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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May 24. 2021

# 11. 폭력과 전염병(2)

<마누라본풀이>와 폭력의 조율

"아이고 할머님아 잘못했습니다. 우리 며느리 해산을 도와주옵소서. 내가 할머니 손자에게 마마를 준 거 모두 거두어들일게요."
홍진국 대별상이 할머니 자손들에게 준 마마를 거두고 얽히고 틀어진 얼굴을 모두 메웠다.
"야, 너도 너의 자손 보고 싶냐?"
"할머니 잘못했습니다."

이용옥 구연, 허남춘 외 조사, <마누라본풀이>(2008)



전염병은 폭력의 불순함과 전염성 그리고 목숨을 위협하는 강력한 공포의 힘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염병이 발발하면 전염된 사람들을 격리하고 그들을 감시하기 시작합니다. 감시의 체제를 벗어나면 그들에 대한 집단적인 폭력이 발생하기도 하죠. 잠재적으로라도 전염의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은 질병에 대한 혐오나 공포의 감정에 의해 '악마와 같은 적'으로 인식됩니다. 손택(Susan Sontag)의 말처럼 그들은 이미 범죄자이며, 수치스러운 질병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전염병이 발발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으로 치부되기 시작하고, 혐오와 회피의 대상이 됩니다.


전염병뿐 아니라 '질병' 자체가 은유로서 활용되면서 병에 걸린 사람은 '추악'과 '타락'이라는 의미와 쉽게 결합됩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욕설만 봐도 이런 양상이 쉽게 포착됩니다. '지랄한다'는 간질(癎疾)과, '염병한다'는 장티푸스와, '문디(문둥이) 자식'은 나병(癩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병든 육체는 병신(病身)이 되어 놀림감이 되기도 합니다. 심각한 질병일수록 이런 양상은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질병이라는 무서운 폭력을 몰고 오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 폭력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만 사라지면 질병에 의한 공포가 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인식이 형성되기 때문이죠. 격리는 혐오와 조롱으로, 끝내는 사회로부터의 배제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손님굿>에서 보았듯이, 전염병과 같은 폭력과 그 폭력을 몰고 오는 타인을 인정하고 나의 삶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더 나아가 '환대'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혐오의 언어와 질타의 시선만으로는 폭력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는 폭력을 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환영받은 손님도 여전히 폭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천연두를 뿌리고 다니는 손님 신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아도 여전히 아이들에게 '정구질'을 칩니다. 다만, 천연두를 잘 앓고 지나가게 해 주면서 천연두로 인해 울퉁불퉁해진 얼굴을 잘생긴 얼굴로 바꿔주기도 하고, 명과 복을 주기도 합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폭력의 편재성(遍在性)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폭력의 편재성을 인정하고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만약 <손님굿>과 같이 폭력을 몰고 오는 타자가 손님처럼 머물다 떠나지 않고 계속 삶에 개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님이라고 환대를 했더니 마치 가족인 양 떠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럴 때에는 어느 정도 폭력을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이 요청됩니다.


<손님굿>과 같이, 전염병에 대처하기 위해 굿판에서 불리는 <마누라본풀이>라는 신화에서는 폭력의 조율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마누라본풀이>는 제주도의 신화이며, 제주도의 큰 굿 중 '불도맞이'라는 굿거리에서 불립니다. 불도맞이는 원만한 자식의 출생과 양육을 기원하는 거리이며, <이공본풀이>가 바로 이 불도맞이에서 연행된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불도맞이의 핵심은 <할망본풀이>라는 신화에 있습니다. <할망본풀이>는 출산의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삼승할망본풀이>와 출산의 신과 천연두의 신 사이의 대결을 그리는 <마누라본풀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삼승할망본풀이>는 '동해용왕따님애기'와 '명진국따님애기'라는 두 인물이 등장해서 출산과 육아를 담당하는 산육신(産育神)을 누가 맡을지 경쟁하는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동해용왕따님애기는 아이를 잉태시킬 줄은 알았지만 해산(解産) 시키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겨드랑이를 갈라서 아이를 받으려다가 해산에 실패하게 되죠. 이에 반해 명진국따님애기는 해산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습니다. 결국 경쟁에서 승리한 명진국따님애기는 '삼승할망(삼신 할머니)'으로 좌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외부에서 들어온 천연두의 신인 '별상신'을 조우하게 됩니다. 별상신과 같은 천연두의 신을 '마누라'라고도 부릅니다. 삼승할망이 된 명진국따님애기가 새롭게 등장한 별상신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마누라본풀이>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누라본풀이>의 각편(version)은 상당히 많이 남아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각편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도의 무속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며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이용옥 심방(제주도의 무당)이 구연한 <마누라본풀이>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이용옥 심방의 <마누라본풀이>에서는 명진국따님애기가 '명진국 할머니'로 명명되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한+어머니'로 '한'은 우리말로 '크다'는 뜻입니다. 한자로 바꾸면 할머니는 대모신(大母神)이 됩니다.


