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쉬어가는 글 + 영화평 07 <킹 오브 킹스> : 예수/나의 삶과 말
1.
내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다. 제목 말이다. 좋은 말은 끝도 없이 갖다 붙일 수 있다. 삶의 맥락, 생활의 발견, 언행일치……. 언젠가 나도 동양철학을 공부할 때가 있었다. 그때 '양명학'에 대해 들은 바가 있다. 조선이 성리학 때문에 일어섰지만 성리학 때문에 망했다 볼 때, 실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을 모두 남인으로만 볼 수 없는 근거로, 서인으로 볼 수 있는 북학파들, 북인으로 볼 수 있는 남명 조식의 제자들,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조선 양명학, 즉 강화학파 등이 있다. 내 고전 선생께서는 내 가문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직계조상 중 한 분이 양명학자였다. 조선에는 성리학과 실학만 있는 줄 알지만, 서학과 동학 이전에도, 이름도 없이 묘비도 없이 학문을 했던 양명학자들이 있다며, 참 훌륭한 어른을 둔 걸 감사하라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 듯하다. 양명학, 잘은 모르지만, 중국에서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가서, 메이지 유신의 근간이 되고, 오히려 역수출이 일어난 사상, 그 슬로건은 ‘지행합일’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언행일치’다. 아는 걸 표현하기 제일 좋은 것은 그 사람이 머리에 든 내용을 표현하는 ‘말’일 테다. 그리고 배운 사람은 그 말을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마련이다. 그 지식이든 말과 글이든, 사람의 행동, 즉 삶의 습관, 생활 자체, 그 욕망과 실천의 문제를 일치시키는 노력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또한 그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 구조의 변혁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의 앎이나 말과 글 자체는, 작다면 참 작고 보잘것없지만, 어찌 보면 그 앎과 말과 글은, 삶과 행동과 실천의 처음이자 끝, 즉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나 쉽지만, 내가 내 글을 반성하며 떠올린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글 전체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나는 왜 많은 미디어 중 영화를 선택하여 그것 하나하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까. 그리고 왜 ‘보이는 말들’이라는 이상한 타이틀을 만들었을까.
쉽게 말하면, 영화는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것 안에서 ‘들리는 말’을 알아차리는 게 보통 작업이 아님을 깨닫는다. 보이는 것은 움직이는 그림 혹은 영상, 들리는 것은 말 혹은 메시지일 텐데, 영화를 볼 때 그 작품 기저에 흐르는 말이 보이면 좋겠다는, 내 욕망의 표현인 셈이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말들’을 귀 기울여 ‘듣는’ 노력을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비평을 돌려서 말한 것도 같다. 그리고 마침 국어교사인 내 직업상 ‘언어’와 ‘문자’와, 그 기호체계로 만들어진 ‘문학’의 세계를 다룸에 있어서 최근 가장 중요한 화두인 ‘매체’, 즉 미디어로 선택한 장르가 ‘영화’라는 뜻도 된다. 신변잡기 같은 사족을 달면, 오랜만에 대학 강의를 맡게 되었다. 거기다가 연말에 학술대회 발표까지 무턱대고 신청했다. 내가 미쳤나 보다. 이 브런치 영화평 글쓰기와 내 강의와 연구가 어떻게 호환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바람에 여름방학 내내 힘들었다. 그래서 글을 못 썼다. 이제야 7~8월을 정리하며 끄적인다.
2.
제목에도 달았다시피 이 영화평도 내 삶이 담긴 글, 지행합일이 되어야 하므로 ‘신변잡기’를 좀 더 해보련다. 방학이 되면 글이 저절로 써질 줄로 알았다. 호기롭게 한 달 한 편씩 영화평 써야지 계획했던 게 수가 틀렸다. 앞으로 다룰 영화는 ‘언어’와 ‘문학’ 쪽으로 학술적 방향을 보여주는 작품일 수밖에 없다. 학교에 출근하고 학생들 수능 쳐서 대학 보내며, 저녁에 강의하고 육아하며, 교회 생활하고 이래저래 짬짬이 영화 보며 책 읽어, 어떻게 글을 쓸까 고민이다. 매번 긴 호흡의 문체로 단번에 읽기는 좀 힘든 분량으로 썼다는 것은, 스스로 알고 있다. 문제는 그 길이로 계속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번 글은 철저한 변명투성이인 셈이다.
