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말'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니

- 영화평 03 <컨택트> : 언어에 있어서 '시간'의 문제

by 보이는 말들

우선, 영화는 ‘시작’과 ‘끝’보다 그 ‘중간’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주지만, 나는 영화가 시작되고 끝날 때 떠오르는 영어 제목 ‘arrival(도착)’과 한글 자막으로 깔리는 ‘컨택트(contact)’사이의 엇갈림이 영 거슬렸다. ‘테드 창’이라는 걸출한 SF 소설가를 이 영화를 통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원작의 제목은 또 다르다. ‘네 인생의 이야기’, 즉 ‘Stories of Your Life and Others’, 이 얼마나 단순한 제목인가. 주인공 루이스의 딸 이름이 ‘한나(Hannah)’였다. 엄마가 그 딸을 부르는 관점에서 ‘너(you)’일 것이다. 시작과 끝이 똑같은 이름, 이 딸의 탄생과 죽음까지 모든 게 엄마에게는 동일한 시간에 놓여 있었을 테다. 이렇게 ‘시간’의 문제와 관련한 언어의 영역을 단순하게는 ‘시제(tense)’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영화를 보면 오히려 ‘상(aspect)’의 측면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어는 ‘시제’야 있지만 엄밀한 개념으로서 ‘상(相)’은 없다고 말할 때, 시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선적인 시간의 순서, 즉 말하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지닌 보편성에 근거하여, 한국어도 과거-현재-미래 정도의 시제는 지녔다. 그러나 그 시간의 양상이 ‘완료’냐 ‘진행’이냐 ‘예정’이냐 따지면, 앞서 언급한 시제를 조금 더 강조한다 밖에는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 상의 개념을 따지면 ‘사건이 특정한 시간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확장하는지’로 변별된다. ‘했다’를 ‘했었다’로, ‘한다’를 ‘하고 있다’로, ‘할 것이다’를 ‘하려고 한다’로 고치는 정도만 중등학교에서 다루는 듯하다.



중등학교 국어선생 입장에서 솔직히 이게 뭔가 싶을 때가 있다. 이럴려고(물론 ‘이러려고’가 맞춤법에 맞지만, 박근혜 탄핵 이후로 이 표현이 더 와닿는다) 대학에서 어문학을 전공했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 말이다. 한국어에서 ‘과거+완료’만 있을 뿐 현재/미래+완료가 있는지 모르겠고, ‘현재+진행’만 있을 뿐 과거/미래+진행이 있는지 모르겠으며, ‘미래+예정’만 있을 뿐 과거/현재+예정은 과연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영화와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와 그들의 세계관, 그리고 그 언어를 최초로 습득한 인간이며 지구를 구한 불세출의 언어학자 루이스의 사유를 무엇으로 표현할지 말이다. 대중 영화를 표방했기 때문에 더 깊게 들어갈 순 없으니, 그저 시간과 언어의 세계가 ‘직선적’이지 않다 정도로만 설명하고 있다.

그럼, 인류와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사유의 세계관을 ‘원형적’ 혹은 ‘순환적’이라고 표현해도 될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가 더 이상 말해주지를 않는다. 다만, 분명한 메시지는 한 인간이 어느 시점부터 자기 인생의 이야기, 즉 자신과 관계를 맺는 다른 무수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그 ‘앎’이라는 것의 개념도 물론 기존과 달라지겠지만, 흔히 ‘예지’라고 하는 능력이 탑재되었을 때, 인간은 과연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가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그 가운데 자녀를 출산하지만, 결국 자녀는 부모보다 일찍 불치병으로 죽게 될 운명에 처하고, 그 운명의 문제 앞에서 부부는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한 가정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핵심은 그 예지력을 표현하는 이 영화의 놀라운 방식이다. 그 방식은 대조라고 볼 수 있다. 루이스 입장에서는 큰 관심이 없을 인류의 평화를 이룩한 그날의 사건, 중국 ‘샹 장군’에게 ‘전쟁은 영웅을 남기는 게 아니라 과부와 고아만 남길 뿐이다’라는 지극히 보편적 ‘메시지’가, 부인의 유언을 전언하는,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마사지 효과’가 극대화된다. 메시지(message)는 뻔한데 마사지(massage)가 확실할 때, 비로소 인간은 소통하는 듯하다. 이 진리란 직장과 가정에서 산전수전을 통한 사회생활 경험으로 겨우 터득하는 법이다.

루이스는 어떻게든 샹 장군을 설득해야 한다는 당위밖에 없으니 무턱대고 전화를 걸고,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샹 장군과 통화가 시작되자, 그와 이 사건의 미래적 결말의 순간으로 옮겨가, 그 자리에서 현재 전화상으로, 그 미래에서 볼 때는 과거에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듣게 되는 ‘사건’을 경험한다. 놀랍다. 인류를 구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 덕분에 자신의 가정사는 불행을 겪게 된다. 아마도 그녀의 예지력이 어떻게 습득되고, 그 인지과정과 구조를 머리로는 다 이해한 남편 ‘이안’도, 결국 딸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는 그녀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부관계에 자녀가 끼어들면 그렇다. 가정사란 말 그대로 개인사니 말이다.