마누라님의 근본이 어디인가 그 근본을 풀어보자.

'명진국 할머니(삼승할망)'가 들으니, '홍진국 대별상'이 인간 자손들에게 마마를 앓게 한다고 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마마를 준다고 들은 것이다. 명진국 할머니는 제주도에 들어온 홍진국 대별상을 찾아가 엎드리고는 인간 자손들에게 마마를 주더라도 너무 많이 주진 말아달라고 빌었다. 홍진국 대별상은 피 냄새나는 길로 다니는 할머니가 부정 타게 자기와 같은 남자 앞을 가로막는다고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는 인간 자손들에게 마마를 더 많이 주었다. 인간 자손들은 얼굴이 얽고 틀어지며 괴로워했다. 명진국 할머니는 그렇게 사정을 했는데도 홍진국 대별상이 인간 자손들에게 마마를 많이 뿌리고 간 것에 대해서 굉장히 화가 났다.

그때 홍진국 대별상의 외아들이 결혼을 했다. 명진국 할머니는 홍진국 대별상의 며느리를 잉태시켰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나도 해산(解産)을 시켜주지 않았다. 홍진국 대별상의 며느리도, 며느리 뱃속의 아이도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홍진국 대별상의 아내가 서신국 대별상을 찾아가서 며느리의 사정을 얘기하니, 서신국 대별상은 명진국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했다. 홍진국 대별상의 아내는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홍진국 대별상은 옷을 차려 입고 명진국 할머니를 만나러 금법당(金法堂) 앞에 가서 엎드려 있었다. 명진국 할머니는 축지법을 써서 홍진국 대별상의 옷이 찢어질 정도로 모진 바람을 일으켰다. 그래도 홍진국 대별상은 계속 엎드려 있었다. 명진국 할머니는 자기 같은 여자를 뭐하러 찾아왔냐고 빈정거렸다. 홍진국 대별상은 잘못했다고 빌면서 며느리와 며느리 뱃속의 아기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리고 바로 인간 자손들에게 내렸던 마마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명진국 할머니가 홍진국 대별상 며느리에게 가서 은 가위를 꺼내 콧등을 톡 하고 건드리니 물이 왈칵 쏟아지며 옥동자가 태어났다. 홍진국 대별상은 손바닥을 치면서 명진국 할머니의 기술이 자기보다 훨씬 좋다며 다시 한번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 이후로 홍진국 대별상과 명진국 할머니를 모시는 법이 마련되었다.


<마누라본풀이>는 <삼승할망본풀이>에 비해 간략한 서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지역의 신화와 비교해봐도 분량이 짧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염병을 몰고 오는 타자를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대 자체가 거부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승할망이 된 '명진국 할머니'는 '대별상'이 처음 제주도로 들어왔을 때 엎드리기까지 하면서 아이들이 천연두를 잘 앓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오히려 대별상은 빈정거리며 명진국 할머니를 무시하기 때문이죠.


<손님굿>과 마찬가지로 <마누라본풀이>의 대별상도 '외부'에서 들어온 신입니다. 내륙이나 섬이나 관계없이 천연두의 신은 언제나 '밖'에서 도래합니다. 그런데 <손님굿>의 손님 신과 다르게 대별상이라는 마누라 신은 환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명진국 할머니에게 피 냄새가 난다고 하며 모욕을 주지요. '피'는 아이가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오는 출산 과정에서 마주치는 생명의 숭고함을 담아내고 있지만, 별상신은 그저 불순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명진국 할머니의 신(神)으로서의 직능이나 정체성 자체를 무시해버리는 발언입니다. 그리고는 제주도의 아이들이 더 심하게 천연두를 앓게 만들어버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명진국 할머니의 태세 전환에 있습니다. 화가 난 명진국 할머니는 대별상의 며느리를 잉태시키고 해산을 시키지 않습니다. 열 달이 지나도 아이를 낳지 못하자 대별상의 마누라와 뱃속의 아이는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대별상은 부랴부랴 자신이 무시했던 명진국 할머니에게 찾아와 바짝 엎드립니다. 처음에는 명진국 할머니가 엎드리더니 이제는 대별상이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둘 사이의 위계가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이죠. 대별상은 제주도의 아이들에게 뿌렸던 천연두도 모두 거두어들입니다. 그때서야 명진국 할머니는 대별상의 며느리를 해산시키고 살려줍니다.


