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을 브랜드 진정성 관점에서 분석해 보다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브랜드를 물어봅시다. 소비재부터 산업재까지 다양한 답이 나올 텐데요. 이 시대 좋은 브랜드를 물으면 어느 정도 답이 좁혀집니다. 그중 하나가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일 겁니다. 파타고니아는 "지구는 목적, 기업은 수단"이라고 말해왔는데요. 말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업입니다.
파타고니아는 어느 기업도 ESG에 관심이 없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환경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리더 중에 리더죠. 1993년 세계 최초로, 버려지는 폐기물을 의류로 만들었습니다. 2025년까지 생산 제품 전체 원단 중 절반을 섬유 폐기물, 해양 플라스틱 폐기물 등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합니다. 실적이 좋든, 안 좋든 매년 매출 1%를 환경보호를 위해 기부를 하고 있고요. 심지어 2011년 블랙 프라이데이에는 가장 인기 있는 제품군 중 하나인 R2 제품을 사지 말라는 광고를 뉴욕타임스에 싣죠. 이유는 단 하나, 환경피해를 줄이기 위해 블랙 프라이데이 기간 무분별한 소비를 줄이자는 취지입니다.
파타고니아가 좋은 브랜드로 인식되는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실제로 환경에도 좋은 브랜드고, 꾸준히 좋은 브랜드이기 때문이죠. 이걸 바로 진정성 (authenticity)이라고 합니다. 브랜드가 하는 말이 '진짜냐?', '일관되게 같은 말하냐?' 시험을 통과한다면, 브랜드는 그 자체로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독창적인 브랜드가 됩니다. 애초에 'authenticity'라는 단어는 '원본', '독창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authentikos'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독창성이 담긴 원본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작가'(author)라고 불렸고 이들의 작품은 '권위를 가진'(authoritative) 것이 되었습니다.*
(*출처: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2783.html )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업으로 하면서 요즘 가장 아쉬운 브랜드가 있습니다. 2022년 하이브가 야심 차게 내놓은 아이돌, 르세라핌입니다. 최근엔 코첼라에서 실력논란을 일으키며 언론과 대중의 뭇매를 맞았는데요. 연말시상식마다 기대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던 르세라핌이 하루아침에 어마어마한 비난과 조롱을 들은 건 브랜드 관점으로 볼 땐 당연한 결과입니다.
르세라핌의 이야기가 진짜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르세라핌은 FEARLESS 앨범으로 데뷔했습니다. 앨범 첫곡이자 르세라핌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이름은 'The World Is My Oyster.' 세상이 내 거라는 뜻이죠. 내가 피나는 노력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가 르세라핌 컨셉 기저에 있는 메인 프레임입니다.
가져와 Forever win 내게 Ay
가슴팍에 숫자 1 내게 Ay
내 밑으로 조아린 세계 Ay
( FEARLESS - 르세라핌 가사 중 )
https://youtu.be/mjcJOJkNPRw?si=WJg936gZ5Tqw-QJN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을 던지게 됩니다. '진짜냐?' 세 번째 아이돌 데뷔를 하는 사쿠라, 미국 대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온 허윤진, 발레리나가 아닌 아이돌로 전향한 카즈하 등 모든 멤버가 말합니다. 르세라핌에 모든 것을 걸었고 앞으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브랜드 철학과 서사까지 완벽하지만 여러 음악방송에서 있었던 가창력 논란은 코첼라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중들은 르세라핌의 실력이 아니라 진정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실체가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기 마련입니다. 대중들은 과장광고라고 받아들입니다. '이 약 먹으면 5kg 빠진다더니 전혀 아닌데?'라며 과장광고를 지적하는 후기처럼, 대중들은 말합니다. '르세라핌 노력해서 1등 하겠다더니 전혀 아닌데?' 이를 넘어, 르세라핌이 데뷔 전후로 지켜온 영광이 폄훼됩니다. '르세라핌이 성공한 건 노력이 아니라 운 덕분이야.' 르세라핌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하든 듣지 않게 됩니다. 진짜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Fake it until you make it'이라는 어구처럼, 브랜드 측면에서도 어찌 보면 진실성보다 더 중요한 건 일관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측면에서도 아리송한 부분이 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트러블에 I'm fearless
(중략)
내 흉짐도 나의 일부라면 겁이 난 없지 없지
( FEARLESS - 르세라핌 가사 중 )
타이틀곡 FEARLESS 가사 중 컨셉을 가장 잘 나타내는 두 문장입니다. 중요한 건 겁이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겁이 없는 이유죠.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가 있어도, 그 흉짐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태도입니다. 나에게 문제나 흉짐이라는 건 당연히 있는 것이고 이걸 인정하고 노력하겠다는 자세입니다.
