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 04 <언어의 정원> : 교사/학생의 관계와 학교라는 공간
담임교사에게는 마의 첫 달인 3월을 한 달 통째로 날려버리고 오랜만에 끄적이게 된 영화가 바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신성, 신카이 마코토의 소품 <언어의 정원>이다. 그의 작품을 모두 보지는 못했다. 군대 있을 땐가 제목이 궁금해 파일로 혼자서 찾아본 <초속 5센티미터>가 처음이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끝나버린 사랑의 과거를 붙잡고 기억을 연대기적으로 써내려간 ‘시간’ 이야기의 제목이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을 포함한 ‘속도’란 점에서 놀라웠다. 그리고 명절 때였던 듯 초기 육아에 찌들어 있던 우리 부부를 위로한다며 지금은 결혼했지만 당시 총각이었던 내 착한 동생이 추천한 작품이 <너의 이름은>이었다. 아직도 그 유명하다는 <날씨의 아이>와 <스즈메의 문단속>은 보지를 못했다. 그만큼 나도 애니메이션과 멀어진 셈이다. 또한 내가 이 글을 쓰기에는 신카이 마코토 작품세계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말들’ 시리즈에 ‘보이지 않는 말들’로 가득찬 이 영화를 포함시켜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나도 용기내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시작해본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이 영화의 공간으로 제시된 ‘학교’와 ‘정원’이고,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남자’와 ‘여자’기 전에 ‘학생’과 ‘교사’라는 사실이며, 이 교사의 과목이 ‘국어’이다 보니, 고전시가의 한 장르 ‘단가(와카, 和歌)’가 수업의 제재이자 두 인물의 만남의 매개체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삼국유사>에 준할 법한 일본의 고대시가 문헌 <만엽집>, 즉 ‘만요슈’ 작품 두 편이 등장한다. 이 영화 자체가 이 두 편의 시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다가 원제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 ことのはのにわ)’은 책 이름 ‘만엽(万[萬]葉)’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만 가지’(萬)나 되도록 다양한 ‘이파리’(葉)와 같은 것은 비유적으로는 ‘언어’(言)로 구성된 ‘시’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정원’(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말을 모아놓은 것을 시라고 보자면, 이파리를 모아놓은 것은 정원이라는 설정 자체가 비유적이다. 두 편의 시를 일본문학에 대해 문외한 입장에서 히라가나는 빼고 한문과 번역된 우리말로만 감상한다.
雷神 小動 刺雲 雨零耶 君将留
鳴る神の 少し響みて さし曇り 雨も降らぬか きみを留めむ
な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さしくもり あめもふらぬか きみをとどめむ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만요슈 11권, 2513번)
雷神 小動 雖不零 吾将留 妹留者
鳴る神の 少し響みて 降らずとも 吾は留まらん 妹し留めば
るかみの すこしとよみて ふらずとも われはとまらん いもしとどめば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말라 하시면(만요슈 11권, 2514번)
2513번은 여주 교사 유키노의 ‘화두’라고 볼 수 있다. 2514번은 남주 학생 타카오의 ‘답가’라고 볼 수 있다. 두 편의 시 모두 ‘우렛소리 희미하다’는 첫 구절은 공통적이다. 그러나 화두는 이제 비구름이 몰려온다는 ‘미래’적 기상 예보이고, 답가는 이미 비구름이 멀리 지나갔다는 기상의 ‘과거’ 흔적이다. 아무튼 이 시 안에서 유일한 ‘소리’(雷神)는 ‘희미’(小動)하다. 천둥(雷)이 이미 소리인데, 그 소리에 ‘귀신’(神)이 붙었다는 표현이 문학적이다. 일본어로 이 표현이 어떻게 된 연유인지 궁금해서 찾아보니, 중국으로부터 동북아 고대 설화, 우리는 도교, 일본은 신도에서, 천둥과 번개를 일으키는 귀신을 ‘뇌신’으로 불렀단다. 이 뇌신이 조그맣게 움직인다는 것이 천둥소리가 희미한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된 셈이다. 그리고 ‘구름이 끼는’ 기상 현상이 ‘찌르다’의 뜻을 가진 ‘자(刺)’로 표현된 사실은, 아직까지 공부가 부족하지만 신비롭다. 학교 일본어 선생님께 물어본 결과도 뾰족한 것은 없었다.
