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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May 11. 2021

# 9. 폭력과 배치

폭력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

"신발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고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더럽다. 음식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침실에 식사용기를 놓는 것이 더럽거나 옷 위에 흘린 음식이 더럽다. 마찬가지로 응접실의 화장실 도구나 의자 위에 놓인 옷, 실내에 있는 실외 도구, 아래층에 놓인 위층 물건, 겉옷 위에 드러난 속옷 등등, 요컨대 우리들의 오염에 관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존중되어 온 분류를 혼란시키는 관념이나, 이것과 모순되는 일체의 대상에 대한 관념을 그른 것이라고 하는 반응이다."

메리 더글라스 지음, 유제훈‧이훈상 옮김, 『순수와 위험』, 현대미학사, 1997.



폭력에는 불순함이 있기 때문에 전염이 생깁니다. 불순(不純)은 순수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폭력의 전염은 단순히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염(汚染)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폭력의 불순함은 더러운 것을 옮긴다는 인식과 연결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전염을 막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짐가제굿>에서는 폭력의 전염성을 살(煞)이라고 부르고, 그 살을 막기 위해 저승의 존재인 '열시왕'을 직접 등장시키기도 하죠. 그런데 텍스트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작 살을 막은 것은 손사령 아내의 '자결'이었습니다. 폭력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다른 곳으로의 전염을 막은 인물이 바로 손사령 아내였던 것입니다.


손사령 아내와 같은 인물을 희생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생양은 폭력의 불순함을 온몸으로 껴안습니다. <대감굿>의 '짐달언'도 그런 희생양 중 한 명이었죠. 짐달언은 전장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죽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두만강 넘어 '저 나라'라는 죽음의 나라로 향합니다. 죽음의 공간과 접촉하는 순간 죽음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이 불순함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짐달언이 '저 나라'에 갔다 오는 순간 그의 몸은 죽음에 오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저 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용천검으로 자신의 목을 칩니다. 폭력에 오염된 자신을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폭력의 전염을 끊어내기 위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폭력을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불순-오염-해로움'과 같은 용어가 폭력을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해로운 것을 '이로운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짐달언을 '대감신'이라는 신격(神格)으로 상승시키기도 합니다. 희생양의 신격화! 이것은 자기희생의 신화를 완성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과정입니다. 해로운 폭력을 받아들임으로써 신(神)이 되었으니, 이제 해로운 폭력은 더 이상 해롭지 않은 것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짐달언이 대감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짐달언의 어머니가 남아있습니다. 짐달언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손사령 아내와 같은 방식으로 목을 매고 자살합니다. 신으로의 좌정이 해로운 폭력을 이로운 것처럼 전환시켰지만, 여전히 폭력의 해로움은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지장본풀이>의 지장 아기는 더 처절한 모습이었죠. 우여곡절 끝에 신이 되었지만 사(邪)로 치부되면서 지장 아기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축출당합니다. 지장 아기는 희생양의 또 다른 모습인 '투기되는 타자'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폭력의 불순함, 그리고 불순함을 통한 오염의 과정은 희생양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불순함과 전염(또는 오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기본적으로 '불순'이나 '오염'과 같은 개념은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 자체를 가치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피하거나 끊어내야 하는 대상으로 상정하게 합니다. 자기희생의 신화에서 '자결'과 같은 화소(話素)가 많이 발견되는 이유는 폭력을 피하거나 끊어내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수단으로 스스로에게 폭력을 집중시키고 없애버리는 방식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글라스(Mary Douglas)는 불순과 오염과 같은 용어를 무조건 부정(不淨)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습니다. 불순과 오염은 사물의 체계를 세우는 '질서'와 '분류'들의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존중되어 온 분류를 혼란시키는 관념이나, 이것과 모순되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불순과 오염과 같은 용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불순과 오염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절대적으로 불순하거나 오염된 것은 없는 셈입니다. 다만, 체계 안에서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들이 불순과 오염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냅니다. 신발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이 아니고, 식탁 위에 올라가 있을 때 더럽다고 느껴집니다. 음식도 땅에 흘리는 순간 오물이 됩니다. 모두 '자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스미스(Jonathan Z. Smith)도 어떤 것이 성스럽게 되거나 속되게 하는 것은 순전히 그것의 '위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성스러운 텍스트는 성스러운 자리에서 사용되는 것을 일컬으며, 그 이상 요구되는 것은 없다고 단정합니다. 만약 어떤 야한 노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노래가 성전(聖殿)에서 불리면 필연적으로 성스러운 노래가 되고, 술집에서 불릴 때는 그렇지 않다는 논리지요.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성스러운 것과 상스러운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등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폭력을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에 따라서 폭력이 가지고 있는 불순함과 전염성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폭력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며, 더 나아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폭력은 불순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부정(不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폭력을 무조건적으로 피하거나 은폐하려고 한다면, 폭력은 '제자리'를 잃고 방향성이 없는 상태로 이곳저곳을 오염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을 대하는 과정에서 '배치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게 됩니다.


우에노 나리토시(上野成利)는 폭력을 행사하는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나'의 영역으로 폭력적으로 뛰어들어온 타자를 인정하고, 그 타자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 정체성의 흔들림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체제 안에 폭력을 행사하는 타자를 위치시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력과 함께하기' 정도라고 할까요? 이렇게 된다면 폭력은 '나의 체제'를 흔들어 놓을 수도 있지만, 이미 구축된 자신의 체제 안에서 폭력을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폭력을 내 안에 배치함으로써 나의 체제를 오히려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완전히 내재화시켜서 자신에게 융화시키자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랑선비 청정각시>나 <안택굿>에서 열녀(烈女)나 효자(孝子)에게 강요된 이데올로기적 폭력을 긍정한다는 뜻이니까요. 청정각시나 감천이의 부모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적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열녀나 효자가 되었습니다. 열녀와 효자는 사회의 본보기가 되어 욕망의 대상이자 모방의 대상이 되고, 타인으로 하여금 폭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합니다. 전염의 또 다른 시작이죠.


폭력을 받아들여 그것과 일체화를 이룸으로써 폭력을 무화시키려는 움직임은 배치의 문제와 무관합니다. 배치는 융화되지 않는 타자를 자신의 체제 안에 위치시키고 폭력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물론, 나의 체제 안에 '폭력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거부감이 들 수 있는 폭력 자체를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그 과정은 첫걸음부터 지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이 만들어낸 주체가 되거나 희생양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쉽고 편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편의 신화가 바로 그런 식으로 폭력을 해결해왔었죠.


하지만 분명 폭력을 자신의 체제 안에 배치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엿보고자 하는 신화도 다수 존재합니다.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일련의 신화들은 폭력은 회피할 수 없는 것이며 폭력이 인간에게 근원적이라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서사를 진행합니다. 그런 신화의 면면을 검토해본다면, 폭력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배치의 전략'에 대해 새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전략이 유효하다면, 폭력은 더 이상 나를 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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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더글라스 지음, 유제훈‧이훈상 옮김, 『순수와 위험』, 현대미학사, 1997.
조너선 스미스 지음, 방원일 역, 『자리잡기』, 이학사, 2009.
우에노 나리토시 지음, 정기문 옮김,『폭력』, 산지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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