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현 "나랑 놀자"
발 아래로 물결만 보였습니다. 케이블카에 종현이와 단 둘이 있었습니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종현이의 앞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을 보고 있으면 감정이 울렁하고 올라왔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그 감정을 얼굴로 올려 보내면, 그 표정을 본 종현이가 말합니다.
“유혹하지 마.”그가 커다란 남자의 손을 뻗어 제 두 눈을 가립니다.
여행을 싫어하는 저였는데 남자 친구와 휴가 날을 맞춰 부산 여행을 떠나왔습니다. 심지어 그 여행 계획을 제가 세웠답니다. 종현이가 케이블카를 타고 싶다고 말하면 그 케이블카가 부산 송도 해수욕장 근처에 있으며 바닥이 투명 유리로 되어 있는 형태가 될 것이라는 건 제가 결정했습니다. 종현이가 여행하는 틈틈이 사진을 찍어 소셜 미디어에 자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가 즐거워하는 구나 알아차립니다. 둘이라서 떠나왔습니다. 혼자였다면 부산에 오자마자 아무 카페에 들어가 공부를 했을 겁니다.
성인이 되기 직전엔 입시 공부를 했고 대학 졸업 하기 직전엔 자기 계발을 했습니다. 명절마다 가족을 보러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속상해하면서 저를 매정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이 매해 있다보니 어느 날에 저는 철창만 없을 뿐 서울에 갇혀 버린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발적 감금 생활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땐 성적을 올리려고 노력했고 대학을 다니면서는 돈을 벌려고 노력했으니까요. 그 사이사이에 인생의 터닝 포인트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최저임금 받던 제가 최저임금의 두 배를 받게 되었던 날에는 온 세상이 저를 개조하려고 드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유튜버가 ‘업계에서 사용하는 120개 용어. 무조건 암기’가 제목인 동영상을 올렸고, 취준생들이 모이는 시험들이 일주일마다 열렸고, 마치 AI가 쓴 것 같은 평가가 우편 봉투에 담겨 집으로 왔고, 봉투에 적힌 점수는 삼 개월 동안 절벽처럼 곡선을 그리며 가파르게 상승했습니다. 단기간에 고득점 취득이라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취는 그렇게 달성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날 아침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면 그렇게 어지러울 수가 없답니다. 자아에 문제가 생겼거든요. 그날은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치우는 일마저도 청소하는 기계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어서 과자를 먹고 컵라면을 먹고 한강 트레일로 나가 미친 듯이 달리다가, 다시 월요일이 되면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새로운 시험을 찾아다녔습니다.
종현이는 그런 저한테 “나랑 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내가 어떻게 놀 수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답니다. 그런데 종현이와 한가하게 케이블카를 타는 날이 생각보다 금방 왔습니다. 여행이 싫었지만 집에 앉아 한심하게 텔레비전만 보고 배달 음식만 먹는 연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막상 나오고 나니 손을 잡은 이 사람과 더 먼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에서 제주도로,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하지만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생명을 바쳐 번 돈을 종현이에게 쓰기엔 아직 그를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 만난 지 이제 한 달이 되었어.”
“그렇지 않아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어! 어제가 바로 내가 연락처를 물어본 딱 한 달이잖아.”
“넌 우리가 함께 여행을 떠나 오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 안 했어?”
케이블카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손을 꽉 잡고 그 이상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현이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종현이는 제 눈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습니다.
“했지. 하지만 내가 아는 홍나무라면 어디든 좋은 곳으로 데려와 줄 거라고 믿었어.”
연애라는 시스템이 저를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종현이 몰래 공부를 하는 일이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져 부산에 올 때 책 한 권 가방에 넣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일정표는 먹고 마시고 관광 상품에 올라타는 일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일정을 표로 정리해 동료 사원에게 전달하듯 PDF파일을 전송했 건만 끝까지 종현이는 그 표를 열람하지 않았습니다. 종현이 입에서 “너 P 아니지? 완전 J인데”라는 말고 말했을 뿐, 표를 참고해 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지로 팀을 이끄는 사람은 누나인 저였습니다.
아직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려준 적 없는데도 우리는 누가 봐도 특별한 사이처럼 놀았습니다. 어떨 때저는 그 말이 뱉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종현이는 반대로 무척이나 신중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겁이 났습니다. 저는 딸처럼 동생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사람이었고, 종현이는 이 다음 해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1년 안에 장거리 커플이 될지 몰랐습니다.
“너 이러다 나랑 결혼해.”
제 말에 종현이가 킥킥 웃었습니다.
“정말인데….”하고 억지로 힘을 주어 미소를 만듭니다. 케이블카가 왕복 여행을 마치면 버스를 타고 감천문화마을로 이동하게 됩니다. 감천문화마을도 종현이가 가고 싶었던 관광지였습니다. 제가 남포역 근처 유명한 관광지들을 하루 안에 밀어 넣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는 모를 겁니다. 이러려고 수능 수학을 공부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까다로웠습니다.
종현이가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어 제 이마를 툭 쳤습니다.
“또. 또. 결혼 생각.”
저는 토라진 얼굴로 케이블 카 자리에 앉았습니다. 종현이가 다가와 저를 꼭 안으며 어깨에 고개를 묻었습니다. 저는 흰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 상한 마음을 달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