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평 06 <애프터썬> : 썬크림 잔뜩 바르고, 마지막인 듯 춤을!
1. 이 영화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리할 만한 이야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 그냥 20년 전 캠코더에 담아둔 아빠에 대한 단편적 기억을, 현재 딸의 회상으로 굴절시키고 편집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딸의 나이는 11세, 아빠가 당시에 31세였는데, 오늘 딸이 딱 아빠의 나이가 된 생일이라는 사실과, 그 시절 마지막 여행지가 튀르키예 토레몰리노스였다는 사실만 믿을 수 있다. 그 외에는 객관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할 만한 정보가 없다. 모든 것이 모호하다. 사실이라기보다 기억에 의해 추가된 진실에 가깝다. 이동진 형님의 표현대로면 ‘휘어진’, 즉 왜곡된 추억인 것이다.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려는’ 영화 기법의 놀라운 시도라고도 평가했다. 이 ‘보이는 말들’ 시리즈가 다루기에는 버거운 성격이다. 실제로는 보지 못한 것들을 영화로 보여주려고 할 때 ‘보이지 않는 말’을 ‘보이는 말’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제목부터 모호하다. 무슨 뜻인가. 사전적으로는 우리가 흔히 ‘썬크림’이라고 부르는 제품의 영국식 표현이 ‘애프터-썬(after-sun)’이라 한다. 꽤 흥미롭다. 우리는 태양에 살갗이 탈까 봐 ‘사전’에 바르는 약품이 썬크림, 그러니까 ‘비포-썬’ 개념일 텐데, 이미 태양이 떠올라서 살갗이 타고난 후에 바르는 썬크림은 무슨 소용일까. 그런데 우리가 실제 썬크림을 사용하는 방식이 그렇지 않나. 미리미리 발라야 함을 알지만, 막상 태양이 떠오르고 나서야 타지 말아야지 하며 찐득찐득 바르지 않나 말이다. 영화에서 아빠가 전날의 부진을 만회하려 수구를 비롯해 제대로 물놀이를 시작하기 전, 딸에게 발라주겠다며 등을 돌리라 하니 딸이 못내 등을 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딸과 아빠 사이의 가장 수위가 높은 스킨십이다.
그 장면 외에 아빠와 딸은 각자 놀고 있다. 아빠는 성숙한 몸을 가졌지만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그래서 팔에 깁스나 해가지고 여행온 성인 남자, 딸은 이제 막 성에 눈을 떠가며 나름 세상을 안다고 여기지만, 정작 자신밖에 몰라 아빠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춘기 소녀로 묘사된다.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 사춘기 딸과 아빠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까. 남자와 여자로서 각자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남녀의 차이만이겠는가. 아빠와 아들이라도 어른과 아이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자전적 작품이라고 들었다. 감독이 여성이므로 주인공 아이가 소녀로 등장한다. 감독에게는 엄마보다는 아빠와 관련된 애틋한 사연이 있었으니, 이 영화가 만들어졌겠지 싶다가도, 흔히 말하는 동성의 부모자식 간 이야기가 아닌, 이성 간의 이야기로 이 작품이 꾸려진 점은 분명 의도가 있다.
굳이 오이디푸스에 준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 영화의 부녀 관계를 프로이트적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지 시간이 꽤 된 듯싶다. 왠지 부부는 고향 애든버러에서 어린 시절 알고 지내다가 20세의 다소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커플인 듯 보인다. 크게 갈등을 겪어 이혼했다기보다는 결혼과 출산부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어쩔 수 없는 과정에서 아빠는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나갔고, 엄마와 딸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양육이 편한 고향에 남으며, 자연스럽게 헤어진 게 아닐까. 이혼한 부부가 꾸준히 연락하며 아이의 학교생활에 관해 대화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이제 사춘기가 된 딸이 아빠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으니 개학 전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딸이 아빠에게 상처를 준 대사처럼 ‘돈도 없는 무능력한’ 부모가 무리해서 떠난 여행은 숙소부터 형편없다. 공사 중이라 가격이 쌌던 것이었고, 침실 상태도 예약한 내용과는 달랐다.
