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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티너디 Sep 03. 2021

MBTI 명함을 만들어드립니다.

공대.너드.감성

‘MBTI 명함을 만들어드립니다.’


이 사업 아이템이 떠오르자마자, 직장 탈출의 실마리라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이미 MBTI 유형별 디자인 명함이 있었다. 몇 년마다 오는 천금의 기회를 놓친 나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오후 12시의 주식 그래프를 보는 것처럼, 늦었지만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슬쩍 쳐다본 뒤 다시 고개를 저었다.

기원전의 별자리에서 탄생한 ‘인간분석학’은 혈액형을 넘어 MBTI로 부활했다. 칼 융이 남긴 수많은 심리학적 업적 중, 인지도 면에선 무의식의 빙하와 쌍벽을 이루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아이디어만 제공한 것이지만, 우리의 식 범위까지 다가온 칼 융의 이론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MBTI 공개는 일련의 카드게임처럼 진행된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MBTI를 포커의 마지막 패를 공개하듯 서로 공개한다. 그 후 동물들이 서로의 냄새를 맡듯, MBTI 성격의 장단점과 궁합을 맞춰가며 나와 이 사람은 평생의 동반자인지, 실루엣만 보이면 전투태세를 갖춰야 할 가문의 원수인지 확인한다. 일면부지의 개인들을 서로 앉혀놓고 만족할 만한 토크쇼를 선보여야 하는 소개팅에선, 독창적이지 않지만 무난하게 대화를 이끌어갈 미원 같은 존재다. 이런 가십 거리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분야,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활용된다.


그러면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 형태와 가짓수만 바뀐 ‘인간 분류학’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참 모순적이다. 한없이 독창적이고 싶지만 비슷한 사람들끼리 이뤄진 집단에 속해있지 않으면 우울해진다. 나의 모든 감정을 알고 위로와 공감을 받길 원하지만, 타인이 자신의 행동과 표정에 대해 분석 하고자 하면 마음 경비경이 걸쇠를 서둘러 잠그길 마련이다. 하늘을 가리키며 유아독존을 꿈꾸지만, 발바닥 아래에 늪이 없으면 시들어 버리는 존재다. 이런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붙잡는 연근이 ‘인간 분류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연잎에 맺힌 이슬처럼, 우리의 자화상은 바람과 햇볕 한 소끔이면 사라져 버릴 정도로 가냘프다.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산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우리는 우주에 내던져진 티끌과의 차이점을 찾지 못 하고 고독을 부유할 것이다. 비교할 것이 없어진 극한의 독창성은 결국 더 포괄적인 집단에 속할 뿐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그런 본능적인 고독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이자, 삶을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인간 분류학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자세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개인의 독창성과 소속감을 동시에 챙겨주는 기묘하면서 영민한 타협책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단순한 유사과학이라며 매도하기에는 너무 영민한 전술이며, 인간의 고독감에 맞서 함께 삶을 지탱해나갈 인류사의 오래된 동반자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에는 8가지 정도로 줄였으면 좋겠다. 감퇴된 기억력이 16가지를 외울 수 없을 것이다. 내 2번째 두뇌인 클라우드 시스템이 더 똑똑해지길 바랄 뿐이다.       


책 추천: 밀턴 H. 에릭슨,  시느니 로젠, 『밀턴 에릭슨의 심리치유 수업』, 문희경 옮김, 어크로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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