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

잊어도 있고... 잃어도 있고... 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는...

by 닥터 로

“통, 통, 취르륵. 박스아웃! 리바운드! 여기! 여기!”


하늘은 푸르고 실바람은 불어와~ 노래가 흥얼거려질 법한 쾌청한 날이었고, 나무들은 잎들을 제 몸 색으로 바꾸거나 떨구고, 풍광은 빨갛고 노랗게 노을을 닮아 가는 계절이었다. 단풍이 짙은 홍대 운동장 귀퉁이 농구 코트에서는 몸풀기 5:5 여자들의 농구가 한창이다. 경기에 참여하지 않은 몇몇은 코트 주변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아직 오지 않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쯤인지 묻고 있는 이들도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엔 언뜻 불량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는 세상 선한 한 무리의 담배쟁이들이 있었다. 분주한 듯, 호젓한 듯, 각자 무언가를 하고는 있지만 스무 명 남짓 되는 모두의 머릿속에는 오늘부터 새로 모시게 될 프로 선수 출신 코치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농구로 데워진 열기에 기대감의 열망에 코트 일대의 온도는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이때, 누군가 소리쳤다.

“저 분 아냐?”

“꺼낸다! 저거 농구 가방 맞지?”


별로 기대하는 내색도 안 하던 R은 팀원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눈을 돌렸다가 그만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농구 코트 쪽 운동장 끝 주차장, 검정색 각진 SUB 차량의 트렁크가 열려있고, 언뜻 미소년처럼 보이는 고운 얼굴의 호리호리한 사람이 신발 주머니와 옷가지를 챙겨 더 큰 가방에 옮겨 담고 있었다. 순간 바람이 살랑 지나며 R의 머리칼은 얼굴을 반쯤 덮었다 넘어갔다. 그 순간 저 사람이 팀에 오시는 코치님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R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리만치 작게 저 차에 타고 싶다는 운명적인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어랏! 농구공은 안보이는데~ 우리 코치님이 아닐지도 몰라~”

“오신다! 이쪽으로 오신다!”


스물다섯 명의 여자들에게 그날은 신세계가 열린 날이었고, R과 O는 25:1로 이렇게 처음 만났다. O는 은퇴하고 맡은 첫 팀이라며 현역이 아니어서 고사할까 생각도 했었다며 자신을 낮췄지만, 가르치는 재주가 출중하고 엘리트 체육을 한 이의 전문가적 포스와 유쾌한 카리스마,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까지 모든 것이 넘쳐 흘렀다. 그 날의 코칭이 끝나고 함께 한 술자리에서 R이 내복을 입는지 묻지 않았더라도, 고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해도, 첫사랑과 O를 매치시키지 않았더라도 R과 O는 연결될 운명인듯했다. O도 무언가에 홀린 듯 내복을 입는지 물었던 R을 마음에 담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팀에 연락을 취해 R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는지 물었다. 공교롭게도 밖에선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팀에는 O가 R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소문이 났고 첫눈 오는 날 O와 R이 만나 불꽃처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소설이 완성되어 회자 되고 있었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R은 천우신조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며, 어린 시절 학교 가기 싫어 땡땡이쳤던 날 폭설로 휴교령이 내려졌던 그때의 황홀함을 떠올렸다.


그때 그 시절의 R과 O는 세상 빛나는 드라마 킹과 퀸 같았고, R과 O를 오래도록 알아 온 지인들의 축복과 염원 속에서 Happy ending이 예견된 소설의 내용을 채우듯 반짝이는 날들을 보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도, 몸과 마음의 건강함도, 사랑과 존경으로 충만한 안정과 평온 속에서 퍽 행복에 겨웠지만, 여느 드라마나 소설이 그렇듯 R과 O의 삶의 책장에도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함, 때로는 막장도 있었다. 하지만 또 여느 드라마나 소설이 그렇듯 R과 O의 관계의 운명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붉은 실 같았고, 그도 아닌 경우에조차 맥락 없이 극적으로 해결되기도 했다. 결론이 정해진 드라마나 소설처럼 운명적이고 숙명적이었다.