특별히 아빠와 엄마 사이의 갈등은 없는, 그러나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와, 혼자서 살궁리를 찾아 떨어져 지내는 아빠 사이에서, 딸은 아빠를 잠시 선택했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통화를 끝낸 아빠에게 딸이 묻는다. ‘왜 아빠는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거야?’ 왜냐하면 딸이 볼 때도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각자 애인을 찾고 있는 듯한데, 왜 딸인 자신을 중간에 놓고 있을 때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는 ‘가족 사이에서는 원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라고 얼버무린다.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흔히 신파극에서 등장할 법한, ‘왜 아빠는 나를 버렸어?’라고 묻거나 ‘아빠가 너에게 참 미안해.’라는 식의 답은 없다. 그저 쿨한 아빠와 딸의 관계이다.
둘은 아빠와 딸이라기보다는 삼촌조카 혹은 오누이 정도로 보인다. 실제 숙소 당구대에서 만난 젊은 오빠들이 아빠를 ‘오빠’로 착각한다. 그만큼 아빠가 미성숙하다는 시선이 반영된 것일 텐데, 그것마저 딸 혹은 감독의 관점에서는, 사춘기 소녀가 스스로 그만큼 성숙했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장치로 사용된다. 이러한 부분만으로도 이 영화가 모호성을 근거로 만들어진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저 커플은 아빠-딸이야, 삼촌-조카야, 오빠-동생이야, 아니면 애인 사이야, 도대체 무슨 사이야. 이 질문을 오지랖 넓은 한국 아재라면, 튀르키예 여행 가서 던져볼 만하다. 나라면 말은 못 하더라도 속으로 질문하거나 아내에게 귓속말로 물어볼 것 같다는 뜻이다.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대사가 아빠가 이미 또래 소년과의 딥키스까지 진도가 나간 딸에게 '아빠가 다 해봤으니, 솔직히 말해도 돼.'라고 말을 건넨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딸과 소년의 스킨십의 시작이 딥키스였을 뿐, 그 끝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딸이 혼자 숙소로 돌아왔는데, 아빠가 없어 잠겨버린 방문을 열 수 없으니, 뻘쭘하게 기다리는 장면이 다루어진다. 아빠의 의심은 숙소 데스크 직원에게로 향하겠지만, 실제 영화가 보여주는 초점은, 딸이 다른 방에서 두 남남 커플이 딥키스를 하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몰래 쳐다보는데, 아무런 놀람이 없다는 데 있다. 어떻게 해석하면 아빠의 걱정보다 딸의 성적 경험의 수위가 훨씬 높다는 데 영화의 방점이 있다. 아빠는 또래와의 이성애는 안심하면서도, 성인 남성으로부터 폭력적인 성경험에 대해서 걱정하고, ‘호신술’을 가르치며 ‘네 몸은 네가 지켜야 한다’를 강조한다. 그러나 정작 딸의 성 경험은 이성애를 넘어 동성애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2. 이 글이 동성애 자체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까닭에, 아빠도 게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다른 영화평에서 그 근거들을 클럽 장면을 중심으로 제시하는 편인데, 내가 볼 때는 ‘아빠가 다 해봤으니’라고 말한 그 장면 앞에서 남남 커플의 키스 장면이 나왔다는 점과, 아빠가 런던으로 떠나 만났던 애인 이야기나 카페사업을 함께 하겠다는 동료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아빠의 애인이자 동료가 왠지 남자이지 않을까 추정이 된다. 이 추론을 통해 아빠가 엄마랑 헤어진 까닭은 서로 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아빠의 동성애라는 성적 취향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아빠를 닮은 딸도 동성연애 현장을 목격하고도 아무렇지가 않았고, 20년이 지나 성인이 된 오늘, 결국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감독의 개인적 입장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이 영화는 동성애가 유전적 영향에 의한다거나 혹은 어떤 정신적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시 애프터썬 혹은 썬크림이라는 제목의 의미로 돌아가며, 앞서했던 말을 수정한다. 이제 아빠와 딸 사이 가장 높은 수위의 스킨십이 썬크림 바르는 장면은 아닐 테다. 아빠는 게이, 딸은 레즈비언이라는 전제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둘은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로는 설명이 안 되는, 아빠와 딸이지만 우정 관계를 지닌 특수한 남녀라고 볼 수 있다. 그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둘 사이 가장 높은 수위의 스킨십은 찐한 우정을 표현한 포옹 장면이 아닐까.