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 05 <듄1/2> : 침묵의 사막을 압도하는 푸른색의 목소리
마의 3월보다 더 지독한 ‘마의 5월’이었다. 그냥 편히 쓰면 될 것을, 글을 시작도 못 하다가 이제야 끄적인다. 고3 담임도 그렇지만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매 주말이 ‘행사’였다. 그 와중에 놓지 못한 영화가 <듄(Dune)>이었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은 아예 읽지를 못했다. 여러 버전의 영화화 시도가 있었다지만, 친애하는 감독 드니 빌뵈브의 최근작 두 편만 영화관을 가서 본 기억이 전부다. 국내에서는 ‘세계관’을 운운하는 비평이 즐비했지만, 역시나 믿을 구석은 이동진 형님의 평가다. 이 광범위한 서사를 영화 두 편에 담아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1편보다 나아진 2편’이란 호평을 내놓았다. 그 근거는 어디까지나 ‘삼부작’ 시리즈에서 원래 2편이 최고일 수밖에 없고, 3편까지 퀄리티를 유지한다면 ‘대작’도 될 수 있다는 논리다. 1편이 세계관을 구성하고 떡밥 까느라 정신이 없고, 3편은 모든 떡밥을 회수해야 할 부담이 있지만, 중간에 있는 2편은 감독이 편하게 자기 영화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크 나이트>가 그러했고 <반지의 제왕>이 그러했지만 <듄>은 3부까지 봐야 확인될 것이다.
듄, 우리말로 ‘모래언덕’, 한자어로는 ‘사구(砂丘)’다. 왜 이렇게까지 이 영화의 영상미, 사막의 아름다움에 내가 푹 빠져 지냈을까 생각해보니, 나의 5월 자체가 좀 밋밋 혹은 우울했기 때문인 듯싶다. 영어사전에서 ‘dune’을 치면 ‘down’과 어원을 같이 한다고 나온다. 언덕을 오른다 해도 모래 때문에 발이 푹푹 빠져 내려가는 사막 아닌가. '듄'에서는 모든 게 '다운'된다. 어학적 지식을 더 깊게 언급할 순 없지만, 이 영화가 만들어낸 ‘아라키스’ 행성의 독특한 외계 생명체 ‘샤이 훌루드’, 즉 ‘모래벌레’를 불러들이려고 진동기를 사용할 때, 모래가 폭폭 꺼져 내려가는 장면은, 긴장감 못지않게 나에게는 왠지 모를 황홀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들은 이 모래벌레를 ‘위대한 창조주’라고 부른다. 그 신을 영접하기까지의 경외감, 그것은 두려움과 함께 묘하게도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을 맞이하게 된 인생은 최소한 밋밋하지 않다. 삶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생의 절절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일 테다.
나는 고3 수험생을 위한 빤한 국어수업, <EBS 수능특강>에서 오랜만에 올드하기 그지없는 시를 한 편 발견했다. 한때 경남 통영으로 학생들 데리고 문학답사 가느라 박경리, 김춘수와 함께 열공했던, 유치환의 1938년 작품인 <생명의 서(書)>였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학생들은 몰랐을 테다. 나는 이 시로 수업을 할 때 계속 영화 <듄>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물론 사막을 시적 공간으로 다루는 최근 작품도 좋은 것이 있겠지만, 내가 잘 몰라서 문제다. 나도 학생들도 ‘병든 나무’처럼 살아간다. 공부로 얻은 ‘지식’이 ‘독’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삶’의 ‘애증’도 감당하지 못하니 말이다. 이러한 삶은 수험생 말고도 스트레스 받는 현대인의 모든 삶에서 발견되지 않을까. 영화에서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분)도 궁궐 안에서 지내던 나약한 왕자 시절은 마냥 ‘스트레스 덩어리’였다. 내가 요즘 만나는 우리 학생들과 닮았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아라비아의 사막’은 과연 어디일까. 실제 그 ‘머나먼’ 곳으로 공간 이동은 할 수 없으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2연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시 안에서는 신에 대한 표현이 ‘불사신’과 ‘일체’와 ‘알라’로 등장한다. 나머지는 ‘해’와 ‘밤’과 ‘모래’라는 자연 현상 뿐이다. 말 그대로 ‘영겁의 허적’이며, 참으로 단순한 풍경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에서 앞으로 안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말이다. 모래에서는 머물러 있으면 죽지 않을까.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듄> 2편에서 폴이 프레멘 집단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막에 나가 며칠 동안 생존훈련을 하는 장면은, 처음에는 예수의 40일 광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연인이 되는 챠니(젠 데이아 분)와 함께 하는 바람에 로맨스로 돌변한다. 이렇든 저렇든 사막에 가면 살기 위해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작열’하는 낮이나 ‘영겁’ 회귀를 경험하는 밤이나, 그 단순한 모래에서 뒹굴며 고독을 경험한 인생이라면 왠지 신을 찾을 것만 같다. 사막에서 무신론자가 과연 있을까 싶다. 물론 요즘 같은 현대적인 관광 말고, ‘고독’한 사막에서는 말이다.