눈여겨볼 장면은 루이스에게 이안이 프러포즈를 할 때의 대사이다. ‘앞으로 인생의 모든 걸 알게 되었을 경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모든 걸 알게 되더라도 그때그때 인생에 주어지는 상황마다 맡기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로 답한다. 인생의 답도 여기에 있다. 모든 걸 알게 되고 ‘해석’하게 되더라고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행복과 불행의 유불리를 따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돌아보면 그냥 되는 대로 살고 있는, 그래서 그 구렁텅이 같은 삶에서 실낱같은 의미를 찾는, 그게 또 인생의 묘미라는 깨달음 말이다. 인생은 해석되기도 하지만 경험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해석학의 대가들이 던진 말들이 떠오른다. 해석학은 현상학과 함께 현대철학에 맞물린 어려운 학문 분야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태생적으로 보수적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다머나 리쾨르 같은 철학자들이 정치적으로는 보수인 것 같다. 아마 이 영화의 주인공 루이스와 비슷한 인생관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가 유일하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해석학적 경험’이다. 인생이 의미 있으려면 내가 겪는 경험들에서 의미를 찾는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고, 현대인들은 대체로 이 경험을 직접적으로 하기보다 간접적으로 추체험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문학과 영화가 인간의 삶에 던지는 의미가 해석학적 경험의 큰 부분이 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언어적으로 논하는 장에서 소통이라는 개념이 발생하는 듯하다. 이 영화는 언어를 공부하는 자리에서 다루기에 참 좋은 작품이다. 언젠가 교과서에서 소개하면 좋겠다.



언어학 개론에서 언급하는 웬만한 주제들은 이 영화 속에 모두 녹아들어 있다. 노골적으로 영화가 표방한 이론은 ‘사피어-워프 가설’, 즉 ‘언어상대성 원리’이다. 국내에서 이 이론으로 검색하면 늘 상위 차트에 검색된 책은 헬무트 기퍼라는 독일학자가 이 이론의 창시자 사피어와 독일 언어학의 관념론적 토대인 훔볼트의 ‘세계상(Weltbild)’에서 시작하여 행동-구조-맑스주의 관점까지 통과한 논의를 정리한 <언어상대성 원리는 있는가?>이다. 읽었지만 대학시절 촘스키 책을 읽을 때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민족언어학’ 정도의 개념이던 사피어의 이론을 받아들인, 미국인 제자 워프가 인디언에게 관심을 가졌고 ‘호피어’라는 특수한 언어가 호피 인디언만의 독특한 ‘시간’ 사유에 영향을 끼친 사례를 밝혀내어, 이걸 ‘언어적 세계상(sprachliche Weltbild)’이라고 말한 것이다. 훗날 아인슈타인의 물리 이론에 버금갈 언어학적 상대성 이론이라고 평가를 받으며, 언어상대성 원리라고 불린다.

이 주제야 학문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인데, 상대성보다는 특수성이 더 맞지 않을까? 인간의 언어가 지닌 보편성에 기대어 볼 때 위배될 만한 특수한 사례가 있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촘스키의 보편문법을 믿는가 보다. 인간과 민족과 언어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은 없고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보다, 개인적인 인간과 그들의 집단인 민족과 그 개인이나 집단에서 사용되는 언어란, 일반보편성에 근거하여 의미를 지니고 소통하기 마련이지만, 그 의미가 특수한 사례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언어소통도 특수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 특수한 의미와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 특수한 언어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쯤으로, 이 영화를 정리할 수 있겠다.

보편적으로 ‘통번역’이 가능했던 인류에게 최초로 말을 건넨 외계인의 언어란 특수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외계인이 던진 충격으로 인류가 소통을 포기하고 평화를 깨트릴 뻔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인류가 전쟁이라는 극단적 투쟁을 벌이는 근본적인 원인은 대체로 문명, 즉 종교, ‘신’의 문제가 아닐까. 어찌 보면 ‘신’은 ‘외계인’이다. 이 영화와 궤를 달리 하지만 외계인의 존재가 부각된 우주 영화가 <인터스텔라>이다. 그 영화에서도 시공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오늘날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던진 존재는 그 현재가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의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책장 앞 ‘STAY’라는 모스부호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중에 따로 언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만큼 인간의 사유와 언어는 한계가 뚜렷하고, 인간은 외계인 혹은 신의 언어를 배워야만 한다.