화두에서는 구름이 끼지만 답가에서는 구름이 안 보인다. 저 멀리 물러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큰 차이가 화두는 ‘비가 내리’(雨零)는 현상을 어조사 ‘야(耶)’를 통해 비‘라도’ 내려‘준다면’으로 처리한 점과 달리, 답가는 ‘비록 ~하지 않더라도’(雖不) 구절로 흔한 영어 관용구로 ‘even if(though)’와 유사한 의미로 처리했다. 이 비라는 것도 엄밀히 구분하면 보통 비(雨)와 이슬처럼 조용히 오는 비(零)가 다른데, 비가 ‘몰아친’ 화두에서는 둘 다 있지만 비가 ‘잦아드는’ 답가에서는 ‘零’만 존재한다. 가장 흥미로운 게 마지막 구절에 공통적으로 ‘머무르겠다’(将[將]留)고 표현한 대목이다. 얕은 일본어 공부에 근거하면 ‘장(将)’은 ‘곁에’의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머무르다’(留)와 어울린다. 이 ‘곁에 머묾’의 주체가 화두에서는 ‘그대’(君)으로 표현되어, 그대를 내 곁에 머무르게 ‘하고 싶다’는 소망 혹은 아쉬움을 암시했다. 그런데 이 ‘곁에 머묾’의 주체를 답가의 ‘나’(吾)로 바꾸게 되면 날씨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나는 그대 곁에 머물‘겠다’는 미래시제 혹은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물론, 이 경우의 단서는 ‘그대가 가지 말라고 하시면’으로 풀이되었다. 이게 무슨 ‘밀당’인가 싶다. 결국, 두 편의 시를 통해 앞부분에서 언급한 기상 현상, 천둥과 구름과 비는 ‘핑계’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여주 교사 유키노와 남주 학생 타카오도 꽤나 오랜 시간 ‘비’라는 소재를 핑계로 정원에서 만나왔던 셈이다. 그러다가 결국 ‘비’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발걸음이 저절로 ‘정원’으로 오게 된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특별히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발걸음이 저절로 가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데는 부정할 대목이 없다. 이 부분은 이따가 따로 ‘사랑/배움’의 역학 혹은 ‘정원/학교’의 공간으로 따져볼 테고, 지금 이 단가에서는 ‘그대’가 ‘나’와 정을 통한 사이임을 알 수 있다. 그저 몇 번 만난 정도가 아닌 남자 입장에서 ‘여자 애인’을 부르는 말로 누이를 뜻하는 ‘妹’를 사용했다.
그런데 ‘자(者)’를 문장 말미에 쓴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사람을 낮춰 부를 때 이 글자를 쓴다. 나 혹은 그대를 낮춰 부른 겸손의 표현인가. 그건 아닌 듯하다. 문법적으로 접미사나 의존명사로 쓰인다는데, 그것 또한 앞서 의미 안에서 가능하다. 이 부분은 동료교사에게 답을 얻었다. 일본 만요슈도 우리 <삼국유사>의 향찰과 마찬가지로 훈독과 음독으로 나누어서 해석할 수 있는 ‘차자표기’이기 때문에, ‘만엽가나(万葉かな)’라고 그 한자표기를 부른다고 한다. 이 문장에서의 ‘者’는 실질적 의미 없이 문법적으로 쓰였고, ‘붙인다’의 뉘앙스를 지닌다고 한다. 우리의 향가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만요슈 와카도 한자를 온전하게 한문으로 봐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 문맥에 있어서 음차와 훈차의 방법론을 어떻게 구사하는지까지 알 수 없다. ‘그대가 가지 말라고 하시면’으로 풀이될 이 마지막 구절 ‘妹留者’에 대해서는 숙제를 남겨 두고자 한다.
