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본성과 양육 (지윤이 이야기)
1장. 본성과 양육 (지윤이 이야기)
그런 방식의 정보 수집에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모든 정보의 출처가 환자들 개개인의 말과 행동이었기 때문에, 망상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눈에 지윤이는 성적으로 문란한 아이일 수 없었다. 오히려 대한민국 평범한 사람들처럼 초등학교 때부터 남학생들과 분리된 생활을 해서, 27살 될 때까지 이성과 접촉하지 못한 아이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지윤이는 굳이 “바람아. 이거 비밀인데. 나 성병이야.”라고 하고 다니며 오해를 샀다. 지윤이는 동성인 나랑 같이 샤워할 때도 내 시선이 제 벗은 몸에 닿는 걸 못 견뎠다. 심지어, 자기가 먼저 샤워하자고 해놓고, 샤워실에 들어간 3분 만에 날 변태로 몰며 쫓아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을 해석하자면, ‘내 소중한 몸을 네가 쓰레기처럼 훑었어.’였는데, 이런 그녀가 섹스했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녀가 섹스가 끝날 때까지 성욕에 도취한 남자의 시선을 못하리라는 건,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가설을 세웠다. 과거의 어느 날 귀한 딸이 남자 아이들과 놀지 않길 바랐던 부모님이 ‘너 남자애들 잘못 만나면, 성병 걸릴 수 있어.’라고 지윤이에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어느 날 접촉 사고처럼 남자와 손을 잡은 일이 생겼다. ‘엄마 어떡해? 나 성병 걸리면 어떻게?’하다가 정말 스스로 성병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너무 급진적인 가설을 세웠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며칠 후, 505호 병실을 같이 썼던, 매력적인 할머니에게서 이 모든 에피소드들을 꿰뚫는 키워드를 들었다. 지윤이는 피해망상 같았다.
지윤이는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그런 지윤이가 세상에서 가장 많이 편지를 쓴 대상은 아버지였다. 내가 그 병원에 있던 동안 지윤이가 내가 있던 505병실로 옮겨 오는 일이 있었다. 지윤이 쪽에서 내가 지윤이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에 505호로 오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그때 지윤이의 소지품을 옮겨 주면서, 그녀가 서랍 속에 담아 둔 편지들을 읽었다. 편지지보다 색종이에 쓴 것들이 더 많았다. 대부분 아버지 잘못했어요. 보고 싶어요. 하는 내용들이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이렇게 사랑하는 지윤이가 그를 가정폭력으로 신고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이것이 지윤이와 함께 살고 싶었던 아버지가 그녀를 강제 입원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지윤이에 따르면, 그녀가 아버지를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했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여기로 지윤이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아버지 역시 지윤이를 사랑했다. 그는 지윤이가 병원의 공중 전화기로 거는 전화를 잘 받아 주었고, 언제나 편의점 빵과 우유를 지윤이에게 보내주었으니까 말이다. 정신질환 증상 중의 하나인 피해 망상은 이렇게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 놓았다.
지윤이의 이야기를 슬슬 정리해보겠다. 나는 나와 그녀를 위하여, 이 모든 기억을 과거로 흘러 보내려고 한다.떠나면서 나는 지윤이에게 “병원은 널 낫게 해주는 곳이고, 너는 여기 갇힌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사회로 나와야 해.”라고 말했는데, 지윤이에게 그건 내가 대치동에 들어가는 일만큼 힘든 일일지 몰랐다. 내가 퇴원하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지윤이를 추억하는 것은 내가 못하는 일을 지윤이에게 해내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아. 나 꼭 사회로 나갈 거야. 맞아. 병원은 날 낫게 해주는 곳이야. 치료 받고 나갈게.” 지윤이가 말했다. 지윤이의 한쪽 눈은 나를 바라보려고 노력할 수록 흰자를 드러내며 뒤쪽으로 굴러 갔다. 대문니에서 오른쪽 뺨으로 펼쳐져야 하는 이빨들은 모두 발치를 해서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나, 빈 방에 홀로 누워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하지 못하고 허약할까.’라고 하다가 지윤이의 처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이렇게 타고난 것이 많고, 할머니부터 엄마, 아빠한테 받은 것이 많은데 가진 것을 잘 활용해 보자기는 커녕, 더 받아야 했다고 떼를 쓰고 있다니 말이다. 만약, 대치동에 가고 싶은 지금의 바람이 내 꿈이라면, 내가 꿈꾸는 삶이 나에게 영원히 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맞는 자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찾아 내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될 수 있다면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한 사람이 못 되더라도 행복할 것 같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험 공부를 하는 중임에도, 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어 이렇게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3월 20일부터 3월 23일 사이에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 꼭 그때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