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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티너디 Jan 29. 2022

그 해 우리는 정확하게 사랑했을까

‘정확한 사랑의 실험’으로 하는 ‘그 해 우리는'와 ‘너의 모든 것’리뷰

청명하고 상쾌한 ‘그 해 우리는’와 끈적하고 텁텁한 ‘너의 모든 것’,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까?

새하얗고 부드러운 우유를 끈적하고 들쩍지근한 홍차에 들이 붙는 것은 아닌가. 두 드라마의 감상이 이리저리 섞인 밀크티를 내버리는 착오를 범한다. 유리잔의 벽면을 타며 울컥거리고 뒤틀리는 무늬들을 보며 나는 되뇌었다. 나는 이걸 원했던 것일까? 이번엔 두 드라마의 주인공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본다.

그 해 우리는, 2021 (좌측) 과 너의 모든 것, 2018 (우측)


 “나는 이걸 원했던 것일까?”


정통적인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확하게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을 정확하게 원하는지 모른다. ‘그 해 우리는’의 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것에 집중한다. ‘연수’는 일에, ‘웅’은 복수에 집중한다. 하지만 ‘너의 모든 것’의 주인공인 ‘조’는 정확하게 욕망을 원한다. 자신의 욕망은 한 치의 의심과 숨김도 없어야 한다. 세상은 여주인공을 감추고 가로막는 무대 장막일 뿐이다. 이제 작가의 세상은 두 드라마의 주인공을 이야기의 출발선에 세운다. ‘그 해 우리는’에서는 다큐멘터리고 ‘너의 모든 것’에서는 ‘스토킹’이다. 그러면 언제 달리기 시작할까? 그에 대한 추측은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 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너의 모든 것’에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안과 밖으로 끊임없이 발산한다. 안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망상이나 스토킹으로 인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나타난다. 밖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상대방의 욕망과 부딪힌다. 자신의 욕망과 합치하면 섹스를, 대립되면 살인을 한다. 일례로 여주인공과 ‘조’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한다.


‘I think you’re thinking what I’m thinking.”


그러곤 짧은 섹스가 시작된다. 이 드라마에서 살인과 섹스는 본능적인 대화 수단이다. 좌절된 욕망에 이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는 사람들은 주인공 곁을 떠난다. 그리고 극단적인 사람들만 주인공과 엮이게 된다. 자극적인 욕망은 현실의 텁텁한 공기에 나오자마자 산화하고, 주인공은 끊임없이 밝게 빛나는 욕망을 구현화할 대상을 찾는다. 반면, ‘그 해 우리는’에서 대부분의 주인공은 처음에 사람을 욕망하지 않는다. ‘연수’는 사회에서의 생존, ‘웅’은 사람이 없는 건물 그림과 혼자만의 새벽, ‘엔제이’는 건물, ‘지웅’은 환경 다큐를 욕망한다. 역설적이게 이들이 욕망하는 것들이 얽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은 ‘너의 모든 것’을 포함한 다른 드라마와 비슷하지만, 그 과정에서 움직이는 주체는 내부에서 기인한다. 쉽게 말해 로맨스에서 주로 쓰는 ‘어쩔 수 없이’라는 과정이 최소화 되었고 이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2-30대의 우리 중 사회의 압박과 프레임을 무시하거나 견디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덕분에 이 드라마는 주인공의 감정에 집중하며 밝은 톤을 유지한다. 다만, 주인공의 묘사가 덜한 초반에는 이야기를 설득시키는 원동력으론 부족하다. 그래서 현실에 그나마 발을 디딘 ‘연수’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끌어오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주인공이 추구하는 방향은 처음의 것과 달라진다. 외부의 상황이 ‘조’를 끊임없이 압박하며 주인공을 막는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처럼  ‘너의 모든 것’에서는 주인공의 시선은 점점 욕망의 대상보다 그 주위의 장애물들에 집중하고 파괴하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이 주인공이 표현하는 관심은 잔혹하게 단순하다. 집중하는 것은 추적하고 미행하며, 파괴할 뿐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조’는 장막을 걷고 나아가지만 향하는 대상은 ‘너’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에 집착한다. 욕망의 대상이 일그러지며 왜곡된다. ‘그 해 우리는’에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은 피사체와 그에 투영된 사람에게 차례로 다가간다. ‘엔제이’의 경우엔 건물을 묘사한 그림-그림을 제작한 ‘웅’로, ‘지웅’의 경우엔 ‘피사체에 비친 연수’- ‘피사체의 모델이 된 연수’로 시선의 방향이 나아간다. 두 인물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화면’을 통해 사람들과 마주하며, 화면을 넘어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하지만 좌절한다. 그리고 사랑을 성취하지 못 한다. 이런 공통점은 14화에서 ‘지웅’과 ‘엔제이’가 밥을 먹는 신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연수’와 ‘웅’은 프로젝트 진행과 자신의 자존심의 도구로써 서로를 바라본다. 이들은 상대를 통해 상처 주고 받은 자신을 지키는데 집중한다. 그 관심이 상대에게 향한다고 느끼는 순간 화면 밖으로 도망치고 회피한다. 서로 만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전에 각자 디디고 있던 것을 떠나 보내야만 하고, 그게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아가지 못 하는 이들을 위해 이야기는 물리적인 고립을 통해 감정의 퇴로를 차단하고 서로를 바라보게 만든다. 퇴로를 차단하는 곳에서 ‘연수’, ‘웅’, ‘지웅’, 그리고 후배 PD ‘채란’ 등 모든 인물들이 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깨닫는다. 그들이 표현하는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 다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구절을 인용하겠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런 내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 그리고 감히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나의 진실을 은폐하고 너의 진실을 훼손하지 않았는지 두렵다. 아마 나는 실패하리라.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하려는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관객들은 적당한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실패를 원하거나, 아예 실패가 없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원한다는 것은 현재 유행하는 웹툰과 웹소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너의 모든 것’은 전자를, ‘그 해 우리는’은 후자를 선택한다. 중반부에 대부분의 갈등과 실패를 짊어져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은 ‘지웅’이다. 온몸으로 작품의 무거운 주제를 표현하는 ‘지웅’이 작품의 색채와 동떨어질 수 있지만, ‘연수’와 ‘웅’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유리되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가 스포일러를 원하는 것은 아닌 지 생각하고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마음산책, 2014




