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가 지중해의 햇빛에 가장 뜨겁게 데워진 저녁 7시,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었다. E는 새벽 한 시가 넘어 베니스에 돌아온 당일부터 줄곧 나에게 같이 술을 먹겠냐고 물어봤고, 나는 두 번의 수락과 한 번의 거절을 했다. 내일 아침 다시 로마로 떠나는 E에게 작별인사를 할 겸, 한 번의 거절을 용서받을 겸, E에게 맥주를 마시러 가겠냐고 물었다. E는 지금 비엔날레 전시장이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숨어서 쫓겨날 때까지 있고 싶다며, 괜찮다면 집에서 기다리거나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E가 없을 때도 종종 그랬듯 혼자 가서 있겠다고 했다. 문득 어디서 만날 지가 너무 당연해서 얘기조차 하지 않는 대화에 퍽 행복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순간의 깨달음.
현금을 가지러 집엘 들렀다. 리도에서의 첫 출근을 마치고 집에 막 돌아온 A를 문 앞에서 만났다. 어제 A는 첫날밤을 신경질적이게 보일 정도로 부산스럽게 집을 청소하며 보냈고, 오늘은 한 바구니 잔뜩 장을 보고 왔다. 이미 전날 밤 저녁을 먹으며 몇 번이고 사과를 했고 A도 몇 번이고 괜찮다고 했지만, 여전히 내가 더럽힌 집을 청소해줬다는 미안한 마음 때문에 문을 열어 주고 짐을 들어주는 시늉을 했다. A는 짐은 괜찮다며 내게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E와 맥주를 마시러 가는데 너도 원한다면 오라고 했다. 출근 첫날은 당연히 항상 고되기 때문에 A가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A는 흔쾌히 짐만 풀고 가겠다고 했다.
하나 둘 일을 마치고 사람들이 배를 타고 돌아온다. A와 E를 기다리며 혼자 첫 번째 맥주를 시작했고, 배를 정박시키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배를 정박시키는 일은 차를 주차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자신들의 정박지에 도착하면 모터를 확 줄이고 다른 배에 부딪히지 않게 조심히 뱃머리를 돌려 배 후미가 먼저 들어가도록 정박지로 배를 들여놓는다. 주차가 되고 엔진을 끄고서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게 물속에 박힌 나무 말뚝에 배를 두 군데 묶어야 하고, 배를 천으로 모두 덮어야 한다. 배에서 내리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우리 동네의 대부분 정박지는 물가로 향하는 계단이 없어서, 벽돌 담벼락을 넘어야 한다. 흰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은 치마가 다 들려 속옷이 보이는 것도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힘겹게 배에서 내린다. 그 모습이 참 이탈리아, 특히나 베니스 사람들의 모습 같다고 느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아니 그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해서 불편한 것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그들이 그 불편함에서 느끼는 어떤 역설적인 편안함이 보였다. 나는 여태껏 편리함만 쫓았고, 그것이 편안함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편리함과 편안함은 대개 꽤 다른 상황에서 오는 다른 감정이다. 그들이 그들의 오랜 삶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편리함을 따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참혹하게 아름답게 보였다.
죽은 비둘기의 시체가 물 위에 떠 있다. 배들이 지나다니며 만드는 물의 흐름에 맞춰 이리저리 움직인다. 살아있는 비둘기는 물에 눕지 않는다는 경험적인 사실을 차치한다면 죽어있는 시체라기보다 옆으로 누워 잠이든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무섭고 슬픈 것이라는 관념은 어쩌면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 그 관념만 바꾼다면 죽음은 편안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아주 깊은 잠에 빠지는 거라며 어릴 적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주려던 어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삶이 버거워 나를 타락시키기 위해 내 모든 걸 내버리는 게 아니라, 힘든 나를 위해 긴 휴식을 주는 것이라면 너무 비관적일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어쩌면 이마저도 무엇인가와 타협하려는 연약한 마음일 수도 있지만, 인간은 원래 연약한 존재가 아닌가?