글이든 말이든 영화든 퀄리티를 보장하는 것은 설득력이고, 그 힘의 근거는 보편성일 터이다. 보편성은 다른 말로 객관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신변잡기 글은 주관적이라 보편성을 잃게 마련이다. 어쩌면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작품만을 객관적으로 다루어야 할 텐데, 자꾸 자기 삶의 이야기를 끼어들게 만든다. 그러니 글을 쓰다 보면 작품과 함께 내 삶이 다루어진다. 물론, 작품만으로도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라면, ‘성리학’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성리학이 제 역할을 할 때는 동아시아가 중세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것을 ‘중화’의 미사여구라 비난할 수도 있지만, 서구 기독교 세계에 버금가는 보편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말과 글이, 지식과 학문이 보편성을 얻은 후, 교조와 독단으로 빠져버릴 때 매너리즘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내 삶도 그러한 것 같다. 이번 방학에는 그 매너리즘을 제대로 겪었다.
개학을 하고 교무실에 앉아 있으니 다양한 교과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대화하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융합은 대학보다 오히려 중등학교에서 잘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 수준에서 아주 깊은 것을 기대할 순 없지만, 아이디어 차원에서 가능성은 훨씬 많은 듯하다. 이번 글의 화두, 지행합일 혹은 언행일치를 고민하게 만든 계기는, 윤리 선생님이 학생과 생기부에 쓴 내용 중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를 놓고 대화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다. 결국 같은 유학인데 변별점이 뭐냐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성즉리’냐 ‘심즉리’냐 그런 식의 대화였던 것 같다. 세상의 이치라는 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본성’에 달려 있느냐,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마음’에 달려 있느냐. 내 글과 내 공부도 그 경계에서 늘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대개 우리 학계 분위기는 성리학적 전통이 강한 듯하다.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글쓰기는 학문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어찌 보면 나는 양명학적 성향이 짙다. 그러한 내가 또 강의를 하며 논문을 써야 한다니, 걱정이다.
3.
그러한 와중에 아들들과 방학 때 함께 본 영화가 있다. 딱 한 번만 본 작품을 바탕으로 영화평을 써본 적은 처음이다. 어쩌면 그 영화의 작품성 자체를 논하기보다는 그 영화를 보았던 나 자신, 그리고 나의 가정과 나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도가 분명한 셈이다. 신변잡기로 될까 봐 걱정이지만, 쉬어가는 글 편에서 다룰 이 작품으로, 결국 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 싶다. 나에게 기독교가 참 크다는 사실을 이번 글로 깨닫는다.
<킹 오브 킹스>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것은 신학적인 문제다. 외부적으로는 워낙 한국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이단 시비 때문이다. 최근 특검이 통일교와 신천지와 극동방송, 다시 말해 문씨 집안과 이만희와 김장환을 건드렸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 영화의 미국 배급사가 몰몬교 배경을 가진 ‘엔젤 스튜디오’라는 사실로 태클을 걸고, 이 영화에 기독좌파 혹은 일루미나티적 음모가 있다는 비판이 있다. 미국에서 몰몬교라면 한국에서는 신천지나 통일교와 비슷한 성격이다. 그 음모론에 바탕을 두고 영화의 문맥을 분석하면, 예수의 말씀보다는 예수의 이적만을, 즉 ‘말’보다 ‘행위’를 다루고, 예수의 부활로 나아가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에서 영화가 끝나며, 진리를 위해 싸우는 진짜 복음이 아닌 모호한 사랑으로 다가서는 값싼 복음이고, 그러다 보니 세상에서 외면받지 않은 채 상업적으로만 성공한 것이라는 식의, 비판의 논리가 펼쳐진다. 복음은 과연 ‘말’인가 ‘삶’인가.