그 신의 언어로 등장하는 ‘헵타포드어’는 엄밀하게 보면 음성보다 문자의 측면이 부각된다. 언어학적으로 언어는 문자와는 다르며, 언어는 본질적으로 음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현대인이 문자를 사용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언어=문자’라는 인식, 즉 ‘언문일치’라는 근대적 개념이 생겼을 뿐, 이 둘은 매우 ‘자의적’인 관계를 지녔다. 쉽게 말해 언문일치는 불가능한 이념이며, 현실 세계의 진실은 언문의 불일치라는 말이다. 기호학적으로 기표나 기의에 대한 논의는 원래 음성언어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인데, 여기에 문자를 함께 다룰 때 기호체계가 두 가지가 생기는 셈이다. 헵타포드는 언제부턴가 ‘덜덜’거리는 음성기호보다 ‘먹물 뿜어 동그라미 그리기’ 신공으로 완성한 문자기호를 중심으로 의사를 전달한다. 그 까닭은 물론 인간이 소통을 음성보다 문자(영어 알파벳)를 중심으로 시도하는 것으로 방편을 바꿨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학자 루이스도 의사소통이란 녹음된 ‘음성’만으로는 안 되고, 실제 대상을 만나 ‘바라봐야’만 비로소 가능하다고 언어학적 입장을 전환하게 된 듯하다. 엄밀하게 ‘면대면'으로 대화한다기보다는, 가운데 ‘창’을 하나 놓고는 상형문자를 써가면서 대화하는 셈이다. 음성만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문자를 동원하여 해석하며 동시에 경험하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요즘 해외 갔을 때 외국 기사분들과 핸드폰 어플 번역기로 소통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루이스와 이안이 외계인 헵타포드를 만나 그들의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문자체계를 습득한 상태에서 소통을 했던 그들의 문자체계를 이해했다고 보는 측면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이 어디 사람 얼굴을 쳐다보며 대화하는가, 대체로 뭔가 중간에 매체를 놓고 대화한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의사소통은 근본적으로 매체가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영화가 던져주는 언어학적 주제들은 여러 방면인데, 이 글로도 다 수습이 안 된다는 느낌이다. 물론,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 제일 크겠지만, 그동안 이 영화가 과학적 측면에서만 리뷰되었다는 인상 때문에, 상대적으로 언어학 자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평론계의 아이돌 이동진 형님이 다정한 물리학자 김상욱을 불러 이 영화를 논할 때 발견한 대사가 기억난다. 루이스와 다른 언어학자, 버클리대 교수와 비교할 때, ‘전쟁’의 산스크리트어 어원을 밝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방법론적 측면에서 물리학자와 함께 작업할 만한 토대, 즉 ‘수학적’으로 언어를 연구한다는 언급을 학문에 무지한 미군 대령이 한 부분이다.



이제 마무리를 하련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내가 떠올린 말이 있다. “보이는 말들” 헵타포드어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인간의 언어는 일단은 ‘들리는 말’이 그 본질적 속성이고, 이후 ‘보이는 글’을 만들어내었다. 어쩌면 말은 글을 통해서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말과 글의 차이에서 핵심적인 것이 ‘시간’의 문제이다. 강력한 말은 기억에 남게 되고 마치 뇌리에 ‘쓰이는’ 이미지 작용을 거친다. 그리고 인간의 뇌를 자극하는 말은 대체로 기록된 글에서 비롯된다. 존재에 대해서도 언어에 대해서도 인간은 ‘시간’의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오죽했으면 뉴턴도 웬만한 물리 개념은 다 정의하면서도 시간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시간 개념을 건드린 아인슈타인이 천재라고 불리는 것이고, 이 인간 언어에 있어 시간의 문제에 대한 상상력을 펼친 소설가 테드 창은 천재이며, 그 원작의 서사를 거의 대부분 영화로 재현해낸 감독 드니 빌뇌브도 천재이다.

그러나 나도 그렇고 대부분 인간은 천재들이 해석해놓은 ‘시간’의 문제에 대해 그저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경험을 겨우 말 몇 마디로 옮겨놓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방편이다. 2월에 개학을 했고 2주쯤 출근하며 고3이 되는 학생들 한 명씩 만나 상담을 했다. 그리고 이번주 집에서 이런 글을 쓴다. 내 말은 내 언어는 과연 그들에게 어땠는지 돌아봤다. 어찌 보면 ‘미래완료’처럼 통계적으로 수능성적과 대학입시는 이러이러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암울한 현실을 설파했다.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아니었으며, 헛된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냉철하게 직시하게 하려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들의 인생을 아이들의 미래를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했을까 반성했다. 마치 루이스가 ‘미래’를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체로 암울한 결론을 알고 있음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의미가 있고 기쁘고 기분 좋은, 이른바 긍정적인 대화는 할 수 없었을까, 나는 그 배려가 부족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알지만 매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는 배려 말이다.


* 참고자료 : 헬무트 기퍼 저, 곽병휴 역, <언어 상대성 원리는 있은가?: 샤피어-워프 가설 연구>, 아카넷,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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