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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Apr 19. 2021

# 6. 폭력의 전염과 그 시원

<짐가제굿>과 죽음의 전염성

"열시왕이 떠날 적에 이 동네 살(煞)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아이고, 그 살이라는 게 엄청 무섭습니다."

지금섬 구연, 임석재‧장주근 조사, <짐가제굿>(1965)



죽음은 인간에게 닥치는 최악의 폭력입니다. 폭력의 강도가 높을 수록 전염도 강해지기 때문에 '죽음'은 가장 불순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에 관해 논할 때 죽음에 대한 탐색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필멸(必滅)의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인생의 '마지막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언제나 미지의 영역에 있습니다. 사후(死後)의 세계는 삶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침의 공간인 셈입니다. 그래서 셸리 케이건(Shelly Kagan)도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풀어야 할 가장 큰 미스테리로 죽음을 꼽은 것이겠죠.


하지만 <도랑선비 청정각시>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신화의 세계에서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도약하는 '청정각시'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냅니다. 저승은 '텅 빈 기표'가 아닙니다. 그 안에도 나름의 체계가 있고 다양한 인물군상이 존재합니다.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지만 주변에서 간접적으로 겪게 되는 죽음을 바라보며, 죽은 이후의 삶이란 무엇일지, 죽음이 이승의 존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영향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의 결과를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 중 하나가 곧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의 세계에서는 죽음의 공간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음과 같은 사건은 한 개인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종종 종교나 사상에 먼저 기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의 많은 신화가 종교의 아우라 속에서 탄생하게 된 것은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속(巫俗)의 세계에서도 수많은 신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짐가제굿>은 함경도의 망묵굿에서 <도랑선비 청정각시> 다음에 연이어 불리는 무당의 노래이자 신화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무당의 노래이기에 '서사무가(敍事巫歌)'라고도 하고, 무속에서 연행되는 신화이기에 '무속신화(巫俗神話)'라고도 부릅니다. <짐가제굿>은 <도랑선비 청정각시>와 마찬가지로 '도랑축원'이라는 큰 거리 안에서 불리는데, 죽음이 이승의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살()을 방지하는 제의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은 보통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을 뜻합니다. '살'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죽음의 불순함과 전염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죠? <짐가제굿>은 그런 '살'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죽음'에 대한 신화적 관점을 제공합니다.


<짐가제굿>은 현재까지 총 3편의 각편이 남아있는 신화입니다. 지금섬, 이고분, 장채순 무당의 각편이 그것이지요. 각편마다 내용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지금섬이 구연한 각편을 중심으로 신화의 줄거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서울에 '김 정승'의 아들, '이 정승'의 아들, '박 정승'의 아들이 살고 있었다. 김‧이‧박 정승의 아들들은 동갑이었고, 절에서 속가제자가 되어서 함께 공부를 했다. 공부를 하다가 세 아들은 세상 구경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백 냥에서 삼백 냥 정도 하는 물건을 지고 길을 떠났다.

세 아들이 강림골에 다다랐을 때, '짐가제'가 자신의 집에서 머물고 가라고 했다. 짐가제는 세 아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보고 욕심이 났다. 짐가제가 김‧이‧박 정승의 아들들을 죽이려고 하자, 짐가제의 아내는 남편을 말렸다. 사실 짐가제 부부는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한동안 기자치성(祈子致誠)을 드리고 있었는데, 살해를 저지르면 그동안 드린 적덕(積德)이 소용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짐가제는 오히려 아내를 위협했다. 짐가제의 아내는 어쩔 수 없이 살해 계획에 동의했다. 결국, 짐가제는 방에 들어가 김‧이‧박 정승의 아들들의 목을 칼로 잘라 죽였다. 그리고 외양간 말판 밑에 시신을 숨겼다.

김‧이‧박 정승의 아들들은 죽은 혼이 되어 저승에 가서 '지부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지부왕은 정월 보름날 밤 샘물에서 사는 금붕어와 은붕어로 다시 태어나라고 말했다. 김‧이‧박 정승의 아들들은 그렇게 금붕어와 은붕어로 환생했다.

