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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May 17. 2021

# 10. 폭력과 전염병(1)

<손님굿>과 폭력을 향한 환대

"손님네요, 어서 내 집으로 가십시다."
영웅 선생이 손님네를 사랑방에서 영접한 후 이튿날 손님네가 아들 칠형제를 고이곱게 정구 치니 못난 인물 잘나지고 명도 타고 복도 탔다.

김석출 구연, 이두현 조사, <손님굿>(1977)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는 폭력을 몰고오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폭력을 조율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자를 거부하고 쫓아내기보다는 일단 나의 체제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폭력을 내재화하여 자기 자신과 융화시키거나 모든 폭력을 희생양에게 집중시켜 제거해버리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는 폭력이 지니고 있는 불순, 오염 등과 같은 자질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화에서는 일찍부터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는 신을 이런 식으로 다루면서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이냐고요? 바로 천연두(天然痘)의 신입니다.


천연두는 두창(痘瘡), 마마 등으로 불리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종두법(種痘法)이 개발된 이후에도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근절되었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천연두는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호환(虎患)과 전쟁에 비견되는 천연두라는 전염병은 폭력이 가지고 있는 전염성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치료제가 없던 시절에 천연두는 도저히 대처가 불가능한 역병이었습니다. 예방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연두는 다양한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고 천연두를 인간에게 뿌리고 다니는 신들을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흥미롭게도 그 신들의 이름은 '손님'입니다. 손님! 이름을 참 잘 지었습니다. 손님처럼 잠시 머물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막을 수 없으니 손님처럼 잘 대접해야 하고, 잘 대접한 이후에는 떠나보내야 하는 신입니다. 그래서 손님신은 다른 신들과는 달리 어떤 특정 지역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보통 좌정(坐定)이라고 해서 신들은 여러 노정을 거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데, 손님신은 머물지 않고 되돌아갈 신이기에 좌정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손님신을 인간의 삶 속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천연두를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 천연두를 '잘 앓고' 이겨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손님신을 대하는 태도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경외(敬畏)라는 감정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신이 손님신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무속에서는 손님신을 모시고 보내는 과정을 하나의 굿거리로 만들었고, 그 안에서 무당의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신화로 전승되고 있습니다. 천연두는 근절되었지만 전염병은 그 형태를 바꿔서 계속 우리의 삶에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손님신에 대한 신화와 제의는 아직까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습니다. 특히, 동해안과 전라도 지역에서는 손님신과 관련된 제의가 많이 남아있고, 이 중 동해안에서 <손님굿> 신화가 생생하게 그 전승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손님굿> 신화에는 여러 가지 각편(version)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김석출이라는 동해안의 큰 무당이 구연한 <손님굿>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손님의 근본이 어디인가.

강남대한국에서 54명의 손님이 솟아났다. 하루는 손님들이 회의를 하면서 세계 각국을 살펴보니, 조선국에는 좋은 약도 없고 처방조치도 없고 침술과 한약뿐이니 마마 천연두를 치료할 수 없었다. 이에 막동이가 손님 신을 모시고 조선국의 방방곡곡, 가가호호를 다니며 마마를 뿌리고 굿과 놀이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강남대한국은 넓고 조선국은 좁아서, 강남대한국을 완전히 비울 수 없으니 50명은 머무르고 4명의 손님만 인심 좋은 조선국으로 나오기로 했다.

'각시손님', '세존손님', '호반손님', '문신손님' 등 4명의 손님신이 조선국으로 향했다. 각시손님은 천연두를 앓고 난 후 못난 얼굴을 잘나게 고쳐주려고, 세존손님은 사람들의 재산과 명복을 불려주려고, 호반손님은 빠짐없이 천연두를 주기 위해서, 문신손님은 서책을 옆에 끼고 죽을 사람의 이름 밑에 빨간 점을 찍고 살릴 사람의 이름 밑에 검은 점을 찍어 기록하려고 조선국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호반손님은 사방에 활을 쏘아서 나쁜 액을 막는 역할도 맡았다.