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퀸의 노래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가 흘러나온다. 언젠가 앞선 밤에 딸이 아빠랑 듀엣으로 부르려고 어릴 때 즐기던 노래를 신청했는데, 웬만하면 모른 척 함께 나가면 될 걸 아빠는 끝까지 모른 체하고, 외롭게 딸은 음치-쇼를 펼쳐 보이고, 그 후로 아빠와 딸은 각자의 밤을 외롭게 보내게 되었다. 그걸 만회하고자 아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몸치-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노래의 가사와 그 노래에 몸을 맡기며 마구 쳐대는 아빠의 ‘마지막 춤’ 자체가 사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 전부라고 생각한다.
It's the terror of knowing what this world is about.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았을 때 밀려오는 공포)
And love dares you to change our way of caring about ourselves.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을 바꾸기를 요구하네)
This is our last dance.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This is ourselves.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야)
이 영화는 분명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다. 모호함을 견디면서까지 영화를 감상했음에도 이 영화가 차려주는 감정적 체험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테다. 나도 어쩌면 그 결핍이 주는 슬픔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공감하지를 못하는 편이다. 다만 그 결핍이 만들어낸 흔들거림 혹은 울렁거림만큼은 이해가 된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모호한 메시지를, 초점이 흔들리는 캠코더나, 꿀렁거리는 배 위에서 멀미가 날 것 같은 수평선이나, 해변에서 맴도는 패러글라이딩, 혹은 찌는 듯한 더위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지평선이나, 푸른 색 타일이 있는 수영장에 뛰어들어 헤엄치며 찍어대는 노란색 사진기, 결정적으로 푸른 색 하늘 위로 보이는 지중해의 노란 태양 같은 묘사로 전달하고 있다. 온천 장면에서 딸이 아빠에게 예언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가끔 하늘을 보며 우리가 같은 하늘 같은 태양 아래 있다는 걸 떠올려.’ 유치한 것도 같지만, 이 대사가 아빠와 함께 앞으로 딸이 겪을, 모든 세상살이와 그 고통에 대한 위안이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태양을 보느라 타버린 살갗에 바르는, 애프터-썬 크림인 셈이다.
세상은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통이고 상처다. 그래서 사람은 태어난 날마다 생일이라는 걸 기억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축하를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큰 슬픔을 준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진실이다. 아빠는 생일축하받던 날 밤, 딸을 재워놓고 아무도 모르게, 발가벗고 꺼이꺼이 자신의 존재 자체로 울먹였다. 마치 처음 태어나던 날의 모습처럼 말이다. 거기다 자기 존재가 다른 존재를 태어나게 만들었다면, 그 슬픔은 역설적이게도 기쁨이 되기도 한다. 그 진실이 참 삶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울렁거리고 출렁거리는 것 아닐까. 그 과정에서 아빠는 우울증을 앓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빠는 20년 전 그 여행이 끝나고 딸을 돌려보낸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정작 내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함께 했던 책 <한낮의 우울>에 대해서는 언급을 거의 못했다. 시편 91:6에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개역개정)라고 되어 있는데, 중세 종교에서 우울증을 ‘한낮의 악마’(Noonday Demon)로 불렀다고 전한다. “대부분의 악마들은 밤의 어둠을 틈타 찾아들며 그것들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곧 그것들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증은 눈부신 햇살 아래 당당하게 서 있으며 우리가 똑바로 보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다.”(482쪽) 영화의 배경이 영국에서 먼, 태양이 작렬하는 튀르키예인 까닭이 이해된다. 실제 감독이 아빠와 여행한 곳은 스페인이었다는데, 더 이국적이라 좋다.