이제 영화평으로 돌아가서 이 두 편의 시가 이 영화에 온전히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든 힘은 아무래도 주오대학 일문학과를 졸업한 감독의 전공 때문일 것이다. 인문계 공부해봤자 다 쓸모없다고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를 보면 고전시가 공부를 참 잘했을 것 같다. 영화 중간 참으로 일본스럽고 참으로 올드한 교실 수업 풍경이 나온다. 녹색 칠판에다가 흰색 백묵으로 딱딱 소리내며 만요슈를 히라가나 세로쓰기로 할아버지 교사가 필기하고, 햇살이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교실에서 그 일본 특유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차분하게 앉아 따라 쓰고 있다. 그 공간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떠올리는 ‘학교’라는 공간의 전형적인 상(想)일 것이다. 그런데 그 학교를 각자의 다른 이유에서겠지만, 가기 싫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가 확실한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는 장소가 ‘정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 곳은 가기 싫어서 그저 ‘공간’으로만 존재하지만, 한 곳은 그 가기 싫은 곳을 피하다 보니 계속 오게 되어 머무르게 되는 ‘장소’로 존재한다. 이 두 단어의 대조는 중국계 미국인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의 <공간과 장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국내에서는 ‘토포필리아’, 즉 ‘장소에의 사랑’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이 분야에서의 ‘공간/장소’ 이분법이 ‘학교/정원’에 딱 맞아떨어진다. 둘 다 학교가 싫어 땡땡이를 친 교사와 학생 아닌가. 그 학교 대신 선택한 곳이 정원인 셈이다. 이 영화 때문에 도쿄 신주쿠 공원의 그 조그만 정자로 사람들이 그렇게들 많이 찾아왔다고 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학교를 싫어하는가. 이 영화의 여주 교사는 그곳이 직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초임 교사로 수업도 학급관리도 잘하며 괜찮은 시작을 했지만, 너무 완벽 혹은 너무 착한 탓으로 학생들로부터 질투와 오해와 왕따를 받은 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상태이다. 요즘에서야 언론이 주목하는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던 교사들의 전형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에다가, 그녀가 아침부터 맥주 안주로 초콜릿을 택한 것을 보면 쓴맛과 단맛을 함께 찾는 미각상실에다가, 전형적인 우울증이다. 어른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 모습을 솔직히 보여주고 있고, 언젠가는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준다.
그 직면을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가서 터뜨린다. 사실 영화의 매력은 마지막 장면에서 비와 해가 함께 나는 ‘풍경’ 작화와, 넘어지면서도 뛰어가는 ‘발’의 동작과, 그때 빵 터지는 ‘울음’의 소리 가운데 흘러나오는 테마곡이라고 본다. 말 그대로 감정이 끝에 가서 빡 터졌다. 기가 막힌 엔딩이다. 아무리 서사가 빈약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장면 하나만으로 이 영화는 명작이다. 그 기준은 이 작품이 서정적 혹은 시적이라는 데 있다. 감정을 응축했다가 터뜨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매우 짧은 러닝타임으로 압축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반대론적인 질문을 던지면, 왜 사람들은 정원을 싫어하지 않는가, 혹은 좋아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원에 가면 당장은 머무르고 있지만,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사람을 만나고 자연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한 까닭인지 정원으로 자주 오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잃었거나 그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조금 더 논리를 확장하면, 학교가 만약 정원 같은 곳이 될 수만 있다면, 역설적으로 학교는 가고 싶고 배우고 싶고 놀고 싶은, 좋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결국 여주 교사 유키노는 정원에 머물며 그 작업을 해온 셈이다. 반대로 남주 학생 타카오는 학교를 가지 않고 이 정원에 머물며 무엇을 한 것인가.
타카오는 선생 입장에서 볼 때도 부모 입장에서 볼 때도 ‘대견한’ 학생이다. 타카오의 어머니는 혼자 두 아들을 키우지만, 나잇값 하지 못한 채 젊게 살며 어린 남자와 교제한다. 그리고 가출을 자주 한다. 형은 독립해서 여친과 동거하겠다고 한다. 그러니 아직 학생인 타카오를 ‘돌볼’ 가족은 아무도 없다. 일찍 ‘애어른’이 되어버린 이 친구는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고 그 진로를 위해 필요한 비용을 벌고자 아르바이트를 병행한다. 교사 입장에서 요즘 이런 학생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그러니 현실에서 보기 드물다. 그래서 학교 입장에서는 ‘문제아’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학교를 나오지 않는 학생은 문제아다. 왜냐하면, 그 학생은 배움이 없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데, 그걸 베풀 수 있는 학교에서 선생을 만나지 않고, 가정에서도 보호자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타카오는 스승없이 부모없이 혼자서만 잘 큰 학생이다.