R과 O의 대부분 사랑의 충전과 고난의 해결에는 매년 계절마다 찾는 제주도가 등장한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사슴과 눈이 마주쳤던 장면도, 하트 모양 돌덩이에 초콜릿 색 진흙 범벅 등산화로 포개 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도, 진달래 대피소에서 꿀 맛나는 컵라면을 먹는 장면도, 관음사 탐방로의 약수로 1년치 갈증을 날려버리는 장면도, 한라산이 보이는 호텔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장면도, 이호테우 해변의 모래밭에 모든 것 내려놓고 파도가 씻어가길 기다리던 장면도, 세상에서 제일 싸지만 황홀한 잠자리인 절물 휴향림 텐트에서의 캠핑 장면도, 제주 맥주 공장에서 퀴즈를 맞춰 경품을 죄다 타던 장면도, 특별히 이름 붙인 니모섬이 보이는 해안가 야외 수영장을 가진 호텔에서 은밀했던 장면도, 바다 속 물고기 구경하느라 등이 익어 엎드려 잘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밤의 장면도.


R과 O는 그날도 겨울 한라산에 올랐다. 겨울엔 등반이 허락되지 않는 날도 허다했지만, R과 O에겐 단 한 번도 그런 날이 없었고, 심지어 궂은 날에도 늘 백록담을 보여주었다. 운이 좋은 것이겠지만 R과 O는 하늘이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한라산 등반에 이력도 생기고 자신은 있어도 베테랑이 되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산은 겸손하게 올라야 하고 항상 낯설고 익숙해지는 법이 없으며 오를 때마다 같은 길을 가지 않고 날마다 모습이 다른 게 산이라는 것을 알기에. 백록담을 내려다보며 그날엔 이선희의 인연을 하나의 이어폰으로 한쪽씩 꽂아 함께 듣고 하산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한라산을 오를 수 있을까?”


뇌리에 남았는지 “인연”의 가사를 조용히 부르던 O가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나와 당신 중 어느 하나라도 잡은 손 놓지 않는 한 영원히…”


R은 확신에 차 음흉하게 말한다.


“R~ 당신 방금 미져리 같았어…”


R과 O는 이렇게 다음 한라산을 기약하며 이호테우로 향한다. 지나가던 행인이 함께 서보라며 R과 O의 투샷을 멀리서 찍어 준다. 숱하게 제주를 여행했지만, 희한하게도 전신이 다 나온 사진이 이게 처음인 걸 R도 O도 미처 생각도 못 했었다.


“이 사진은 목판에 프린팅해서 집에 가져가자”

“그래 좋아”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너는 나의 봄 속에 핀 꽃 같다는 카페에서 하루를 마칠 때의 일이다.

O는 그간의 마음고생 시킨 일 때문인지 염치없어하면서도 수줍은 듯 물었다.


“넌 이런 나를 아직도 곁에 두고 싶어?”


R은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향도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R의 눈동자는 빗방울 맺힌 창문을 투과해 하얀 가로등을 응시한다. 그래도 이내 무슨 말이든 할 것 같았는지 O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침묵을 견디기로 한다. R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혼자만의 미소를 짓고 있다. O에게는 사뭇 길었을 테지만, R에게는 적당했을 시간이 지나고서 R은 O의 턱에 머물던 손을 감싸 내리며 스르르 미끄러지듯 깍지를 낀다.


“이깟 이유로 한 번 잡은 손 놓지 않아. 난 네가 어떤 풍광을 여행하고 돌아와도, 돌아오기만 한다면 한 손에는 그리움, 다른 한 손에는 기다림의 긴 팔 뻗어 오는 내내 가로등이 되어 줄 거야.”


O는 고개를 떨궈 R이 들여다볼 수도 없게 자신의 팔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R은 알 수 있었다. 눈물 많은 O가 눈에는 물이 흐르고 입술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옆으로 길어져 떨고 있으리란 걸. O와 R의 깍지 낀 손은 37.5°C 정도로 미열이 있었고 땀이 살짝 난 상태였다. O는 손가락을 다 폈다가 더 깊이 깍지를 끼며 R의 손을 고쳐잡는다. R도 동맹을 맺듯 같은 힘을 주어 꽉 잡으며 결연하진 않지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화답한다.


“바보. 아직도가 아니라, 여전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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