이러한 비판을 염두에 두고, 감독은 저명한 목회자들의 신학적 검증을 받았음에도, 본인은 그저 평신도로서 비신자 제작진들과 함께 이 작품을 만들다 보니 생겨난 부족함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다룬 영화들은 워낙 많이 나왔지만, 이 영화가 찰스 디킨스 소설의 틀을 빌려 노렸던 작품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특히 아들 월터 디킨스 같은 어린 자녀 세대에게 처음으로 예수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성경 복음서 안의 이야기를 말씀 그대로 연결시켜 빠짐없이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그 말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행위나 이적보다는 말씀이 우선이라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복음은 생명을 주는 ‘삶’이지만, 또한 그 생명 혹은 삶이 ‘말’로 기록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까.
그러니 예수를 ‘처음’ 소개한다는 취지에서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러한 지점에서 예수와 주변 인물들의 대사, 즉 ‘말’ 자체에 덧붙여진 상상력에 대해 태클을 거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거라사 광인에게서 사탄을 쫓아내어 돼지 떼로 보낸 사건에서 ‘믿음을 보이셨다’고 언급한 부분이나, 십자가 도상에서 죄 용서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다 이루었다’고만 선언한 부분이 떠오른다. 텍스트로만 기록된 성경을 극적으로 각색하여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고 표정과 행동을 바탕으로 무대에 올리거나, 이렇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로 창작할 때, ‘말’이 ‘삶’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는 작업에서,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는 강조점 혹은 과장이 아닐까. 조직 신학적으로 따지면 불충분하고 위험하며, 따라서 이단적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초신자를 위한 영화라고 여긴다면 어떨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물론, 그 위험한 상상력을 허용하는 데서 이단과 사이비가 시작된다고 반박하면 더 할 말이 없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신앙 자체라거나 신앙의 첫걸음도 아닌, 오히려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재료가 된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 기독교의 코로나 이후 중요한 흐름이 무엇이냐 따지면, 자녀 세대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나가는 이유는 부모 세대 때문이며, 따라서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도 부모의 신앙이 전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큰 미덕이자 동시대에 던져주는 화두가 무엇인가 딱 한 마디로 정리하라면, 부모의 신앙을 어떻게 자식에게 전달해줄까, 즉 ‘말’을 해줄까다. 부모의 ‘삶’이 안 되는데 어떻게 말로 전달할 수가 있을까. 신앙은 사실 '위대한 유산'처럼 물려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어디까지나 자식은 부모에게서 영향만을 받을 뿐, 신앙은 오롯이 스스로 경험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장르가 ‘애니메이션’이 된 것도 같다.
4.
이 차원에서 이 영화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예수의 생애>의 작가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라는 사실과, 이 영화의 한국어 더빙 배우가 비그리스도인인 이병헌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둘 다 정통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을 남성상이기 때문이다.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는 일중독에 빠져 있지만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는 아빠로 그려지는데, 현실에서의 그는 끝내는 불륜을 저지르고 조강지처 캐서린 디킨스와 이혼하는 말년을 보냈으며, 이병헌도 우리가 모두 그의 미친 연기력은 인정하지만, 그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해, 아내의 지대한 헌신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바이다. 이러한 남편이자 아빠가, 본인도 믿지 못하거나 믿는다고 해도 삶으로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복음에 대해, 자녀에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니. 복음은 과연 ‘삶’인가 ‘말’인가.
어쩌다가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제자들 중 스승과의 친밀함을 가장 깊게 경험한 사람이다. 요한의 복음서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1:14)라는 구절이 있다. ‘말’ 그 자체가 고스란히 ‘삶’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예수뿐이다. 그를 따르는 제자로서 요한은 그 ‘진리’를 경험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거나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같은 구절은 공관복음과는 조금 다른 관점과 문체를 지녔는데, 내 입장에서는 참 시적이다. 동양철학과 연결한다면, 진리, 즉 이치가 본성에서 오느냐 마음에서 오느냐의, 틀에 갇혔지만 어쩔 수 없는, 이 학문적 질문 앞에서 ‘삶과 말이 일치된 나를 경험하는 것만이 진리다’라고 대답하는 것만 같다. 진리는 경험하는 것, 인격을 경험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그 경험으로 나는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 경험에 방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방법은 그 인격을 경험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러니 방법이란, 즉 길이란 예수, 그 자체인 것이다. 복음이 삶이면서 곧 말이 되는 진리인 까닭이다.