손님들이 의주 압록강에 당도했는데, 배가 없어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나룻터의 뱃사공에게 금은보석을 줄 테니 배 4척만 빌려달라고 했다. 뱃사공은 각시손님이 하룻밤 수청을 들면 배를 구해주겠다고 했다. 각시손님이 화가 나서 스스로 배 4척을 모아서 조선국으로 향했다. 손님들은 뱃사공을 죽여 강물에 던져버리고, 뱃사공의 아들 칠형제에게 천연두를 주었다. 6일동안 차례대로 칠형제는 죽어갔다. 뱃사공의 어머니가 정화수를 소반에 바쳐놓고 손님들에게 제발 아들 한 명만 살려달라고 빌었다. 각시손님은 한 명만 살려주되, 7가지 병신이 되어야 한다며 막내 아들을 눈 봉사, 귀머거리, 코허친이, 입아시풍, 곱사등, 손발 중풍환자로 만들어버렸다.

조선국에 당도한 손님들은 밤이 되자 외손녀와 살고 있는 '노고할미'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묶기를 청했다. 노고할미는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다음날 노고할미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부자인 '김 장자'의 집에 가서 쌀을 꿔달라고 했다. 김 장자는 화를 내며 노고할미를 쫓아냈지만, 김 장자의 아내가 몰래 노고할미를 불러서 쌀 한 말을 꿔주었다. 노고할미는 그 쌀로 음식을 장만해서 손님들의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손님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손님들이 노고할미의 외손녀에게 천연두를 주려고 하자, 노고할미는 13~15세 정도 된 김 장자의 삼대독자 외아들 김철룡에게 천연두를 주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손님들은 노고할미에게 김 장자에게 가서 철룡이에게 천연두를 줘도 괜찮겠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김 장자는 노고할미에게 무슨 개수작이냐고 화를 내며, 머슴을 불러 불로 연기를 내어 잡신들을 모조리 쫓아내라고 했다. 그리고 아내에게 '유점사'라는 절에 철룡이를 피신시키라고 말했다.

손님들은 화가 났다. 손님들이 조선국 방방곳곳을 다니며 천연두를 앓게하면, 잡병도 없어지고 못난 얼굴도 좋아지고 재산도 늘어나게 될 텐데, 그런 자신들을 몰라준다는 것이었다. 각시손님은 철룡이 어머니로 변장하여 유점사에 찾아갔다. 그리고 "철룡아, 철룡아"라고 세 번 불러서 철룡이를 데리고 김 장자의 집으로 갔다. 김 장자의 집에 간 손님들은 마당 한복판에서 철룡이의 온몸에 은침 백 개, 금침 백 개를 꽂았다. 철룡이가 아프다고 소리치자, 철룡이 어머니가 놀라서 방에서 나와 철룡이를 방안에 눕혔다. 철룡이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껍고 천연두를 앓고 있는 것처럼 아파했다.

철룡이의 어머니는 상황을 짐작하고 정화수를 소반에 담아 손님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철룡이의 얼굴에는 점점 천연두 수포가 솟아났고 곧 온몸으로 번졌다. 철룡이 어머니는 겁이 나서 김 장자를 불렀다. 김 장자는 마침내 재산을 털어서 손님들을 모시겠다고 외치며 빌기 시작했다. 그러자 철룡이의 상태가 점점 나아졌다.

하지만 김 장자는 약속대로 손님들을 모시지 않았다. 그러자 손님들이 괘씸하게 생각해서 철룡이를 잡아가기로 했다. 손님들이 온갖 잡손들을 부르자 잘 놀던 철룡이는 갑자기 열이 나고 까무라치며 죽어갔다. 철룡이의 어머니가 김 장자에게 이러다가 철룡이가 죽겠다고 얘기했다. 김 장자는 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쓸 수는 없다며, 그게 철룡이의 운명이니 자신과는 상관 없다고 답했다. 철룡이는 죽으면서 김 장자에게 천년만년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잘 살라고 하며, 자신은 죽어서 손님들이 타고다니는 말의 고삐를 잡게되었다고 말했다. 철룡이의 어머니는 죽은 철룡이를 붙잡고 곡을 했다.

