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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이 Feb 14. 2024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한 디스토피아

플랜 75(2022) - 주관적인 영화 리뷰

※ 본 리뷰는 '플랜 75'(2022)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왓챠피디아


근래 가장 섬뜩했던 포스터

귀신 얼굴 나오는 포스터보다 이게 더 무섭다.

그리 멀지 않은 근미래. 초고령화 사회로 인해 잇달아 나오는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일본 정부는 75세 이상의 고령층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안락사 지원 프로그램 '플랜 75'를 발표합니다. 반대가 적지 않았지만 결국 플랜 75는 합법화되고 관련 맞춤 정책들과 민간 기업들, 사회 인식 등 많은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됩니다.

78세 나이로 명예퇴직을 하고 플랜 75 신청한 카쿠타니 미치(바이쇼 치에코),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의 상담 신청을 받게 된 플랜 75의 상담 공무원 오카베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플랜 75의 콜센터 담당 나리야마 요코(카와이 유미), 플랜 75 이용자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스테파니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까지, 이제 여러 인물들이 플랜 75의 이면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작품의 포스터는 현실감 넘치면서 섬뜩한 작품의 콘셉트를 깔끔하게 담아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필자가 근 몇 년간 본 포스터 중에 가장 무서운 포스터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플랜 75'(2022)가 장편 데뷔작입니다. 아마 필자를 포함한 대중들에게 낯선 이름일 텐데요. 사실 하야카와 감독은 이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제작한 '10년'(2018)에서 '플랜 75'를 단편으로 감독한 인물입니다.

'10년'(2018)에 나온 '플랜 75'는 단편인만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묘사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작품은 감독이 원하던 이미지를 확장하고 더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봐야겠습니다. 그런 만큼 필자는 리뷰의 기본 골자가 될 플랜 75의 자세한 설정을 설명하고 리뷰를 진행하겠습니다.




플랜 75는 무엇인가

플랜 75를 홍보하는 공익 광고가 소름 끼친다.

 플랜 75는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안락사 지원 프로그램이며 본인의 의사에 따라서 언제든 신청 및 거부가 가능합니다. 신청 즉시 10만 엔(한화로 대략 100만 원)의 지원금이 지급됩니다. 지원금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사용 가능합니다. 거리 곳곳에는 플랜 75의 공익 포스터와 홍보 설명서가 존재하며, 정부는 노인들에게 친절한 상담센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물과 '플랜 75'(2022)의 다른 점은 세계의 비윤리성과는 별개로 정부 정책이 철저하게 개인을 존중하고 친절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뒷 단락에서 더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가겠지만 플랜 75는 얼핏 인권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인권을 말살하고 있는 모순적인 법안입니다. 특히 제도에 적응한 시민들이 가족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가볍게 죽음을 고려하는 부분은 묘한 불쾌감을 줍니다. 덕분에 필자는 작중 등장하는 따뜻한 휴머니즘과는 별개로 보는 내내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현실 같은 디스토피아

이 암울한 사회 분위기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지금 한국을 생각하면 작품의 설정이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많은 관객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작품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공감대와 맞닿아 있는 현실감입니다.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가가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설정은 어찌 보면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독재 국가도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비인륜적인 법이 통과된다는 전제부터가 소재의 자극성을 노린 것이 아닌가 염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설정의 작위성, 자극성과는 별개로 작품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합니다. 정부는 정책을 홍보하고, 뉴스에서는 플랜 75를 통한 경제적 이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국민들을 세뇌하는 방식은 다른 디스토피아 장르에서도 흔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절제되어있는 광고와 소품들은 묘한 현실감을 줍니다. 이렇게 사회 전반에 스며든 플랜 75의 모습은 주인공들의 소박한 일상을 통해 더욱 돋보이며, 빈민층 노인이 사회에서 쫓겨나는 과정 역시 현재 사회와 다르지 않기에 작품이 사회고발물로 보일 정도입니다.




청년과 노인, 모두 절망한 사회

모두가 죄악감 속에서 병들어 간다.

 플랜 75 시행으로 고령화 사회에서 벗어난 젊은 세대들은 이제 행복할 수 있을까요? 논리적으론 노년층 문제가 해결되었고 경제적 효과로 일자리까지 생성되었다면 남겨진 자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작품은 이론적인 가정과는 다른 현실을 보여줍니다. 자발적인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청년들과 또 다른 약자들의 마음은 죄악감으로 가득하다는 묘사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부조리를 제시합니다.


플랙 75의 독특한 지점은 이 부분이기도 합니다. 노년층을 희생시키는 방식 수혜를 받아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끔찍한 아픔을 준다는 겁니다.

비인간적인 법안을 운영함에도 청년들은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사로운 이야기를 시작으로 밥을 먹으며, 추억을 공유하고 또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노인들의 삶을 마주한 청년들은 노인들을 가족이나 친구 같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온전히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을 자각합니다.

친절함으로 포장되어 있던 플랜 75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전화 상담원들을 교육하는 장면에 이르러 절정에 이릅니다. 무심함에서 시작된 비인간성이 요코가 카메라를 바라보는 장면을 통해 깊은 후회와 슬픔의 감정으로 치환되는 인상적인 장면입니.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은 청년들의 슬픔이 노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청년들의 슬픔은 사회와 자신에 대한 절망과 후회의 감정을 대변합니다. 이는 피해자 보다,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을 죽이는 악인이 된 모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노인 미치가 주역인 장면들 역시 노인들을 약자이기에 동정해야 되는 존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고령의 나이 때문에 고생하는 장면은 있을지언정 고통이 아닌 절망스러운 분위기에 주력해 그녀를 표현합니다.