더 높이 가줄게 내가 바랐던 세계 젤 위에 떨어져도 돼 I’m antifragile antifragile
( Antifragile - 르세라핌 가사 중 )
이 컨셉이 가장 잘 나타난 앨범은 Antifragile 입니다. 우리는 원래 잘났으니 최고가 되겠다는 컨셉이 아닙니다. Antifragile (충격에 직면했을 때 더 강해지는 성질) 하기 때문에 더 높은 세계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르세라핌에게 충격과 위험은 디폴트값인 거죠. 이 용어를 만든 사상가 나심 탈레브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래의 리스크를 예측하기보다는 극단적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르세라핌식으론, 모두가 알고 있는 트러블이 와 내게 흉이 쌓였기 때문에 이로인해 더 강해졌고 추후 더 큰 위기를 대처할 수 있다고 해석해볼 수 있겠습니다.
Plan대로라면 놓칠 리가 없지 내 sugar, sugar
(중략)
아귀가 착착 맞게 I planned that, don't be mad
Plan대로라면 난 될 수가 없지 그 loser, loser
( Smart - 르세라핌 가사 중 )
그런데 EASY 앨범 속 'Smart'라는 곡은 Antifragile 개념과 반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위험이 닥쳤을 때 Antifragile 하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나는 남들보다 똑똑하고 (I'm a smarter) 계획 대로 열심히 하기 때문에 (Plan대로라면) 성공한다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이전 앨범에선 흉짐이 있다고 했는데, 새 앨범에서 르세라핌은 남들보다 똑똑하고 완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계획 대로 착착해나간다는 주장도 과도한 계획을 피하고 실험을 추구한다는 Antifragile 정신과 사뭇 다르게 느껴집니다.
물론, 브랜드가 항상 똑같은 이야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부변화에 따라 달라지죠. 그럼에도 핵심철학은 유지해야 합니다. 브랜드 일관성이 잘 유지된 예는 농심 신라면입니다. 1986년부터 38년간 '사나이 울리는 농심 신라면' 카피를 유지해 왔는데요. 올해 '인생을 울리는 농심 신라면'으로 바꾸었습니다.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제품의 핵심가치는 지키는 좋은 카피입니다. 만약 '사나이 울리는 농심 신라면'이 '사나이 웃기는 농심 신라면'이 된다면 다소 어색한 느낌이겠지요. 르세라핌의 'Smart'가 타이틀곡이 아닌 수록곡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과거의 주장과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면 대중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https://www.sedaily.com/NewsView/2D4651DMDU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라는 책을 통해 영웅 신화의 구조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중, 시련 단계를 주목해 봅시다. 영웅은 전투 등을 통해 죽을 위험에 처하는데, 이때 괄목할 만한 점은 진짜로 죽거나 죽은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웅은 시련을 통해 부활할 수 있고 이것이 되살아난 영웅에게 신비로움과 권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르세라핌은 시련의 길에 서있습니다. 다행인 건 그 시련을 우리 모두가 같이 보았다는 거죠. 이제 남은 건 르세라핌의 부활을 다 같이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르세라핌이라는 브랜드가 진짜 이야기를, 일관되게 풀어내길 기대해 봅니다. 더 진정성을 가지길 바라봅니다. 현존하는 다양한 논란들은 르세라핌이 앞으로 성장해 나감에 있어 좋은 씨앗이 되겠죠. 르세라핌은 타 아이돌 그룹과 비교하는 횡적 행보를 보여선 안됩니다. 과거의 자신, 미래의 자신에 맞서는 종적 행보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진정성을 쌓아가면 됩니다. 좋은 브랜드란 그렇습니다.
※ 이 글은 르세라핌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브랜드 관점에서 자체 분석한 글이며, 아티스트를 비난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