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엔젤레스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버스는 선착순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줄이 끊겼다. 역무원은 자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다음 버스는 언제쯤 오냐고 물었고 한 시간 뒤에 온다는 대답을 받았다.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여자도 버스를 타지 못 했다. 뭔가를 잘못 알아들었거나, 원래 이 도시는 그런 곳인가보다 싶었다. 정류장의 온도는 건조했지만 따뜻했고, 나는 항의 할 수 없는 외국인 여행자였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몸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지 알고 있었다.
나는 캐리어를 벽에 걸쳐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라스베가스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 때까지 라스베가스에 대해 아는 바가 아예 없었다. 옆 좌석에는 그녀가 앉아있었다. 나는 입꼬리는 한껏 올리고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저는 라스베가스로 가요."
"저도 라스베가스로 가요."
이미 그녀가 라스베가스로 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저 말을 붙이기 위해 하는 의미없는 말이었다. 버스를 기다리기 심심하니 그 때까지 수다라도 떨자는 마음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손을 마주 모은 채로 물었다.
"여행으로 가세요?"
"아니요, 동생이 라스베가스에 있어서 보러가요. 여행 가시나봐요?"
운이 좋았다. 인터넷으로 찾을 수 없는 여행지와 식당을 물어볼 수 있었다. 차나 밥을 얻어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물었다.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사진 하나라도 찍을까요?"
사진을 찍고 보내준다는 핑계로 연락처를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진은 싫어요. 어딘가에 제 기록이 남는 게 싫거든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SNS 계정을 물었지만, 전화번호 이외에는 SNS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길게 늘어진 속눈섭 사이로 갈색과 검은색이 뚜렷하게 나뉜 눈동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곱슬머리와 두터운 입술이 그녀가 라틴계 민족이라는 확신을 줬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었고,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에밀리아 로즈예요. 로즈라고 불러요."
버스가 오기 전까지 나는 그녀에 대해 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걸 알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녀의 가방에 달린 '별 헤는 밤' 열쇠고리에 대해 묻고, SNS가 사람을 병들게 만들어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하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쯤 버스는 벌써 도착해 있었다. 다음 버스는 사람이 거의 타지 않았다.
"옆에 앉아도 될까?"
나는 그녀 옆에서 가방을 고쳐 매며 물었다. 줄 서느라 못 다한 이야기를 빨리 이어가고 싶었다. 로즈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는 글을 쓰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글을 잘 쓰지 못 하지만, 쓰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때 썼던 내용이라고 부끄러운 듯 말했다.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빵을 만드는 빵집이었어."
소설은 결말까지 다다른 후에 그녀의 가족 이야기로 넘어갔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델이 자신의 언니였다. 언니가 일찍 나가기 때문에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그녀는 밤에 잠이 안 올 때 책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취미였다. 로즈는 책장에 빼곡하게 꽂혀진 영화에서 아무 영화나 골라 보며 밤을 주로 보냈다.
"우연찮게 로맨스 영화를 집었을 땐 항상 울었어. 거기에 남자친구가 있거든."
사막에 어둠이 검푸르게 뒤덮이기 시작할 때 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만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비디오를 보고 난 후, 그녀는 12살부터 꾸준히 자살을 시도했다. 2년 후 약물 자살에 실패했을 땐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전에 만났을 때 키스했는데, 약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났대."
그녀는 제임스를 거기서 만났다. 처음 만나 것은 아니었다. 로즈는 제임스를 한 달 전에 축제에서 봤고 키스를 했다. 입원실에서 제임스를 다시 만났을 때, 로즈는 그에게 그 기억이 나냐고 물었다. 그는 약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달간의 입원 치료가 끝나고 로즈는 그와 데이트를 시작했다. 한 달간 짧게 사랑한 그는 헤어진 후 1주일 뒤에 자살했다.
"모르핀 중독이었어. 두 번 정도 심장마비가 왔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5년이 지났다. 5년 동안 그녀는 어떤 남자를 두 달간 만났다. 남자가 떠나고 2주 후, 이번엔 그녀가 자살을 준비했다. 그녀는 꽃무늬 드레스를 입었다. 침대에 누운 채 펀치 잔에 약을 가득 담았다.
"약을 먹는 게 너무 싫었거든. 그래서 하나씩 삼켰어."
로즈는 컵에서 약을 꺼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약을 먹을수록 모든 것이 어두워지는데, 가운데 있는 빛만 커지더라고. 발 아래를 보니까 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빛이 있는 곳엔 자살했던 그 친구가 수트를 입고 있었어. 그를 보자마자 세게 끌어 안았는데, 걔는 나보고 살아야 된다고 하더라고."
그는 빛에서 그녀는 어둠에서부터,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약이 담긴 유리잔을 던지고 울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어서 웃었다. 그것이 로즈의 마지막 자살시도였다. 그녀의 마지막 남자친구를 만난 것은 그렇게 다짐한 후 2달 후였다.
"그 애는 정말 타이밍이 안 맞았어. 최고의 남자친구였거든."
그를 만났을 땐 시간이 얼어붙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손이 닿는 부분부터 세상이 멈추기 시작했다. 그와 있을 땐 금색 원이 퍼져나가며, 원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얼어버렸다.
"미쳤다는 거 알아. 미친듯이 아름다웠으니까."
로즈는 매일 그를 생각했고 그와 영혼이 연결되었다고 느꼈다. 그와 있던 시간이 그녀에겐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제일 오랜 시간동안 사귀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년 뒤에 그와 헤어졌다. 왜 헤어졌나는 질문에 그녀는 대답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를 주기 마련이고, 나는 우울하고 상처받은 여자였거든."
나는 그들의 관계에 대해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는 4달 뒤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는 어딘가에 기대야 했고 그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그가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우리 모두는 어딘가에 달라붙어야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이젠 내 안에 있는 걸 찾고 싶어. 날 행복하게 만들어 줄 무언가를."
그녀는 말했다. 버스가 빛 한 조각 없는 사막을 지나고 있었기에, 어둠에 덮힌 그녀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와 냄새만이 느껴졌다. 초콜릿과 위스키가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였다.
"8년 동안 행복을 찾았지만, 거기엔 없었던 것 같아."
우리는 아직 라스베가스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라스베스가스의 관광지와 실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비웃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버섯같은 자연 마약과 인공 마약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해줬다.
"버섯은 먹어도 안전하다니까. 몸이 퍼지면서 집중할 수 있어."
담배도 안 해본 나는 그저 그렇구나 할 뿐이었다. 버스에 내리기 직전에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물었다. 그녀는 내 여행 스케줄을 물어봤고 밥을 같이 먹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와 만날 수 없었다. 라스베가스엔 1박 2일만 있을 예정이었고, 샌프라시스코까지 숙소도 이미 잡아놓은 상태였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고 로즈는 남았다.
"혹시 펜팔 할 수 있을까?"
그날 밤에 호텔 직원에게 휴대전화를 빌려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로 장문의 문자와 이메일 주소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 여행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 한국에 와서도 그녀의 답장은 없었다. 그녀에게 답장을 받았을 때는 방학이 끝나고 복학을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