요.”
껍질을 벗긴 새우의 내장을 빼고, 다진 후 소금과 맛술, 후추에 재워 냉장고에 둔 것을 꺼내어서 감자 전분과 밀가루, 달걀을 섞고, 당근, 쪽파, 부추, 청양고추, 홍고추와 버무려 마지막에 소금으로 다시 간을 한 다음 프라이팬에 약불로 구웠다. 먼저 생각난 건 닉네임이었다. 닉네임에서 뒤를 떼볼까 살짝 파생시켜 볼까 닉네임들의 앞과 뒤롤 떼서 붙여볼까 다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성을 부르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미스터 무엇이라니 오글거린다.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방식인 전화번호 뒷자리도 아닌 것 같다. 하정우가 나오는 영화 4885 범죄자 같다. 끝에 무엇 무엇님으로 하는 것도 이상하다. 채소나 과일 이름을 떠올리며 진저리도 쳤다. 비로소, 슬며시, 살짝, 비스듬히를 떠올리다가 생각이 났다.
“여기 드릴게요.”
“맛있겠네요. 고맙습니다.”
“혹시 과거 어떻습니까?”
“네?”
“좀 전에 말한 호칭을 과거로 하는 거 어때요? 보통 이름에 미래나 현재가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과거는 없잖아요. 또 술집은 과거를 회상을 많이 하니까요.”
“근데 입에 달라붙지 않아요. 더 노력해 보세요.”
“네. 어렵네요. 으흐.”
의미 중심이었다. 내용 중심으로 살았다. 형식이 먼저가 될 때도 있는 것인데 고집했다. 가치에 집착했다. 의미 없는 말이 먼저 나가야 진정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말의 저의를 살피려고 몇 발자국 서성이다가 말을 할 때는 상대가 또는 사람들이 나를 규정한 이후였다. 습관의 집착은 내게도 여전했다.
“그래도 고마워요. 바라지 않고 대해준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말하기 전에 묻지 않아서 이 집이 좋기도 하고요. 웃는 게 말 걸어주는 게 친절이라고 해서 저는 친절이라는 말을 싫어하기로 했거든요. 근데 친절의 의미가 넓다는 것을 이 집에서 알게 되어서 다시 좋아하기로 했어요.”
“네. 고맙습니다.”
“그것도 좋아요. 고맙습니다만 하고 부연하지 않아서요. 아참, 착각하지 말아요. 무슨 의미인지 알죠? 흐흐.”
“네.”
“우리 집보다 이 집이 편해요. 다들 그렇듯 저도 잘 견디거든요. 스스로 규칙도 잘 만들고요. 이 집에 오기 전까지만 그러기로 했어요. 제가 금요일마다 이 집에 오기로 스스로 정했거든요. 그것도 12시에. 신데렐라는 12시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전 그게 싫었어요. 그래서 12시에 이 집에 오기로 정했어요. 이 집에 올 때마다 정해진 것을 따라야 했던 상처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요. 오기 전까지는 기대감에 여기 왔을 때는 기쁨에 오고 간 다음에는 좋았던 잔물결들의 감정으로 일주일이 힘들지 않게 지나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이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그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웠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이 집이 좋은 것이었어요. 오해할까 봐요. 불쾌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게 결국 낫더라고요. 살아오면서 이렇게 괜찮은 날들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해외여행을 갔을 때도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어서 인지 몰라도 솜사탕처럼 느껴졌거든요. 아무튼 고마워요.”
“네.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저희 가게를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사실 저도 요즘에 고민이 많았는데 힘이 되네요. 단골 서비스로 문어 좀 드릴까요 라는 말까지 하려고 했었다. 0458이 원하는 건 부연하지 않는 것이니 따르기로 했다.
“행복이라는 감정을 잘 몰랐거든요. 이제 좋은 것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가게에 오면 행복해요. 왜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계속 생각해 봤거든요. 그래서 다른 집들도 많이 가봤어요. 그 집에서는 행복을 느낄 수 없었어요. 친구들에게 이 집을 혼자 가보라고 했어요. 다들 별로라고 하더라고요. 친구들과 혹시 겹칠까 봐 금요일 이 시간에 오는 것도 있어요. 정확히는 토요일이군요. 이유를 몰라서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근데요. 저 이제 그만 오려고요.”
계속 벽을 보며 듣고 있었다. 상대를 보면서 들으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들린다. 눈빛 표정 눈썹 떨림 가벼운 턱짓 호흡 입술의 움직임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서 목소리가 겹치기에 벽을 보면서 듣는 습관이 생겼다. 술집 주인이라서 가능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서 0458을 봤다. 얼굴을 제대로 본 게 처음이었다. 0458은 어둡고 움츠리고 무기력하며 눈동자가 텅 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고 작았고 느렸었다. 그랬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저 한 잔 만 따라주실래요? 마지막이니까요.”
저렇게 투명하고 맑은 눈인 줄 몰랐다. 검은 눈동자가 진했다. 진하며 밝았다. 긴 머리인 줄 알았는데 단발이었고, 안경도 쓰고 있었다.
“네? 부탁할게요. 한 잔 만요.”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 중반 사이일 것 같았다.
“싫으실 수 있는데요. 부탁하면 안 될까요?”
내일은 굴림만두를 준비하려고 한다. 두부를 넣을까 넣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알겠어요. 싫으시다면. 이 잔 받고 왜 오지 않으려고 말하려 했는데.”
두부를 데워서 물을 빼고 뭉그러뜨리기는 귀찮은 일이다. 또 퍽퍽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부탁할게요. 한 잔 만 따라주세요.”
돼지고기와 부추, 달걀로만 하는 게 좋겠다. 양념은 간장, 굴소스, 후추, 생강가루, 소금이면 될 것 같다.
“네. 포기할게요. 전 잘 견디니까요.”
0458은 마지막 잔을 따르고 한 번에 마셨다. 욕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한 잔을 마시니 눈빛이 더 맑아졌다.
“제가 앞으로 오지 않으려는 이유는요. 평생 여기에 갇힐 것 같아서예요. 이 집이 정말 좋은데 이 집에 오면 행복한데 저는 평생 금요일 밤에 이 집을 오는 행복을 위해 하기 싫은 것들을 다 견디며 살 것 같아서예요. 이제 싫은 거 안 하고 살 거예요. 피하지도 않을 거예요. 한 번에는 못하겠죠. 그래도 전 할 거예요. 이 집은 정말 그리울 거예요. 오고 싶을 거예요. 그래도 오지 않을 겁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고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돈은 여기 둘게요. 안녕히 계세요.”
5만 원 한 장을 내려놓고 휙 몸을 돌려서 급하게 문을 열고 나갔다. 마지막이라고 하고 고맙다고 하니까 술 한 잔 따라 주고 싶었다. 술값은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얼굴을 보면서 말을 듣다 보니까 다른 생각이 났다. 이 집이 좋다고 하니까 그 말에 구름 위로 올라가 버렸다. 구름에서 몸을 뉘우고 있었다.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바닥 청소와 테이블 청소를 하고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 점검과 확인을 했다. 쓰레기를 보아 쓰레기봉투에 담고 음식물쓰레기봉투를 들고 밖에 나가서 버리고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전등을 끄고 가게문을 잠갔다. 새벽 3시. 잠깐 새벽 공기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