어느날 짐가제의 아내가 물 도둑질을 하려고 한 우물에 갔다. 그 우물에서 몰래 물을 긷다가 금붕어를 얻었다. 다른 우물에 가서는 은붕어와 금붕어를 얻었다. 짐가제의 아내는 귀물(貴物)을 얻었다고 하며, 금붕어와 은붕어를 뼈도 남기지 않고 다 씹어 먹었다. 그날 이후로 짐가제의 아내는 그토록 원하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열 달이 지나자 짐가제의 부인은 남자 아이 세 명을 한날한시에 낳았다. 세 아이는 큰 탈 없이 자라서 7살이 되었다. 7살부터 독서당을 지어놓고 공부를 했는데 모두 수재였다. 세 아들은 과거 시험을 보러갔다.

서울에서 짐가제의 세 아들이 과거 시험을 보았다. 그들이 작성한 답안을 보다가 김‧이‧박 정승들은 십 여년만에 자기 아들의 글씨를 다시 본 것 같다며 놀라워했다. 짐가제의 세 아들은 모두 알성급제(謁聖及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짐가제는 잔치를 크게 열었다. 짐가제의 세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짐가제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런데 세 아들은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짐가제가 세 아들을 일으키니 모두 입에 피를 가득 물고 죽어 있었다. 짐가제가 광분하여 칼을 휘두르니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도망갔다. 짐가제는 그날부터 관가에 가서 세 아들을 잡아간 '삼 사재(세 명의 저승차사)'를 데리고 와달라고 호소했다.

관가에는 한쪽 눈이 멀고 한쪽 팔다리에 장애가 있는 '손 사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관가의 원님이 손 사령에게 삼 사재를 잡아 오라고 시키자, 손 사령은 삼 일만 말미를 달라고 했다. 손 사령은 집으로 돌아가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때 손 사령의 아내는 남편에게 '멍텅구리'라고 하며 지혜를 빌려주었다. '기망산 다리' 입구에 가서 음식을 차린 상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손 사령이 아내가 시킨대로 하자 저승 귀신들이 굿을 하는 줄 알고 모두 찾아왔다. 손 사령은 그 중 우두머리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삼 사재를 잡아오라고 했더니, 손 사령은 저승의 우두머리인 열시왕을 모시고 관가로 향했다.

관가에 도착하자 열시왕은 짐가제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열시왕은 짐가제에게 죄가 없느냐고 물었다. 짐가제는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며, 자기 세 아들이 이유없이 죽었다고 억울함만을 호소했다. 열시왕은 관가의 원님을 불러 외양간 말판을 드러내보라고 했다. 짐가제는 떼굴떼굴 구르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말판 아래에서는 썩지 않은 김‧이‧박 정승의 세 아들의 시체가 나왔다. 열시왕은 짐가제에게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렸고, 짐가제의 아내는 톱으로 머리를 잘라 죽였다.

열시왕은 저승으로 돌아갈 때 강림골에 살(煞)이 들지 않게 막아주었다. 그리고 손 사령을 저승 사령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손 사령이 거부하자 열시왕은 손 사령의 혼만 쏙 빼서 저승으로 데려갔다. 남편이 죽자 손 사령의 아내는 슬퍼하며 옷고름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짐가제굿>에서 '짐가제'는 악인(惡人)입니다. '악인'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신화의 제목도 <짐가제굿>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짐가제'가 악인인 이유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김‧이‧박 정승의 세 아들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살해 행위를 기점으로 <짐가제굿>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짐가제굿>의 서사를 시작부터 결말까지 견인하는 인물 또한 악인인 '짐가제'인 셈입니다.


우선, 짐가제의 살해 행위는 김‧이‧박 정승의 세 아들을 원혼(冤魂)으로 만듭니다. 그 세 아들은 원한을 갚기 위해 인간 세상에 금붕어‧은붕어로 환생하여 짐가제의 세 아들이 됩니다. 그리고 짐가제가 가장 큰 기쁨을 느꼈던 잔칫날에 갑자기 죽어버림으로써 복수를 완성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짐가제가 억울해하면서 관가로 찾아가 원님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원님은 손 사령을 시켜 세 명의 저승사자를 찾아오라고 하지만, 어쩌다보니 손 사령은 저승사자의 우두머리격인 열시왕을 이승으로 데려오게 되죠. 열시왕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짐가제를 향해 '과거의 죄'를 묻고, 짐가제와 그 아내를 잔인하게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저승으로 돌아가는 길에 손 사령의 혼을 뽑아서 데려가는데, 이 때문에 홀로 남겨진 손 사령의 아내는 목을 매고 자결합니다.