김 장자는 재물만 탐하며 살다가 삼대독자 철룡이가 죽은 이후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하게 살다가 그 많던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그리고 등창이 나서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짚신을 삼아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짚신을 삼지 못하는 날에는 철룡이 어머니가 구걸을 다녔다.

그때 손님들은 서울에 가서 억만 가구 집집마다 천연두를 뿌렸다. 노고할미는 손님들을 모시고 싶었지만, 재산이 없었다. 세존손님이 노고할미에게 금 바둑알 다섯 개를 주었고, 노고할미는 그것을 가지고 지극정성으로 손님 대우를 했다. 한편 철룡이는 손님들의 말고삐를 잡고 따라다니면서 미련한 아버지를 걱정하며 눈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손님들이 이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송도의 '영웅 선생'의 집에 가기로 했다. 영웅 선생은 귀신과 말을 하는 능력이 있었고, 아들 칠형제와 함께 살고 있었다. 영웅 선생은 꿈을 통해 손님들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집을 정결하게 한 후 손님들을 마중나갔다. 그리고 손님들을 잘 모셨다. 이튿날 손님들은 영웅 선생의 아들 칠형제에게 곱게 천연두를 내려서 못난 인물을 잘나게 해주고, 명과 복을 주었다.

손님들이 강남대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고할미의 집을 들여다보았다. 그동안 김 장자의 많은 재산은 모두 노고할미에게 넘어갔고, 노고할미의 가난한 살림은 김 장자의 집으로 넘어가 있었다. 노고할미는 백만장자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사랑가를 부르며 흥겹게 살았다.


<손님굿>의 첫 장면에서 천연두의 신인 손님들이 본래 머물고 있던 공간이 나옵니다. 바로 '강남대한국'으로, 오늘날로 치면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염병의 기원이 중국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압록강이라는 '경계'가 '조선국'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고, 그 밖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강남대한국이라는 중국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손님들이 몰고 오는 전염병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념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전염병은 내부에서 맴도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와서 다시 외부로 나간다는 인식과 연결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손님들이 조선국으로 넘어오는 이유에 있습니다. 천연두를 치료할 방법이 없는 조선국이기에 손님들이 직접 압록강을 넘어 조선국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방법이나 치료법이 없는데 병을 가지고 온다니, 언뜻 보면 못된 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선국으로 넘어오는 '각시손님', '세존손님', '호반손님', '문신손님'이라는 손님들의 능력을 보면 그저 못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각시손님은 인간들에게 천연두를 주고 못난 얼굴을 잘나게 고쳐준다고 합니다. 세존손님은 천연두를 주고 재산과 명복을 불려줍니다. 호반손님은 천연두로 액(厄)을 막아주고, 문신손님은 천연두를 통해 죽음과 삶을 기록합니다. 천연두를 뿌리고 다니는 신이라면 응당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할만 한데, 오히려 천연두를 통해 인간에게 복을 주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물론, 손님들은 무서운 신입니다. 손님들이 압록강을 건너고자 할 때, 각시손님을 희롱한 뱃사공은 죽음을 맞이하고 자칫 아들 7형제도 모두 천연두로 죽을 뻔 합니다. 겨우 뱃사공의 아내가 사정사정해서 단 한 명의 아들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것도 눈, 코, 입, 귀, 등, 손, 발에 장애를 얻은 상태로 말이죠. 천연두를 몰고 다니는 손님들을 어떻게 대하냐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잘 모시면 천연두는 복이 되고, 그들의 존재를 믿지 않고 박대하게 되면 화를 입게 됩니다. 신(信)과 불신(不信)으로 구성된 믿음의 체계 안에서 손님들은 극단적인 태도로 인간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양상은 '노고할미'와 '김 장자'가 손님들을 모시는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노고할미는 가난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라도 먹을 것을 마련하여 손님들을 잘 모십니다. 그래서 노고할미의 외손녀는 천연두를 앓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김 장자의 아들 철룡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김 장자는 손님들을 '잡신'으로 취급하며 쫓아냅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손님들이 철룡이에게 병을 주자 그때서야 잘 모시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문제는 김 장자가 마음을 바꿔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철룡이는 천연두를 앓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외면했던 김 장자는 철룡이의 죽음 이후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재산은 손님들을 잘 모셨던 노고할미에게 돌아가게 되죠.


