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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티너디 May 30. 2022

방관자의 역할

영화 <매스>를 보고

영화 전체적인 줄거리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철조망에 묶여있는 리본처럼, 파고들지만 붙잡을 수 밖에 없다. 생존하기 위해 위태롭게 잔존한다. 살갗을 뚫고 침투하는 감정은 아물 수가 없다. 


감정이 아물기 위해선 매듭을 풀어야 한다. 하지만 바람이 그것을 어디로 데려가는 지 알 수 없기에 두렵다. 세찬 돌풍이 그것을 아스라이 조각 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어찌할 지 모른 채 바라보기만 한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어오고, 우리는 매듭에 다가간다. 조연은 그들을 위해 멸균된 공간을 제공한다. 정갈하게 준비된 평등의 십자가 아래에서 그들은 대화를 한다. 시간과 회환의 딱지 아래에 들러붙은 상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진물이 나는 상처 사이로 자기 변호와 가정들이 침투한다. 


평등하고 정갈했던 공간은 균형을 잃었고 핏물이 울컥거리며 쏟아져 방을 어지럽힌다. 방향을 잃은 분노는 시간을 넘나들며 희생양을 찾아 파도 친다. 방향을 잃고 표류한 그들을 붙잡은 것은 상처의 밑바닥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통이다. 


상처가 생긴 이후로 그들의 삶을 뒤흔들 만큼 고통스럽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 뼈가 튀어날 정도로 쥐고 있던 기억이다. 상처를 봉합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서로의 상처를 벌려 안쪽에 손을 넣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매듭을 찾는다. 


서로를 이어주는 고통의 매듭을 풀며, 엉켜있던 두 부부는 개별의 존재로 나아간다. 수술이 끝났다는 것을 알리며, 그들은 멸균된 방을 나선다. 이젠 바깥에서도 상처를 드러내며 매듭을 떠나 보내는 미사를 지낸다.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5년 전에 읽었던 책에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솟구쳐 압도하는 감정의 파도 앞에서 나는 한숨과 묵념으로 위태롭게 지탱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조연들은 층의 분리를 통해, 우리는 스크린의 막에 가로막혀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떠내려가는 중, 사유의 발치에 돌부리가 걸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폭발하고 분출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줄 뿐이다. 임계점을 넘어 영구 파손된 감정이 날뛸 수 있는 멸균된 여유를 시간에 상관없이 제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아물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견뎌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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