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짜리 보고, 20년짜리 현실
국내 최대 제약사 중 한 곳에서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개의 계열사와
본사의 사업부문 일부를 묶어
신사업 부문을 구축하는 자리였다.
제2세 경영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
당시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부회장님을 직접 만났다.
1년 안에
신사업 인큐베이션을 끝내고,
스핀오프해서
직접 사업을 끌고 나가
글로벌 회사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대기업의
서로 다른 세 개의 신사업을 통합해
글로벌 사내 벤처로 키운다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
그는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실은
처음 들었던 이야기와
전혀 달랐다.
세 가지 사업 모두,
실제 진척과 전망은
보고서 속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 가지 사업은
제품 개발이
언제 끝날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사업은
특수한 재료가 필요한 구조였는데,
생산 인력은 단 한 명.
그마저도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재료 공급이 막혀 있어
생산 확대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세 번째 사업은
그나마 생산이 시작돼 있었지만,
심각한 품질 문제가 불거져
민사와 형사 소송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도
보고서는 달랐다.
모든 사업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첫해 예상 매출액은
각각 수백억 원.
세 개를 합치면
1천억 원에 가까웠다.
허구와 현실이 다르더라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판매 가능한 제품에 대해
글로벌 유통과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개발과 생산이 막힌 사업에는
재료 공급의 물꼬를 트는 대안을 마련하면
살릴 여지는 있었다.
그는
“하고자 하는 곳에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
스무 명이 넘는 팀원들과 함께
전력을 쏟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결국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제품도, 시장도 아니었다.
사내 정치였다.
현실을 반영한 전략적 제안은
회의실의 긴 테이블 위를 몇 바퀴 돌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허한 메아리로 사라졌다.
본사의 관계 임원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서로 충돌하는 의견들이
끝없이 보고서에 얹혔다.
특히
초기 기획의 허구를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은
번번이 묵살됐다.
시간이 갈수록
사내 정치는
더 깊어지고,
더 두꺼워졌다.
최종 결정권자인
부회장님께 직접 보고를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여러 겹의 덮개가
귀를 막고 있었다.
그는
두세 차례 보고를 마친 뒤
확신했다.
최종 결정권자의 귀는
더 이상 열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씌워진
그 몇 겹의 덮개는,
외부에서 갓 들어온
임원 하나의 목소리로는
뚫을 수 없었다.
그는
다섯 달 동안 준비해 온
글로벌 사업 전략과
국내외 파트너십 기회를
모두 내려놓았다.
그가 다섯 달을 통째로 건너온 끝에 얻은
가슴 쓰라린 교훈은 단순했다.
기업 성장의 가장 암적인 존재는
실패한 전략이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조직 내부의 정치라는 것.
현명한 리더라면
사내 정치를 없애야 하고,
그럴 수 없다면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너머의 현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2000년대 말의 일이다.
1년 안에 가능하다고
보고된 매출과 성과의 숫자는
20년이 다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빨리 가겠다는 선택이
결과적으로 훨씬 느린 길이 되었다.
만약 그때
그가 세웠던
속도보다 방향을 중시한 전략이 실행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오래전에
그 지점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은
20년이 걸려 만들어진 현재보다
훨씬 더 탄탄한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해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