철룡이는 죽어서 손님들이 타고 다니는 말의 고삐를 잡게됩니다. 이제 손님들 옆에는 마부가 된 철룡이가 서있습니다. 사람들은 손님들을 맞이할 때 철룡이를 보면서 경계의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손님들을 인정하지 않고 박대하면 자신의 후손들도 언제든지 철룡이의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죠. 외손녀도 지키고 백만장자가 된 노고할미와 아들을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김 장자 사이에서 사람들은 누구의 행동을 지침으로 삼을까요? 당연히 전자가 아닐까요?


그래서 <손님굿>은 '영웅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말미에 덧붙이기도 합니다. 영웅 선생은 송도에 살고 있는 인물이며, 귀신과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님들이 찾아올 것을 꿈으로 알아내기도 하죠. 영웅 선생은 집을 깨끗이 치우고 마중까지 나가서 손님들을 환대합니다. 영웅 선생은 노고할미와 다르게 아들 7형제에게 천연두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곱게' 천연두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손님들을 모시는 것이죠. 그러자 영웅 선생의 아들 7형제는 못났던 얼굴이 잘난 얼굴로 변하고 이전에 없던 명과 복을 얻게 됩니다. 천연두라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오히려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든 셈입니다.


보통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손님들이 천연두를 줄 때 '정구질을 친다'고 말합니다. <손님굿>에서도 '정구질 친다'라는 표현을 자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구질은 '전구(前驅)'로 알려져 있는데, 전염병의 잠복기를 뜻합니다. 잠복기는 바이러스가 몸 속에 들어왔지만 아직 병이 발현되지 않은 시기나 상태를 지칭하죠. 죽음에 이르게 만들 만큼 무서운 폭력의 균이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폭력의 결과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손님굿>에서도 보았듯이,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복을 받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합니다. 


<손님굿>에서 포착되는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는 폭력을 몰고오는 타자의 존재를 '손님'으로서 환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폭력은 무조건 부정하고 불순한 것이 아니라 각시손님, 세존손님, 호반손님, 문신손님과 같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쫓아내려고 할 때 부정하고 불순한 것이 '되어' 오는 것입니다. 타자는 그렇다 쳐도, 타자의 폭력을 환대한다는 것은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입니다. 폭력을 환대한다는 것은 폭력을 조우했을 때 이를 자신의 체계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으로 돌리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결국,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는 폭력이 가지고 있는 불순함이나 오염과 같은 자질을 '배치의 전략'을 통해 긍정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손님들은 강남대한국으로 떠났지만, 언제든 때가 되면 조선국으로 다시 넘어올 것입니다. 손님들이 몰고 오는 전염병이라는 폭력은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내보냈다고 다시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면역이 불가능한 폭력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지속적으로 마주쳐야 하는 것이 폭력이라면, <손님굿>은 폭력을 손님처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잘 모시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노고할미와 영웅 선생이 그랬듯이 말이죠. 폭력을 인정하지 않고 폭력과 함께 다가오는 타자를 무시하고 쫓아낸다면, 김 장자처럼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손님굿>은 손님신을 잘 모셔서 무사히 전염병이 지나가기를 기원하는 신화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폭력을 향한 환대'라는 새로운 전략으로 폭력을 조율하는 지혜를 담은 신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손님굿>의 방식을 무조건 따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저 불순하고 부정해보였던 폭력을 내 삶의 체계 안에 배치했을 때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둘러싼 혐오의 언어와 질타의 시선은 나 스스로 희생양이 되게 만들거나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폭력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웠었죠. 그래서 <손님굿>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손님굿>이 제시하는 폭력을 향한 환대는 폭력의 너머를 사유하고자 하는 실천 행위의 첫 걸음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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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호,「서사무가 <손님굿>의 이원구조와 제의적 성격」, 『고전과해석』25,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8.
윤준섭,「동해안 지역 별상굿의 제의적 성격과 그 의미」, 『우리어문연구』66, 우리어문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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