그 옛날 유치환은 과연 어떤 사막을 가 보았을까. 아마 아라비아까지 가 보진 못했을 테다. 작가 연구에서는 유치환과 서정주 같은 시인들이 1940년 전후의 만주 체험 때 ‘사막 시편’을 썼다고 본다. 아라비아가 아니라 만주 벌판만 가도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된다고 장담한다. 엄정하게 3연만의 진술은 ‘하여’ 이후에서 시작된다. 요즘 부쩍 이 말투를 쓰는 학생들을 보는데, 아무래도 시대극의 영향인 듯싶다. 1930년대 시에도 버젓이 등장하는 걸 보니, 19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 선샤인>의 말투가 일리 있어 보인다.
도대체 이 시에서는 왜 머나먼 사막까지 가자고 한 것일까. 끝까지 읽어보니 나란 존재가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배우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연에서 ‘나 = 나의 생명’이란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걸 배우지 못한다면 사막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폴 아트레이데스의 경우라면 ‘폴 무앗딥’(사막쥐)을 거쳐 ‘리산 알 가입’(보이지 않는 혀)으로 ‘퀴사츠 해더락’, 즉 메시아로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폴 무앗딥’에서 그저그런 프레멘 중 하나로 눌러앉으며 ‘우슬’(주춧돌) 같은 애칭으로만 불리며 평범하게 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죽는 것일까.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만이 확실할 뿐, 생을 지닌 상태에서의 밋밋함과 절절함은 본인이 아닌 이상 함부로 구분하지를 못하겠다.
시를 읽든 영화를 보든 사막에 가면 확실한 것이, 살든지 죽든지 존재의 상태가 밋밋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사막은 절절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장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유치환의 시에서는 ‘독’하고 ‘열렬’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단언하는데, 그것은 ‘고독’이라고 요약된다. 그 상태가 인간의 ‘운명’이며 ‘원시의 본연한 자태’라니. 그것만 경험할 수 있다면 삶과 죽음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다. 밋밋하게 사느니 절절하게 죽어가는 게 더 생명력이 있다는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회한 없는 백골’은 그렇게 후회 없이 이 사막에서 죽어갔던 다른 존재일 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시를 분석하다 보면, 정말 나도 사막으로 가야만 할 것 같다.
왜 그런 마음이 5월 내도록 들었을까. 그만큼 내 마음이 건조하고 까칠했기 때문일 것이다. 말 그대로 사막 같고 모래 같은 마음이다. 유치한 비유 같은데, 히포크라테스의 체액기질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울질에 가깝지 않을까. 피나 물이나 즙 같은 액체는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영화 듄의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처럼 아라키스 행성을 떠돌면서 프레멘으로 사는 듯한 기분이 든다. 놀랍게도 프레멘의 옷은 신체에서 나오는 물을 정화하여 식수를 만들어내는 첨단기술을 자랑한다.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은 동료의 시체도 물을 재활용하여 공동체의 자원으로 사용한다.
그토록 사막 같은 프레멘의 삶에서 생명과도 같은 물은 영화 내도록 ‘푸른색’으로 강조된다. 프레멘이 ‘이바드의 눈’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아라키스의 특산물, 즉 ‘스파이스 멜린지’에 노출된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황토색’으로 가득 찬 이 건조한 행성을 전 우주가 제국을 만들어 침략하고 소유하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향신료’ 때문이라는 게 놀랍다. 그 버석버석한 모래에서 이 눈부신 가루가 추출된다니.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가 이 모티브로 서양사에 점철된 제국주의를 묘사한 점에 경의를 표한다. 황톳빛 사막 행성이 건져낸 ‘주황색’의 이 가루에 중독되면 신비롭게도 ‘푸른색’ 눈이 된다는 설정도 멋지다.
우울한 내면의 상징으로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한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 예고하면 다음 영화는 폴 매스칼 주연의 독립영화 분위기의 <애프터 썬>(2022)과 앤드루 솔로몬의 책 <한낮의 우울>(2004)이다. 책의 한 대목인 ‘우울의 반대는 행복이 아니라 활력이다’가 이번 글과의 연결고리이다. ‘노란색’이 ‘파란색’과 대조되는 것이 왜 우울증의 상징인지를 5월 내내 영화 <듄>과 <애프터 썬>을 보며 깨달았고, 비록 작지만 그 근거를 시 <생명의 서>와 책 <한낮의 우울>을 읽으며 찾은 셈이다. 수수께끼 같은 화두만 던졌는데, 논리적으로 책임지기 위해 또 한 달을 공부해야지 싶다.
여름방학이 되어야 원작 소설을 읽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이는 말들’ 시리즈에 넣은 까닭은 ‘우울한 내면의 언어’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다. 크게 두 가지가 인상 깊었다. 첫번째, 이 영화가 창작해 내었다는 인공언어 ‘차콥사어(Chakobsa Language)’이다. 원작 소설에서는 이 언어의 명칭만 등장하고 아랍어에서 착안했다는 그 느낌만 전달할 뿐인데,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드니 빌뵈브 감독은 실제 이 언어를 체계적으로 완성하고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데이비드 피터슨(David Peterson)이라고 언어학자인데 <왕좌의 게임>에서 ‘발리라아어’를 이미 만들어본 경험이 있단다. 잠깐 국내 블로그에 소개된 내용만 보더라도 언어 천재이다.
