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공주와 인생

by 지구별여행자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한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읽다 보니 뒷골이 뻐근하고 목이 칼칼하여 바람이나 쐴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려 정수기 쪽으로 가는데 유치원쯤 되어 보이는 딸과 엄마가 90년대 유행했을 법한 어르신용 둥근 테이블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분홍색 공주풍으로 깔맞춤 한 아이의 드레스 옷이 도서관 분위기와는 맞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밝은 기운을 주는 것 같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


엄마는 반쯤 비껴 앉아 책을 읽는 틈틈이 아이에게 눈길을 보내고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표정으로 연필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정수기 물을 한잔 거나하게 마시고 한잔 더 따르는 척하면서 흘깃 쳐다보니 3+5= 따위의 덧셈 문제였다. 순간 아이의 진지한 표정이 너무나 귀엽게 느껴져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엄마가 나를 신경 쓰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웬 수염 덥수룩한 더벅머리 아저씨가 딸아이를 쳐다보고는 피식 웃는 걸 봤다면 모르긴 몰라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아이가 다리를 달달 떨면서도 문제풀이에 진척이 없자 엄마는 읽던 책을 옆에 두고 수학 문제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입으로 연필을 깨물어가며 고민하던 아이는 답을 알겠다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박수를 치더니 문제를 쓱쓱 풀어갔다.


이들 모녀(어쩌면 모녀가 아닐지도...)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진즉에 했어야 할 숙제를 하지 않은 벌로 놀이동산에 다녀왔다가 도서관으로 직행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를 따라 도서관에 온 김에 숙제를 하고 있는지도. 도서관에 가는데 공주옷을 입고 가야 한다고 떼를 쓰다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다 눈물을 쏟았는지도 모른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물을 마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많은 생각이 스쳤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길잡이가 되어주는 부모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인 부모의 마음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교육자인 제삼자의 내가 볼 때는 인생의 고비마다 옆에서 마음을 다독이고 길을 비춰주는 부모의 도움이 있다면 그 길을 헤쳐가는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안도감이 들고 든든할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런 길잡이의 부재가 늘 그늘로 느껴졌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 더욱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어른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런 어른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고 꿈이 되었다. 작지만 그런 순간을 마주하니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생은 저렇듯 한 자리의 덧셈을 배우는 것처럼 지나고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 고비의 순간에는 왜 그렇게 어렵고 고민되고 힘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알고 나면 별 거 아닌데, 겪고 나면 쉬운 일인데. 가지 않은 길 앞에 서 있다는 건,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런 두려움과 싸우고 견뎌낸 경험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어떤 고비쯤을 넘고 있을까. 이 고비를 넘고 나면 나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

도서관을 환하게 빛내는 핑크 공주덕에 인생을 생각해 본다. 오늘은 아내랑 맥주라도 한잔 하면서 진지한 얘기를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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