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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Apr 12. 2021

# 5. 폭력과 전염 그리고 희생양

폭력에 대한 사유의 확장

"불순에는 전염성이 있다. 즉 그들 옆에 있으면 곧 그 싸움에 말려들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불순함, 즉 폭력과의 접촉과 전염을 피하는 단 하나의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기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박무호 옮김,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1997.



폭력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성은 바로 전염입니다. 전염은 모방에 기초합니다. <이공본풀이>에서 한락궁이가 원강아미를 겁박하며 아버지의 정체를 묻는 장면을 다시 떠올려봅시다. 한락궁이는 고문에 가까운 폭력을 어머니에게 행사하고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내자마자 사라도령을 찾아가기 위해 서천꽃밭으로 떠납니다. 뻔히 어머니가 제인 장자에게 화를 입을 것을 예상하고 말이죠. 심지어, 자기가 떠난 곳을 절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한락궁이가 태어나기 전에 사라도령이 서천꽃밭으로 떠났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생면부지의 부자(父子)는 묘하게 닮았습니다. 인간에서 신으로의 존재론적 전환을 위해 원강아미를 버리는 것이죠.


아버지를 모방하는 아들의 모습은 서천꽃밭의 꽃감관이 된 아버지에게 소속되기 위한 욕망 그 자체입니다. 타르드(Jeon Gabriel Tarde)에 의하면, 모방은 개인적이기보다 사회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방을 통해 사람들은 공통된 특징을 가지게 되거나 유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집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모방을 일으키는 동적(動的)인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지라르(René Girard)가 언급했듯이, 타인을 따르는 욕망이란 예외 없이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모방과 같은 사회적인 행위는 욕망의 투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게 됩니다. 모방의 결과로 한락궁이는 사라도령이 원강아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똑같이 원강아미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꽃감관에 오르게 됩니다.


<도랑선비 청정각시>나 <안택굿>에서도 모방에 의한 폭력의 가능성이 발견됩니다. 열녀가 되는 것, 효자나 효부가 되는 것은 사회에서 일종의 '본보기'를 제공합니다. 청정각시나 감천이의 부모는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죠. 더욱이 <안택굿>에서는 아들을 살해해서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한 행위가 열녀문, 효부문, 효자문의 기원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열녀, 효부, 효자와 같은 주체로 호명되기 위해 사람들은 폭력을 배태한 이데올로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본보기의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욕망을 표출하고 똑같은 폭력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에는 불순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불순함에는 전염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험적으로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폭력이 유혈사태를 불러일으켰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유혈사태에 쉽게 휘말리게 됩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고,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폭력에 전염됩니다.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서로 '마지막 폭력'을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보복에 보복을 불러일으키며 결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심지어 폭력에 전염된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왜 자신들이 폭력의 순환고리에 휘말렸는지조차 망각합니다. 이런 불순함 즉, 폭력과의 접촉과 전염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곳에서 도망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폭력은 마치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폭력이 불러일으키는 불순함은 폭력을 기피의 대상으로 상정시킵니다. 폭력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거리를 확보하는 겁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행되는 조치가 '격리'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범죄자처럼 격리된 인원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병이 낫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만약 감시의 시선을 피해서 격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들을 향한 공동체의 폭력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푸코(Michel Foucault)가 이야기한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격리는 단순히 '거리두기'에서 머물지 않고, 감시하는 자와 격리된 자 사이에 권력구도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격리된 인원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안택굿>을 분석하면서 두 가지 대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대체는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위기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격리된 인원은 희생양으로 지목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들만 없으면 전염은 사라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그래서 격리의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을 축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물론, 직접적인 축출은 곤란합니다.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보복의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다시 한번 폭력의 악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의 힘을 빌리든, 그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을 선택한 것처럼 만들든 해롭게 보이던 폭력을 이롭게 전환시킬 수 있는 지점들을 모색합니다.


희생양을 향한 해로운 폭력을 이로운 폭력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은 상당히 전략적입니다. 주로 발견되는 전략은 그 희생양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희생양은 폭력의 전염성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떠안고 스스로 사라지기 때문에, '문제를 발생시키는 자(trouble maker)'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peace maker)'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희생양은 곧 신격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런 논리는 신화의 전범(典範) 중 하나로서 희생양을 향한 폭력과 그에 대한 추앙이 기묘하게 결합하는 가운데 폭력이 '이로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게 만듭니다.


물론, 단순히 신화의 전범을 따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양을 향한 폭력은 집단적이기에 모두를 박해자(迫害者)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찾아올 집단의 위기 상황에서 또 다른 희생양을 찾을 것을 알기에, 희생양이 될 '누군가'가 곧 '내'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박해자이자 희생자로서의 자질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는 집단의 분열을 일으키고 공동체를 존속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신화가 그려내는 폭력의 전염과 희생양 만들기라는 프로젝트는 비판적으로 읽어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력을 전면으로 직시하고 그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이런 은폐된 메커니즘부터 파악하고 폭로하는 작업부터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의 정체를 폭로한다고 해서 그 전염성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명의 희생양을 골라 축출하는 방법 대신 다른 방식에 대한 고민이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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