작품의 또 다른 약자이자 외국인 노동자인 마리아도 자국인한테 맡기기 싫은 시체처리반을 맡았고, 가족을 위해 돈이 급하다는 묘사가 있지만 불쌍한 인물이 아닌 죽음을 대하는 윤리성에 고민하고 흔들리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피해자들의 권리를 강화하려는 작품에서는 종종 피해자를 동정적인 시각으로 다루곤 합니다. 이런 시각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지만 남용될 경우 피해자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는 위계 관계를 무의식 중에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노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세심한 각본의 힘이 잘 보입니다.


다만 청년층의 아픔을 건드린 것치고는 일부 캐릭터들의 비중이 지나치게 적고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죽음 앞에서 물질적 가치를 고민하는 마리아의 이야기나, 덧없는 눈처럼 뒤늦게 플랜 75를 후회하는 히로무의 결말은 인상 깊지만 인물들의 이야기가 다소 파편화되어있고 요코의 이야기는 히로무와 합쳐도 무방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러모로 단편을 확장하려다 보니 이야기의 밀도가 아쉬워지는 부분입니다.




살인과 플랜 75의 본질

플랜 75는 자의로 신청할 수 있지만, 이건 자의가 맞긴 할까?

 플랜 75의 모순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질문하겠습니다. 노약자들을 학살하는 것과 죽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요?

작품 초반, 관객들은 살인마가 공익을 명분 삼으며 노약자들을 학살한 현장을 보았습니다. 분명 이 살인마는 공익을 내세워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누가 봐도 본질은 약자들에 대한 화풀이 불과 하단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품 후반 관객들은 플랜 75를 실행하는 커다란 건물 안에서 노인들을 단체로 안락사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2가지 살인의 결정적 차이는 합법 여부입니다.


혹여 누군가는 플랜 75는 결국 자의로 선택하는 것이니 살인이 아니라 정당한 법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법률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을 청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중 미치는 78세 나이로 명예퇴직을 당합니다. 부양해 줄 가족이 없는 그녀는 계속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지만 고령의 그녀를 모두 부담스러워하며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살고 있던 집도 철거될 예정인데, 일자리가 없는 그녀는 집도 구할 수 없습니다.

한편 공무원인 히로무는 거리에 쫓겨난 노인들이 벤치에 누울 수 없게 벤치 가운데 설치할 손잡이를 정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상담소를 세워 오갈 데 없는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눠주며 플랜 75 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 플랜 75를 통해 화장되는 유골들은 한 곳에 모아 인장 하거나 쓰레기와 동물의 인분을 처리하는 업체에 보내기도 합니다.


이들의 행위는 부당한 가스라이팅입니다. 사회에서 용도를 다 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희생, 행복한 죽음이라는 말장난으로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을 종용하고 있는 겁니다. 고, 중산층은 그나마 가족과 경제적 여유가 있기에 선택의 여지가 있지만 불행한 삶밖에 남지 않은 빈민층들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래라면 그들을 지켜주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지원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고, 이를 막는 것이 국민들의 역할입니다.

플랜 75라는 제도의 근원은 공익을 강조하며 노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의 공감대입니다. 그리고 그 공감대가 만든 제도는 노인들에 대한 끔찍하고 거대한 화풀이에 불과합니다.




죽음에 가치를 부여하면 인권은 사라진다

희생, 행복한 죽음 같은 건 인권 앞에선 말장난이다.

 플랜 75의 상담원들은 행복한 죽음을 앞세워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유합니다. 실제 현실에서도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빈민층 노인들의 죽음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죽음을 행복하게 꾸미는 것도 하나의 구원이 될지 모른다고 미치는 생각 합니다. 그리고 플랜 75를 실행하러 가는 길을 햇살이 포근하게 감싸 안아줍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마주한 죽음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차가운 건물 안에서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죽어가는 노인을 본 미치는 진짜 죽음의 공포를 느낍니다. 결국 미치는 스스로 시설을 뛰쳐나옵니다. 구름 사이로 빛나는 햇살을 보며 그녀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느낍니다.


분명 미치의 미래는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삶을 긍정하는 미치의 모습은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권리가 얼마나 고결한 건지 느껴집니다.

본디 어떤 과정을 거치든 죽음은 인생의 마침표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무조건 삶을 연명하라는 대책 없는 낙관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치가 있건 없건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지니는 것, 인권은 그런 겁니다.




재앙은 내일이 되어서 온다

사람이 죽어야만 행복해지는 세상에 인권이 있을까?

 기대에 비해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어쭙잖은 대사로 주제를 전달하는 작품들 사이에서 '플랜 75'는 미장센을 통해서 주제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오히려 누구다 다 알법한 인권의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다룬 만큼 대사로 주제를 살렸다면 작품이 순식간에 촌스러워졌을 겁니다.


작품은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회는 종국에 인권을 잃고 만다는 디스토피아 장르의 성격을 잘 활용했습니다. 플랜 75란 비인간적인 법은 상상의 영역인 만큼 쉽게 제정될 수 없겠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이미 많은 국가들이 여러 명분을 앞세워 본래의 의도를 숨기채 국민들을 학살한 전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숨겨진 의도와 사회적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유롭고 단단해져야 합니다.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주관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가 부당한 일을 할때 그걸 막는게 국민의 역할입니다.

어쩌다 보니 영화의 현실감에 취해 경각심을 앞세워버렸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의의는 경각심을 주는 부분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부디 플랜 75가 먼 미래,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사람의 공감대가 모여 이루어지는 국가적 재앙은 항상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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