명진국 할머니와 대별상의 관계를 찬찬히 살펴보면, '환대'는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인정 속에서 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호 인정은 상호 의존이며 상호 호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경계는 언제든 무너지고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를 환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별상은 상호성을 무시해버립니다. 충분히 호혜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점을 적대적인 것으로 틀어버립니다. 그러자 명진국 할머니는 대별상을 더 이상 환대의 대상이 아니라 조율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이때 명진국 할머니가 보여주는 대응 방식이 재미있습니다. 대별상에게 직접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대별상의 며느리를 잉태시키는 것이지요. 게다가 해산을 시키지 않음으로써 판을 뒤집어버립니다. 잉태와 해산은 산육신인 명진국 할머니(삼승할망)의 체제에 속해 있습니다. 천연두는 질병의 체제로서 대별상의 영역입니다. 첫 만남에서 대별상이 명진국 할머니에게 보여주는 고압적인 태도는 기존에 제주도에서 이미 자신의 체제를 구축한 명진국 할머니를 밀어내고 천연두라는 질병의 체제로 대체하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명진국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대별상의 승리는 곧 나의 체제를 타자의 체제로 바꾸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타자의 체제 안에서 내가 손 쓸 수 있는 일은 없겠죠. 말 그대로 속수무책(束手無策)입니다.


대별상이 명진국 할머니를 무시하고 제주도에 질병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아이들에게 천연두를 뿌리고 다니자 명진국 할머니는 다시 판을 짭니다. 잉태와 해산으로 구성된 자신의 체제 안에 대별상을 위치시킴으로써 판세를 자신 쪽으로 다시 가져오는 식으로 말이죠. 대별상은 며느리의 임신과 함께 질병의 체제에서 벗어나 잉태와 해산의 체제로 편입됩니다. 그 결과 그렇게 무시하던 명진국 할머니 앞에서 엎드려 빌게 됩니다.


명진국 할머니는 이제 대별상이 몰고 오는 천연두라는 거대한 폭력을 조율할 수 있게 됩니다. 조율의 방식은 타자를 자신의 체제 안에 위치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물론, 타자가 폭력을 휘두르며 나의 삶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구축했던 체제는 어느 정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자의 체제가 아닌 자신의 체제 안에서는 폭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명진국 할머니는 대별상을 자신의 체제로 편입시킴으로써 산육신으로서의 직능뿐 아니라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다스릴 수 있는 치병(治病)의 직능도 가지게 됩니다. 체제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 것이죠.


폭력의 편재성을 인정한다면, 폭력을 통해 자신의 체제를 넓히고 새로운 힘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 고민해봐야 합니다. <마누라본풀이>의 명진국 할머니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폭력을 직면했을 때 손도 못 써보고 그 폭력 앞에 굴복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폭력을 몰고 온 타자의 체제 안에 내가 갇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타자의 체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별상이 아이들에게 실컷 천연두를 뿌리고 다녀도 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명진국 할머니처럼 말이죠. 오히려 폭력을 마주했을 때 그 폭력을 나의 체제 안으로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바이러스를 내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항체를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폭력이 가지고 있는 부정성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만, 그런 부정성을 다시 부정했을 때 '나'의 의미는 더 강해집니다.


<손님굿>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타자는 '손님'이었습니다. <마누라본풀이>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타자는 '마누라'였죠. <마누라본풀이>에서 천연두의 신은 우리의 삶에 잠시 왔다가 돌아가는 '손님'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마누라'입니다. 무조건적인 환대가 불가능했을 때, 그리고 손님처럼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 때, 폭력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나의 체제 안에 폭력을 위치시켜야 합니다.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의 체제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조율'도 '환대'와 마찬가지로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의 한 방식일 수 있습니다.


<손님굿>과 <마누라본풀이>는 그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내 안에 위치한 폭력을 긍정적으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동일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런 긍정성은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이 도출된다고 할 수 있는데, 부정의 과정은 내 삶의 체제를 크게 뒤흔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폭력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내 삶의 안정은 지켜질 테지만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적어도 한 번쯤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수 있는 폭력을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폭력을 자신의 체제 안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체제 안에서 폭력의 조율에 성공한다면 삶의 편폭이 더욱 넓어지고 나의 체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폭력을 경험한 뒤 더 강해진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또 다른 폭력이 다가왔을 때 충분히 그 폭력을 환대하고 조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폭력과 함께 살아가기'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마누라본풀이>는 천연두에 대항하는 신화이지만, 그 대항의 과정에서 타자의 체제가 아닌 나의 체제에서 폭력을 맞이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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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김헌선,「<삼승할망본풀이>의 여신 투쟁이 지니는 신화적 의미」, 『민속학연구』17, 국립민속박물관, 2005.
정제호,「<마누라본풀이>의 전승 맥락과 서사 구성 원리」, 『고전과해석』26,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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