이 영화에서 이 언어가 빛을 발하는 장면은 프레멘의 수장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 분)가 폴에게 부족의 언어를 가르치며 유머를 구사하는 대목의 그 발성인데, 참으로 멋지다. 아랍 계통의 언어가 이렇게도 활력이 있구나 나는 느꼈다. 그런데 이 활기찬 언어를 주인공 폴이 발음하면 뭔가 우울하고 왠지 비장하다. 그래서 메시아는 메시아, 리산 알 가입인 듯싶다. 그리고 이 차콥사어는 영화 제작 과정에서 문자 체계를 완성하였고 폴의 어머니, 제시카 아트레이데스(레베카 퍼거슨 분)가 푸른색 물을 먹고 푸른 눈을 가진 ‘대모’가 될 때 얼굴에 문신이 새겨지는 압도적 장면으로 등장한다. 마치 우리 영화 <파묘>에서 무당 김고은이 얼굴에 한자 축경을 새기는 장면과 견줄 만하다. 공교롭게 개봉 연도가 2024년으로 같다.
두 번째가 이 글의 주제와 연결되는데, 이 차콥사어를 구사할 줄 아는 다른 집단인 ‘베네 게세리트’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으로만 구성되고, 종교적이면서도 성(性)적인, 왜냐하면 계획적인 교배를 통해 인간 종(種) 자체를 개량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성적인, 그러면서도 정치력을 발휘하는 이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관심이 나의 초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어떠한 비평의 말도 글도 접한 적이 없다. 오늘날의 현실 세계로 적용하면 ‘교황청’ 같은 조직이고, 조금 더 음모론으로 접근하면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타니 같은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제와 기술을 장악한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통적으로 배후를 조종하는 정신주의적 종교 집단이 있다는 논리인 셈이다. 석유로 떼돈을 버는 중동의 만수르 같은 ‘하코넨’ 가문도 결국 베네 게세리트의 기획 아래 있다.
이 집단의 언어와 심리가 놀랍다. 이들은 스스로의 신체를 조정할 수 있도록 고도의 정신적 훈련을 받았고, 특히 여성으로서의 태아의 성별을 결정할 수 있다니,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방안을 가진 듯하여 부럽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베네 게세리트는 ‘수녀 혹은 마녀’로 보인다. 아랍 사막에서 여성들이 착용하는 ‘차도르’ 같아 보이는, 검은 수녀복 안의 그녀들은 일부러 외모를 가꾸지 않는 듯, 과거 영화에서는 머리카락과 눈썹을 삭도한 ‘여승’처럼 등장한다. 드니 빌뵈브가 고른 베네 게세리트의 수장 가이우스 헬렌 모히암(샬롯 램플링 분)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잘 모르는 배우이지만 <스위밍 풀>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보여준 ‘고전적이고 도도한 영국여자’의 시크한 분위기는 확실했다. 물론, 그녀의 필모처럼 이 영화는 여성혐오나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적 시각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고약한 베네 게세리트 할머니는 말 안 듣는 제자 제시카를 통해 그의 아들 폴 아트레이데스가 퀴사츠 해더락이 될 수 있는지를 ‘시험’한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트리니티와 함께 빵 굽는 ‘오라클’ 아줌마를 찾아갔던 장면 같다. 결국 메시아의 운명은 스스로 정한다는 모티브가 대중 영화에서는 이미 익숙한 설정이다.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검증할 수 있다니,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내 눈을 똑바로 봐’라며 관심법으로 엉터리 수사를 하는 것 같다. 솔직히 가이우스의 시험은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한 평가 정도 아닌가. 훗날 폴이 메시아에 등극할 즈음 ‘경거망동하지 마라’고 충고하며 노망난 가이우스를 ‘조용!’으로 잠재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복수라고 보인다. 더 이상 폴은 베네 게세리트가 계획하는 방식의 퀴사츠 해더락보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의 메시아 ‘리산 알 가입’으로 등극한다. 이름의 뜻이 정말 멋지다. ‘보이지 않는 혀’, ‘침묵으로도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목소리’라고 해석된다. 압도 혹은 제압하는 침묵, 따라서 목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침묵 속 목소리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 특히 황톳빛 사막을 지나고 있다면 오아시스 같은 이 푸른 목소리를 듣고 싶다. 밋밋하고 우울한 우리 삶은 모래처럼 푹푹 빠져 사막을 이루지만, 그 우울의 끝에서 결국 생의 절절함을 만나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게 신이라면 신이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보이스’, 압도하는 목소리로 그려진다. 좀 감상적이지만, 우울의 끝에서 영화 <듄>이라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를 만났다. 우수에 가득한 눈빛, 메시아로 등극한 폴 아트레이데스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 참고 : 상상나라 블로그 ‘듄 시리즈의 차콥사어를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