한 번 발생한 죽음은 그것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이 가지고 있는 전염성은 순환고리를 만들고 악순환을 시작합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원한'입니다. 전염은 원한을 매개로 하여 확산됩니다. 어느 하나의 죽음에서 발생한 원한이 해소되면, 그로 인해 또 다른 죽음과 원한이 나타나는 식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전염에는 인과성이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짐가제의 죄 '때문에' 김‧이‧박 정승의 세 아들이 죽어서 원혼이 되고, 그들의 원한 '때문에' 짐가제의 세 아들이 갑자기 죽고, 짐가제의 세 아들이 죽은 이유를 몰랐기 '때문에' 열시왕이 이승에 등장하게 되고, 열시왕이 짐가제의 죄를 밝혔기 '때문에' 짐가제 부부는 잔인하게 살해당합니다. 죽음이라는 결과가 또 다른 죽음의 원인이 되면서 전염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가제굿>이 말하는 '죽음'은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죽음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늙어서, 병에 걸려서, 사고를 당해서, 운이 나빠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등등. '핑계 없는 무덤 없다'라는 옛말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닐 겁니다. 문제는 수많은 죽음의 이유 중 생자(生者)나 망자(亡者)를 충분히 납득시킬만 한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늙어서 죽었다?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병에 걸려서 죽었다? 같은 병에 걸린 사람 중에 낫는 사람도 있는데?'. 모든 죽음의 이유는 납득 불가능합니다. 더욱이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에 대한 원한은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 그대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온전하지 못한 것이며, 그로 인해 발생한 원한으로 인해 전염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짐가제굿>은 이것을 살(煞)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는 순간 '살'을 맞을 수밖에 없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인과관계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가제의 세 아들이 죽었을 때 잔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짐가제가 광분하자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갑니다. 죽음의 전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 멀리 떨어진다고 해도 어딘가에서는 죽음의 전염이 지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짐가제굿>이 보여주는 해결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열시왕이 직접 나서는 것입니다. 열시왕은 저승으로 돌아가면서 강림골에 살이 들지 않게 막아주겠다고 직접 언급합니다. 짐가제의 살해행위부터 시작해서 짐가제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 때까지의 과정은 열시왕이 봐도 심각해보였나 봅니다. 죽음의 전염성이 그만큼 통제불가능해 보인 것이겠죠. 죽음은 저승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에 저승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열시왕이 직접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짐가제굿>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손 사령과 손 사령의 아내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들도 죽음의 전염에 부여된 인과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손 사령이 열시왕을 이승에 데려왔기 '때문에' 짐가제가 죽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손 사령이 죽었기 '때문에' 손 사령의 아내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열시왕이 분명 살을 막아준다고 했지만, 죽음은 손 사령의 아내에게까지 미칩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죽음의 전염을 막는 것은 열시왕의 발언이 아니라 손 사령 아내의 '자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 사령 아내의 자결은 죽음의 전염을 스스로 끊는 희생행위입니다. 이는 자발적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도랑선비 청정각시>에서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나요? 청정각시가 목을 매는 장면은 손 사령 아내가 목을 매는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청정각시가 남편을 따라 목을 매었듯이, 손 사령의 아내도 역시 남편의 뒤를 따라 목을 매고 죽습니다. 열녀(烈女)로서의 이미지는 부각되지 않지만, 손 사령의 아내가 택한 '자결'은 본질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에서 청정각시의 그것과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손 사령의 아내에게는 '원한'의 대상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 사령의 혼을 빼간 존재가 '열시왕'이기 때문이죠. 원망할 대상조차 이승에 남아있지 않은 손 사령의 아내는 폭력의 방향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립니다. 그 결과 폭력의 악순환 및 죽음의 전염은 중단되지만 손 사령의 아내에게 강요된 모종의 폭력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손 사령의 아내는 자결을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억울한 희생양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짐가제굿>은 죽음이란 기본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이며, 그 때문에 생긴 원한의 인과율 속에서 폭력의 전염이 생긴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염을 중단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아무 죄 없는 손 사령의 아내를 내세웁니다. 그것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어떻게 보면 <짐가제굿>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짐가제의 죄악도, 열시왕의 후속조치도 아닌 손 사령의 아내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의 전염을 끝내는 것은 분명 중요하지만, 희생양을 내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짐가제굿>의 마지막에 짧게 등장하는 손 사령 아내의 자결 장면을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윤준섭, 「함경도 망묵굿 서사무가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유형동, 「<짐가제굿> 무가의 서사 지향과 기능」, 『동아시아고대학』39, 동아시아고대학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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