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묻던 날, 길을 찾던 나

by Coo Lee

어느 날, 초등학교 2학년 딸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내가 잘하는 게 뭐야?”

“아직 어려서 그런 건 몰라도 괜찮아.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답했지만, 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잠시 후, 딸은 다시 물었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자기가 뭘 잘하는지 알고, 뭘 하고 싶은지도 알았다면서.
그런데 왜 난 아직도 모르겠는 걸까?”

그 질문 앞에서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천천히 떠올랐다.


논과 산, 그 사이에 펼쳐진 밭이 그의 세상 전부였다.
거기서 자란 소년에게 농사 말고는 다른 삶이 없었다.
중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농사를 짓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그는 농사에 재능이 없었다.
논농사도, 밭농사도 그의 손에선 번번이 엉망이 되었고,
부모의 인내심마저 시험에 들 정도로 서툴렀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 그것은 농사꾼의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막연히 듣기만 했던 ‘대학’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눈앞의 가능성처럼 다가왔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사관학교라는 선명한 목표를 품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공부할 수 있는 무료 교육과 숙식,
그리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영예.
그것은 가난한 시골 소년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

3년 내내 그는 오직 그 꿈만을 향해 달려갔다.
학교 선생님들 모두가 그의 목표를 알 정도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하지만 2차 시험, 신체검사 결과.
‘축농증.’ 단 한 단어가
3년간의 노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그 순간, 발 밑이 꺼져 내리는 듯 어지러웠다.
숨조차 막혀와,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모든 길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햇살은 여전히 환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어둠의 늪에 잠겨버렸다.


집안 형편상,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다행히 다른 대학에서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기에
진학은 했지만, 꿈을 잃은 마음은 방황을 멈추지 않았다.
자존심은 상처 났고, 세상은 원망스러웠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은 그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결국 그는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떠나기로 결심했다.
며칠 뒤, 어머니 앞에서 마지막처럼 선언했다.
“자퇴하겠습니다.”

그 순간, 막을 수 없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눈물로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 엄마의 마지막 소원이다. 자퇴 말고… 휴학으로 해 주면 안 되겠니?
혹시 모르잖니, 인생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엄마는 더는 해줄 게 없다. 그저 부탁한다. 자퇴 말고… 휴학으로 해 다오.”
그 말은 애원이자 명령이었다. 그의 마지막 남은 끈.

그도 눈물을 삼킨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끝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복학하지 않으면 자퇴나 다를 게 없으니까.’


원양어선을 타려면 소개비가 필요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건설현장으로 나갔다.
노동은 상상보다 훨씬 거칠었다.
며칠만 일해도 온몸이 쑤셨고, 일거리는 늘 불안정했다.

이삿짐 센터, 식당 서빙, 당구장 알바….
떠도는 삶이 이어졌다.

분식집 배달을 할 때는
손님들의 싸늘한 시선과 무시에 지쳐 일을 그만두었고,
공장 조립라인에서는
하루 종일 나사만 조이며 기계처럼 살아야 했다.
그의 손끝은 나사를 돌렸지만, 마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기계였고, 영혼은 갈 곳을 잃은 빈 껍데기였다.


그 무렵, 병무청에서 징집 영장이 나왔다.
징집 영장이 나오자 그는 공장을 떠났지만,
막상 입대하려니 마음은 복잡했다.
‘장군을 꿈꾸던 내가 이등병이라니….’
결국 그는 입영을 연기했다.

다시 건설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몸과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그의 시간은 정처 없이 공허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제안이 찾아왔다.
동네 아주머니가 고등학교 3학년 딸의 수학을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생애 첫 ‘과외.’
학생이 이해하는 순간마다 맑은 기쁨이 솟아올랐고,
가슴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작은 불빛 하나가 서서히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아는 것을 전해주는 일만으로도 정중한 대접을 받고, 보람을 느끼며, 돈까지 벌 수 있었다.
땀 흘리는 일이 전부인 줄 알았던 세상에,

지식과 펜이 또 다른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삶 속에서 체감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재능에 맞는 길이 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잃어버린 나침반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는 결국 복학을 선택했고,
그 길 위에서 지금의 자신으로 걸어올 수 있었다.

돌아보면, 어머니의 눈물 어린 한마디,

“휴학”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마련해 준, 아들이 제 길로 돌아올 수 있었던 끈이었다.


그는 딸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젠가 딸에게도—
자신만의 길을 여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임을.

그리고 아버지로서 조용히 기도했다.
그 길이 덜 외롭고, 덜 아프고, 조금 더 따뜻하길.
무엇보다, 늦지 않게 딸의 앞에 찾아오길.
마치 어둠 속 작은 불빛이 그에게 다가왔던 그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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