A는 내가 세 번째 맥주를 시작할 때쯤 바에 도착했고, E는 내가 네 번째 맥주를 시작할 때 도착했다. A는 이 집에 산지 나보다 훨씬 오래되었지만 집에서 다리 하나 건너에 있는 이 바를 거의 와보지 않았다고 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만하다고 생각을 바꿨다. 마치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 문을 열며 느낀 햇빛의 뜨거움이 이미 기억나지 않듯. 지금 내 얼굴에 닿는 베니스의 바닷 공기가 어제와 얼마나 달랐는지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하듯. 나를 한순간에 사랑에 빠뜨리고 그 떨리는 가슴에 밤잠을 설치게 한 아름다움의 기억마저도 이내 사라질 것처럼 점점 희미해지듯. 무섭고 슬픈 일이다. 도대체 나의 감각과 기억은 얼마나 무디고 연약한 걸까. 나는 정말 세상을 감각하며 사는 걸까. 내 감각의 기억들이 휘발성 액체처럼 느껴졌다. 어딘가 한 번에 쏟아져 들어왔다가 이내 이리저리 출렁이며 휘발해서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휘발되는 모든 것들 맨 아래에는 항상 깔린 채로 남는 희뿌연 침전물 같은 것들이 있다. 그렇게 쌓인 침전물들이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 어쩌면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전물이 쌓이길 바라는지 잘 알아야, 때때로 그것들이 쌓이며 만든 전체적인 모습을 잘 볼 줄만 안다면, 그 침전물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 현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고 많은 침전물을 만들기 위해 오늘에 더 충실해야 한다는 깨달음.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모든 감각을 더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
모두 술에 조금씩 취했을 때쯤, A는 담배가 피고 싶다고 했다. 나와 A와 E는 모두 담배를 습관적으로 피우지는 않는다. A의 말을 들으니 나도 덩달아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담배를 사러 가리발디 거리로 갔다. 담배를 사러 나온 집 앞 거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거리의 끝에 있는 다리 위에 서서 베니스의 반대편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다 같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랜만에 내 안으로 들어오는 담배연기는 내가 습관적으로 피우던 담배연기와 달랐다. 비로소 연기의 맛이 느껴지는 듯했고, 심지어는 꽤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노을을 바라보는 A와 E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당시에 그 모습이 어느 정도로 아름다운지 알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사진이 정말 아름답게 찍혀있었다. A와 E 모두 그 사진을 좋아했다. 나의 감각은 이렇게 도처에 널려있는 아름다움을 모두 인식하기에 턱없이 부족해서, 가끔은 이런 큰 아름다움은 내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로 다가온다. 그것을 더 잘 감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야 한다. 그 기록은 종종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들을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미화시키기도 한다. 나는 이렇듯 사실보다도 더 아름다워진 기억들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집으로 돌아왔고, 오늘은 A가 요리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누가 무엇을 하기로 어떻게 결정된 건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있었고, A와 E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A가 나를 비엔날레의 DJ라고 부르며 얼른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다. 우리가 다 같이 사는 집은 좁고 긴 모양의 광장에 놓여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좁은 면을 비엔날레 전시장과 인포메이션 센터의 입구와 마주 보며 공유하고 있다. 광장의 이름은 Ramo de la Tana. A가 이름의 뜻을 설명해줬지만 정확하게 한국말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대강의 뜻은 ‘작은 소굴의 가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Campo(광장)는 어울리지 않지만 Ramo(나무의 가지)는 정말 잘 어울리는 형태이다. 이 좁고 긴 광장은 아침마다 비엔날레를 입장하려는 사람들이 오픈 1시간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 어느 날 문득 그들을 내려보았다. 쪼그려 앉아 졸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곧 비엔날레를 보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행복함보다는 지루함이 느껴졌다. 그 지루함이 참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음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아침마다 스피커를 창문 앞에 두고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틀었다. 어느 날은 노래를 틀어 놓고 장을 보고 왔는데, 내 방 창문 아래에서 나의 노래에 춤을 추고 입을 맞추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베니스에 내가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찾은 것만 같은 너무나 큰 기쁨. 내가 베니스를 사랑하는 마음이 차고 넘쳐 그것이 베니스에 온 사람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다는 행복. 나는 그날부터 하늘을 보고 날씨를 느끼며 그날의 기분에 따라 신중히 선곡을 하는 꽤 사명감을 가진 비엔날레의 DJ가 되었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음악 리스트를 재생시켰다.
A는 시간이 늦었고 배가 고프니 빠르게 할 수 있는 토마토 참치 파스타를 한다고 했다. 주방기구들을 준비하고 양파를 써는 A의 움직임이 급하지는 않지만 재빠르다. 그런 A의 모습을 보며 나와는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급하지만 빠르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별 결실 없는 사람. 어떤 불안감에 무엇이든 멈추지 않고 해대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삶. A가 요리를 끝마칠 때쯤 L이 도착했다. 처음으로 우리 넷이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시작하는 이탈리아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 A는 토스카나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의 안 좋은 점을 가장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다. 하지만 잘못된 자부심은 자신만을 추켜세워 오만하게 되고 심지어는 주변의 것들을 깎아내리기까지 한다. 괴롭지만 사실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낮은 자존감은 나를 깎아내려 삶을 힘들게 하고 지나친 자존심은 결국 상대를 꺾어야만 한다. 균형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베네치안은 소속감과 유대감이 강하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람을 통해서 엮인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모습의 아주 큰 아름다움도 보았고, 아주 불편한 모습도 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아까 사 온 담배가 생각났고, A와 나는 주방 창문에 걸어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L은 내가 담배를 끊게 된 이유를 물었고, 그렇게 최근 나의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를 한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게 되었다. 그들이 나의 얘기에 강하게 매료되어서 본인들의 생각들을 쏟아낸다. 특히 L의 얘기는 나를 강제하는 어떤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아 내가 차마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생각들이었다. L의 이야기에 의해 꽤 오랫동안 강하게 막혀있던 내 생각의 통로 중 하나가 순식간에 뚫린 기분이었다. 베니스에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특별한 삶의 형태를 보는 것뿐 아니라, 아름답고 특별한 생각을 듣고 경험하는 것. 다음날 아침 깨끗이 정리된 주방을 보았다. 오늘 저녁엔 또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가 풍길지 기다려진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거기에 좋은 음식과 음악이 있다면, 나도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그것이 잠깐의 착각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