종국에 ‘너의 모든 것’과 ‘그 해 우리는’의 주인공은 서로 예상하지 못 한 지점에 도달한다. ‘웅’은 과거와 같이 해외로 나가는 ‘연수’를 생각한다. 주어진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완전히 같지도, 반대 되지도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연수’를 믿고 존중하며, 그전까지 끈질기게 붙어있던 친부모에 대한 미련을 해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웅’을 따라가지 않기로 한 ‘연수’도 달라졌다. 이전엔 현실에 묶여 아무 것도 버릴 수 없던 자신을 혐오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이번엔 ‘연수’는 현실에 묶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래서 기다린다. 역설적이게도 ‘연수’ 할머니가 부양에 대한 마음의 짐을 확실하게 덜어줌으로써 ‘연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연인의 사랑을 얻지 못 한 ‘지웅’과 ‘엔제이’도 바뀌었다. 그들은 자기에게 결여되었던,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원하던 것과 대면한다. ‘지웅’은 ‘웅’의 친구와 그의 가족이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친어머니를 대면한다. 평생 카메라도 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없던 것처럼 항상 ‘지웅’은 누군가의 역할로서 카메라 뒤에 숨어왔다. 마지막에는 카메라 앞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16화에서 지웅은 선배에게 “그래도 끝까지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할 사람은 남은 사람일테니까.”라는 말을 듣고 휴먼 다큐를 진행하기로 한다. 이 선택도 오로지 ‘지웅’ 자신을 위해서 한 결정인 것을 나타낸다. ‘엔제이’도 ‘웅’의 그림에 대한 비평과 뒤이은 말로 ‘나와 비슷한 최웅’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마주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이 사랑한 것을 정확하게 알며 나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반면 ‘너의 모든 것’의 주인공은 과거에 했던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목을 잡는다. 시즌 2의 결말에서 ‘조’는 자신이 선택한 죽음마저 얻지 못 하고 결혼을 한다. 남에게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갈구하던 ‘조’는 결국 시즌 3에서 여주인공의 끊임없는 감정의 폭발에 삶이 휘둘리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주체성을 잃어버린 삶에서 ‘조’는 바람과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삶에 대한 왜곡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반란은 주체성을 이미 넘겨받은 여주인공과의 갈등을 촉발할 뿐이며 끊임없이 상황은 악화된다. 시즌 3 2화에서 부부상담사가 [’우리’라는 말은 사랑을 가장한 상호의존적인 단어예요], [목표가 자녀일 순 없어요.] 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지만 두 주인공 모두 어느 것도 따르지 못 한다. 결국 서로에게 익숙한 극단적인 대화수단으로 주체성을 강탈하는 것으로 시즌 3가 끝난다. 동화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에게 안식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젠 마지막으로 ‘정확한 사랑의 실험’의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 은유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성장은 살인이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먹어 치우고, 그것으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운 다음, 삶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을 (실제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떠난다.]


P.S 하지만 ‘너의 모든 것’의 서사가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 ‘조’의 1인칭 시점에 여러 감정을 느끼며 서사를 따라간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사의 힘에 압도된다. 세상의 어떤 판단체계로도 포착할 수 없는 조의 ‘사랑’을 믿게 되며,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그것만으로 ‘너의 모든 것’의 서사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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