이러한 타카오도 정원에 머무르며 유키노를 만나면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배움’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형편없는 유키노를 스승으로 만나면서부터이다. 어떻게 자기 학교 교사로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스승이 될 수 있냐고 반문하면, 이 작품의 큰 모티브, 화두 단가에 대한 답가를 찾아낸 결말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이 정원에서 이루어지든 학교에서 이루어지든, 끌림이 있다면 발이 그 사람에게 자꾸 향하게 되고, 그 머묾으로 인하여 자기가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힘을 얻었다면, 그 머묾 혹은 만남은 분명 배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배움은 반드시 ‘교학상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교육자가 있을 순 있겠으나, 나는 교육경력 17년을 놓고 단언컨대, 가르침과 배움은 반드시 함께 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관계는 교육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배움의 문제는 상호 관계적 측면에서 사랑과 닮았다.
남녀의 사랑, 이성적인 연애 문제도, 결국은 배울 게 있는 사람이라는, 즉 내가 함께 살아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넘어서지 못하면 결혼제도의 약속으로 이어질 수 없다고 본다. 내 연애관은 매우 보수적이지만,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꽤 진보적이다. 이 영화에 대해 다소 거리낌이 있는, 즉 12년 차 연상연하 커플, 그것도 여자교사와 남자학생의 연애관계로만 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의 공식 포스터 문구가 힌트를 준다. ‘사랑 이전의 사랑 이야기’로 번역되었는데, ‘愛’(あい)를 넘어 ‘孤悲’(こい)라는 일본어로 표현된다. 전자는 모든 대상에 대한 포괄적인 사랑인데 비해, 후자는 연인과의 사랑을 뜻한다. 히라가나로는 한자가 그냥 ‘恋[戀]’에 가깝다고 일본어 교사가 전한다. 그런데 그걸 ‘외롭고 슬픔’으로 풀어쓴 것이 흥미롭다. 일본 특유의 미감 ‘모노노아와레(物の哀, もののあわれ)’, 즉 ‘사물에 대한 슬픔’과 닮았다.
이 작품은 남녀의 연애 감정보다 더 근원적인, 고독한 인간이 슬픔을 딛고 배움을 통해서 뭔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만남, 그 관계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그걸 통속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면 사랑이겠지만, ‘배움’으로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관점에서 요즘 내가 담임교사로서 겪고 있는 학교생활 혹은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나 또한 유키노 같은 모습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 중에서 타카오 같은 모습도 보인다. 물론, 나의 직장은 남자사립고등학교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통해 연애 감정을 발견하기보다, ‘인간 대 인간의 배움’과 그것이 가능한 ‘정원 같은 학교’라는 공간을 떠올릴 수 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호기심으로 이 작품의 원작이라는 신카이 마코토의 소설(2013)을 찾아 읽었는데, 이 영화 엔딩 장면에 얽힌 비하인트 스토리를 알게 되었다. 유키노가 도쿄를 떠난 이후 타카오에게 다시 편지를 쓰며 둘의 관계를 이어가게 된다. 그러다 타카오는 일본에서는 사양사업이 되어버린 구두제작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 명품 디자이너가 되고자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이 답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피렌체로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학교에서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에 대한 교사의 이해와, 그 꼰대스러운 논리를 타파해낸 학생 스스로의 진로 개척이 나에게는 인상 깊었다. 결국, 타카오는 늘 그랬듯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모았고, 이탈리아로 가서 입학을 위해 언어를 배우고, 전문학교와 예술학교 사이에서도 고민하고, 그 가운데 많은 배움을 얻게 된다. 그렇게 5년간 성숙해진 타카오는 결국 20세(영화 시작할 때는 15세, 고1의 만 나이)가 되었을 때 32세의 유키노(영화 시작할 때는 초임 교사라 27세, 둘의 나이차는 12세 띠동갑)를 다시 만나고, 직접 만든 수제 구두 완성품을 선물로 전달한다. 그때 도쿄 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린다는 묘사로 소설은 끝난다. 소설을 읽어보니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여주 교사 유키노라기보다 남주 학생 타카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영화의 시점은 둘 다 균형잡혀 있는 편이고, 교사 입장에 선 나는 유키노 관점에서 감상한 측면이 컸다. 이렇든저렇든 ‘사랑’ 이전에 ‘배움’이 있고, 그것은 ‘정원’에서 만나 머무는 ‘관계’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