5.
이 글에서 나는 우문현답을 한 셈이다. 이 성어에는 ‘어리석은 질문에 대한 현명한 답’이라는 뜻도 있지만, ‘우리의 질문에 대해서는 늘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슬로건도 가능하다. 개학을 하고 두려움이 크다. 고3 담임이라 수시입시 앞두고 상담을 했고 생기부를 이제 마무리했다. 왜 이렇게 여름방학 때 이 짓을 하기 싫어 쩔쩔 맸는지 모르겠다. 결국 다 해내기는 했다. 그러면서 예전, 특히 3년 전 담임할 때 자료를 훑어보게 되었다. 그 시절도 고3 담임하고 저녁에 대학강의하며, 심지어 공모전에 붙어 책 쓴다며 원고와 씨름하고, 나도 아내도 직장 다닌다고 몇 개월 어머니 도움받으며 두 아이를 키웠던 그 시절, 지금 봐도 어떻게 이렇게도 정성스럽게 생기부를 썼을까 스스로 놀라웠다.
결코 잘 썼다는 자기자랑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절 자료 미련없이 버렸다. 그리고 지금 왜 생기부를 못 쓰는지 깨달았다. 자기기준에 미치지 못하므로 아예 시작도 못했던 것이다. 이건 완벽주의와는 좀 다르다. 상황이 바뀌었고, 나는 조금 늙었다. 우리 부부는 그 시절을 후회하며, 다시는 부모님께 아이 육아 부탁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둘이 휴직을 번갈아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우리 아이를 잘 못 보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우리가 그렇게 돈을 벌어봤자 시간은 시간대로 돈은 돈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낭비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외에는 조건이 같다. 다시 대학강의를 의뢰받았고, 출판사와 계약이 파투 난 묵혀둔 원고도 다시 꺼냈다. 발표를 통해 학계에도 한번 나가보려 한다. 그런데 나는 그새 3년간 늙어버렸고, 우리 아이들은 놀랍게 자라가고 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모든 것을 예전처럼 완벽하게 잘 해낼 자신이 없다. 물론, 그 시절이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지금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만 같다는 강박 때문에 그렇다. 아무래도 이제는 너무 열심히 살면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야 그나마 일도 공부도 시작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스스로 자기기준 내려놓는 게 이렇게도 어렵구나 싶다. 이게 되어야만 내 삶의 우선순위가 다시 잡히리라. 내 두려움의 문제는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어리석은 삶 가운데 답도 없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을 마무리하련다. 삶은 살면 살수록 두렵기만 하고, 인생에는 질문만 있을 뿐 답이 없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으로 살아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영화를 계속 보며 보이지 않았던 말을 듣고자 시도하는 노력처럼, 내 삶에서도 보이는 말을 듣겠다면서 갖은 애를 썼다. 기도라면 기도, 말씀이라면 말씀, 공부라면 공부, 글쓰기라면 글쓰기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이다. 모두 삶을 담아낸 말과 글인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신의 말을 듣겠다는 시도인 셈이다.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쫓거늘"(요 1:37)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장면은, 월터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에게 드리겠다며 물을 뜬 잔을 들고가다 엎질러버리는 대목이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사실 요즘 내 삶이 그렇다. 엎질러진 물잔 같은 느낌. 그리고 그 경험을 나의 자녀들도 하고 있다. 그 아파하고 슬퍼하는 자녀를 곁에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할까. 결국 예수님의 구원에는 우리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물 한 잔도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나의 자녀를,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것을 경험하는 자에게만큼은 구원이 값없이 주어진다. 아빠로서 선생으로서 '지행합일'의 삶을 살아야 할 근거가 나에게는 없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서학으로 옮겨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내 고백이다. 내 삶은 엎질러진 물잔처럼 '신변잡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게 내 삶과 말의 전부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