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쫓아가다 사람을 잃었습니다.
다이어트의 충격파는 하루아침에 일어났다. 한 남자는 읽었으나 존재를 감추었고, 다른 한 남자는 어제 종일 내 생각을 했다며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따사로운 햇살이 차창으로 흘러 들어오던 점심 버스 안에서, 불현듯 죽고 싶어졌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차마 죽진 못하겠고, 3주간 이어왔던 다이어트라도 포기하고 싶어졌다. 이성을 찾을수록 그 모든 재앙이 다이어트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존재를 감춘 그 남자는, 나를 꼭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던 그 남자는, 지하철이 나를 싣고 멀리 떠나보낼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던 그 남자는, 사랑이 식은 사람처럼 질문 하나 던지지 않았다.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어제 나와 헤어지고 종일 내 생각을 했다는 남자는 영어 토론 모임 운영진이었고 오랜 고민 끝에 강퇴 경고를 나에게 내리기로 했다고 밝혔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였다. 다음은 강퇴라고 했다. 읽고 씹는 거 나도 할 수 있는데, 읽고 씹고 반신욕까지 즐기고 나서 추스른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오래 참지 못하고 답장을 해버렸다. 내가 우리는 연애 상대로 맞지 않으니 연락을 그만하자고 말했고 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잘 지내.
또 다른 남자에게는 그런 조치에 이견이 없다고 말했다.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일주일만 쉬다 오겠다고 했다. 마음을 정결하게 회복해서 돌아오겠다고. 말한 후, 그와 주고받은 장황한 말들을 톡방과 함께 지워버렸다.
환골탈태에는 그만한 충격파가 있다. 부모님의 위대한 유전자와 엄마 집밥으로 타고난 몸을 바꾸겠다고 했으니 신이 노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했을 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내가 다이어트 때문에 예민 보스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게 뭐? 다이어트하면 성격 나빠진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할 수도 있는데, 생명에 위독할 정도가 되기도 했다. 나는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어 기분조절제를 찾기 위해 찬장을 뒤졌다. 한동안 건강해서 먹지 않고 비상약처럼 보관하던 약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약이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자 엄마는 당장 병원에 연락해 예약을 잡으라고 했다.
이 모든 일들이 다이어트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첫째, 먹는 것을 줄이면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우리 몸이 굶주리면 각성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같은 인지적 실수를 반복하면서 불안도가 높아진다.
둘째, 설탕과 밀가루를 식단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먹는 것을 줄여도 폭식으로 이어진다. 두 재료의 칼로리는 별로 높지 않지만, 먹는 순간 식욕을 폭발시켜 다음 음식을 끌고 온다. 그러나 설탕과 밀가루를 뿌리친다는 것은 거리에서 대놓고 유혹하는 식당들과 전부 연을 끊겠다는 말과 같다. 소위 먹는 행복이 일상에서 사라져 버린다. 날씬한 행복이 그 자리를 채울 테지만, 그건 백일 동안 쑥을 먹어낸 곰들만의 이야기다.
나를 떠난 첫 번째 남자는 그가 평소에 햄버거를 좋아해도, 나와는 특별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다음 데이트에는 샐러드를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데이트로 샐러드를 먹자고 누가 말하고 싶었겠는가. 하지만 그러지 않고 5주 동안 7kg을 빼는 것이 불가능했다. 목표 날짜까지 10일 남은 지금에 와서 분명해졌다. 일반식 두 끼만 먹어도 5주 동안 만든 몸이 없어졌다.
셋째, 먹는 것이 줄면 힘도 준다. 손가락 까딱 못하고 부엌 바닥에 누워 있곤 했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라 그런 날이 자주 왔다. 다이어트 시작 전만 해도 4시간을 걷고, 10km를 달리며, 50분 전신 타바타를 하던 내가 운동은커녕 출근도 못하겠어서 택시를 잡았다.
목표 날짜까지 10일 남은 지금은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지만, 초기에는 또 죽고 싶었다. 내가 나약하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주변 사람 모두에게 다이어트한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물에 빠진 잠자리처럼 한심한 모습으로 부엌 바닥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날 영어 토론에서 나는 그런 압박감 때문에 기분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모임에서 사람들은 직업과 하는 일로 자기 소개하곤 했는데,저는 요즘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사람입니다.’하고 관심사로 나를 소개했다. 자기 얘기만 늘어 놓고 대화할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비쳤을 것이다.
강퇴 경고 조치에 힘을 실은 그 남자는 조직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었다. 대인관계에 원만하면서, 포용력과 차분함으로 만인의 호감을 사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사람을 내가 고뇌에 빠뜨렸다.
사람 간의 관계를 유리잔에 비유한다면, 두 개 이상의 유리잔이 깨졌다고 할 수 있었다. 데이트 상대야 버리면 그만이라지만 관심사로 가입한 모임 운영진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 사람을 버리면 깨져버릴 유리잔들이 서너 개는 더 있었다. 만약 내가 실패해서 그것들을 다 깨버린다면, 영구 손상된 잔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면,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꽤 많은 사람들이 경고 조치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을 때, 모임과의 끈을 그냥 놓아 버린다. ‘저 사람들과 나는 맞지 않아. 그래 어디 날 잘라 봐. 나라고 너희를 못 자를까? 내가 너희를 벤(ban 차단)하는 거야!’하고 씩씩 거리면서 새 모임을 찾아 떠난다. 그들과 모임 간에는 법적인 계약도 없고 금전 관계도 없다. 갈수록 쉽고 빠르게 관심사와 성향이 맞는 사람끼리 친목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철새들의 인구가 늘고 있다.
하지만 철새가 되는 순간 당신이 상류 사회로 진입하는 일도 같이 사라진다는 걸 아는가. 특히, 나를 처벌할 명분이 저들에게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참으로 관대하게 잘못을 뉘우치고 개선할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 차는 거라면 내 곁에 복들이 사라진다고 한들 억울한 일이 아니다.
이 말에 느낌이 잘 안 잡힌다면, 이 점을 생각해 보자. 영어 토론 모임에는 어느 쪽 사람들이 있을 것 같은가. 한쪽은 부르주아이다. 다른 한쪽은 보헤미안이다.
토요일 아침 열 시에 카페 세미나 실에서 영어로 된 경제 신문 기사를 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카페가 또 여의도 근처에 있다. 어쩐지 주식 투자 하는 전문직들이 모일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이 곧 상류 사회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그건 그 모임에서 내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웃고 대화할 수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토론 모임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두 차례 더 사과를 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분노 때문에 고생했던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씨는 운영진에게 힘든 스타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요주의 인물로 찍혀버린 건 오래갈듯했다. 그것이 서운했지만 서운함을 내비칠 순 없었다.
장문과 장문을 주고받던 대화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저쪽에서 나를 용서했다. 나는 다이어트가 끝나고 컨디션을 회복해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먹구름이 걷힌 것이다. 나는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포기하지 않은 대가가 유리잔 하나라면, 나 잘 싸운 거 아니냐고. 겨우 이 정도로 깨질 부실함이라면 가만히 있어 대도 깨졌지 않았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