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키 작은 벚꽃 이야기

by 지구별여행자

아내가 오랜만에 차려준 근사한 생일상을 얻어먹고 소화도 시킬 겸 집 근처 안양천이나 걸을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채비를 하고 문을 여는데 쿵작 쿵작 노랫소리가 들린다. 베란다 창문으로 슬쩍 엿보니 평소에는 한산한 구청 앞이 사람으로 가득하다. 도로 위에는 자동차 대신 천막들이 빽빽하게 늘어섰고 맛있는 냄새가 연기를 타고 집 안까지 들이쳤다. 분명 벚꽃 축제는 다음 주라고 본 것 같은데 때 이른 봄 더위에 벚꽃이 예정보다 일찍 만개했나 보다. 하긴 인간이 정해놓은 축제날에 맞추느라 오늘 피어야 할 꽃이 내일 필 리 만무하다. 계획을 변경하여 단단히 나들이 채비를 하고 다시 집을 나섰다. 닭 꼬치 두 개를 사이좋게 나눠 들고 들뜬 마음으로 안양천 벚꽃 길에 들어서니 벚꽃 잎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온통 거리를 메우고 있다, 벤치는 이미 젊은 연인들에게 점령당한 지 오래고 사진 한 장 찍으려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할 정도다. 게다가 날씨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해가 쨍하다가도 금방 추워지고 바람이 한 번 훑고 지나가면 꽃잎이 비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다가 기분만 망친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구청 앞을 다시 지나는데 이번에는 비까지 내린다. 비를 손으로 가방으로 피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올해 벚꽃 축제의 성패를 알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기침이 나기 시작한다.


봄 감기를 선물로 안긴 벚꽃 축제가 끝나고 보름쯤 지났을 까. 운동 좀 하라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자전거를 끌고 안양천으로 향했다. 화려했던 벚꽃은 어느새 푸른 새싹에 자리를 양보하고 사람은 눈에 띄게 줄었다. 한 시간 남짓 땀을 흘리고 집으로 향하는 데 어디선가 진한 벚꽃 향이 코 끝을 스친다.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둘러보니 안양천 자전거길 입구 구석에 키 작은 벚꽃나무 한 그루가 소박하게 만개했다. 다른 벚꽃나무의 절반도 안 되는 키에 건물 바로 옆 구석 음지에 자리 잡고 있어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구부러진 줄기가 제법 멋스럽고 단단해 보였다. 무엇보다 수 천 그루 키 큰 벚꽃 나무 못지않게 진하면서도 묘하게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설거지하는 아내를 불러내 지난주의 아쉬움을 달랬다.


키 작은 벚꽃나무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키 큰 나무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며 자랑할 때에도 조용히 더 낮게 웅크리고 차곡차곡 향기를 쌓았을 것이다. 지나가는 누구 하나 눈 길 주지 않아도 묵묵히 나만의 봄을 준비했을 것이다. 뒤늦은 벚꽃나무 덕에 나의 안양천은 아직 봄이다.


가끔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먼저 피지 못해 안달인 모습을 볼 때마다 아쉬움에 혀만 끌끌 차곤 했다. 남보다 먼저 어른이 되려고 화장을 하고 남보다 먼저 알기 위해서 학원을 대 여섯 개씩 다닌다. 그 아이들에게 오늘은 안양천의 그 키 작은 벚꽃 나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늦게 피었지만 그 어느 꽃보다 진한 봄을 나에게 선물해 준 그 키 작은 벚꽃나무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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