이 영화를 보며 우울증에 대해 조금 깨달았다. 아빠가 이 대사를 말한 바가 있다. ‘근사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도 가라앉는 기분’, 그 대사 전후로 아빠는 튀르키예 특유의 문양을 지닌 고가의 카펫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아가 충동구매한다. 그 결과 딸은 카펫을 아빠의 유품으로 삼았다. 딸이 언젠가 아빠에게 묻는다. ‘내일도 신날까?’ 그렇게 하루하루 서로를 바라볼 때는 웃을지언정, 각자 혼자 있을 때면 우울하게 보냈던 여행을 마무리하며,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시켜 먹고,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 남긴다. 그 아이스크림과도 같고 폴라로이드와도 같은 마지막 여행과 마지막 춤의 기억은, 캠코더의 초점처럼 잠시 흔들리다가 굳게 닫혀버린다. 아빠가 캠코더를 끄고 문을 닫은 채 들어가 버린 이후로 말이다.
교사로 살며 해가 더할수록 공부해야만 할 것은 우울증이다. 학생과 그들의 가정을 만나며 이 정신적 어려움을 이해하지 않으면, 도저히 온전한 교사생활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꼭 고3 담임이라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가 자녀를 키우고 있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직도 내가 왜 이 영화와 이 책에 푹 빠져 지냈는지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그들의 가정과 함께 지내오며,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우울을 함께 경험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요즘 너무 햇살이 뜨겁다. 썬크림 안 바르고는 바깥에 나갈 수가 없다. 출퇴근 때마다 걸어 다니는 나는, 찐득찐득한 썬크림을 잔뜩 바른다. 하루하루 학교라는 직장을 오가는데도 힘이 든다. 남들은 그래도 학교 같이 편한 직장이 어디 있냐고 할 텐데, 나도 교사로서 인정한다. 그런데 그건 작렬하는 태양 아래 하루 종일 있으면서도, 아침에 한번 썬크림 발랐으니 괜찮잖아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어리석거나 속임수인 것이다. 교사로서 학생들과 만나며 그들 각자의 우울을 맞이하게 되고, 나도 우울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썬크림 꾸준히 발라줘야만 나도 겨우 살고, 학생들도 살릴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비유가 유치하지만, 썬크림은 ‘비포-썬’도 맞지만 ‘애프터-썬’도 무척 중요하다.
나의 학교도 곧 방학이다. 기말고사 전 마침 개교기념일이라 재량휴업을 했다. 나도 나의 자녀들과 평일 하루 놀고 싶어, 체험학습을 쓰고 롯데월드로 떠났다. 사실 그 주 내도록 감기로 끙끙 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하루 감기약 털어먹고 미친 듯이 놀고 나니까, 주말 싹 나았다. 사람의 마음과 몸은 참 신기하다.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롯데월드에서는 하루에 두 번 퍼레이드를 한다. 요즘은 계절상 삼바춤 추는 시즌이다. 나도 두 아들들과 함께 소심하지만 요령껏 아내의 눈치 봐가며 춤을 쳤다. 아들들이 처음에는 아빠를 부끄러워했다. 그래도 웬걸, 내가 뉘들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아느냐, 아빠는 이렇게라도 해야 뉘들 먹여 살릴 수 있고, 뉘들도 춤을 같이 추면 아빠는 기쁘겠지만, 뭐 어때, 언젠가 아빠의 춤을 뉘들이 이해할 날이 올 테니. 에잇, 모르겠다. 정신줄 놓고 하루 자녀들과 놀았더니, 참 좋았다. 삼바의 리듬과는 살짝 다르지만, 나를 요즘 버티게 하는 리듬이다. 움움바베 움움바베베!
* 참고 :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5점 만점 영화 ‘애프터썬’의 의문점 모두 해결해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lZgX6HD5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