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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현 Apr 26. 2021

# 7. 죽음의 전염과 희생양(1)

<대감굿>과 신(神)이 된 희생양

"나의 아버지가 전쟁에서 패해서 죽었는데, 이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니 집에 돌아가서 무엇하리."
짐달언은 용천검으로 스스로 목을 잘라 죽었습니다.

지금섬 구연, 임석재‧장주근 조사, <대감굿>(1965)



<짐가제굿>은 '죽음'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전염이 생긴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전염을 끝내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바로 희생양을 앞세우는 것이었지요. 희생양의 역할을 떠안은 인물은 신화의 결말부에서 텍스트 밖으로 투기(投棄)됩니다.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다가 희생양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겁니다. '침묵' 속에서만 죽음의, 그 극단적인 폭력의 전염에 종말을 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가제굿>에서 실질적으로 살(煞)을 막은 것은 손 사령의 아내일 수도 있지만, 텍스트의 문면에서는 마치 열시왕이 그렇게 조치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텍스트의 이면에 위치한 희생양은 더 이상 자신의 서사를 이어나가지 못합니다. 서사가 계속 진행된다면 전염도 다시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생양에게는 두 가지 양가적인 모습이 투영됩니다. 손 사령의 아내처럼 모든 전염의 원인을 자신에게 집중시켜 스스로 희생하는 '투기된 타자'로서의 모습이 먼저 발견되지만, 한편에서는 오히려 그런 전염의 위험에서 모두를 구해냈기 때문에 '구원자'로서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구원자는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세계의 위기를 해결했기 때문에 신화 속에서는 신(神)으로 좌정하기도 합니다. 텍스트 밖으로 '투기된 타자'가 신이라는 '대타자(大他者)'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대타자이기 때문에 영어로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Other'로 표기합니다. 이렇게 희생양(other)이 버려졌다가 다시 신(Other)으로 귀환하는 서사는 생각보다 신화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함경도에서 전승되는 <대감굿>은 희생양이 신으로 모셔지는 대표적인 신화입니다. <대감굿>은 <안택굿>처럼 망묵굿에서 '저승 길'이 아닌 '이승 길'을 닦는 제의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함경도 지방에서는 '대감신'이 '조상신'으로 모셔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터주신, 성주신, 지신 등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조상신도 함께 굿판에 청해서 위무하는 텍스트가 <대감굿>인 셈입니다.


<대감굿>에는 크게 <유충렬전>이라는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을 수용해서 재구성한 각편과 '짐달언'이라는 주인공을 앞세운 각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죽음의 전염과 희생양의 관계' 그리고 '희생양이 신이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후자의 것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옛날 옛 시절에 글에도 있고 율(律)에도 있고 법에도 있는 이야기가 있다.

'짐미련'이라는 사람이 전쟁에 나가 패하고 죽었다. 짐미련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한 상태였다. 열 달이 지나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름을 '짐달언'이라고 지었다. 짐달언이 세 살이 되자 처음 하는 말이 "어머니,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였다. 짐달언의 어머니는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짐달언이 네 살이 되었을 때였다. 짐달언의 어머니가 자다가 깨보니 짐달언이 사라져 있었다. 갯변에 나가보니 짐달언이 총 쏘기, 불화살 쏘기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뭐 하고 있냐고 물으니, 짐달언은 이렇게 연습을 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말했다. 짐달언의 어머니는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짐달언이 열다섯 살이 되자, 다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했다. 짐달언의 어머니는 제사는 누가 모시며, 사당은 누가 관리하냐고 물으며 만류했다. 하지만 짐달언은 천리용마(千里龍馬)를 타고 떠났다. 짐달언이 길을 떠나 '창기산'에 도착하자 동쪽으로 쌀을, 서쪽으로 좁쌀을, 북쪽으로 콩을 한 줌씩 뿌렸다. 그랬더니 동쪽에서는 기마병이, 서쪽으로는 포병이, 북쪽에서는 군사가 일어났다. 짐달언은 군사들을 이끌고 '저 나라'로 출발했다.

두만강에 도착하자, 짐달언은 천리용마를 몰아서 두만강을 한 번에 도약했다. 짐달언을 태운 천리용마의 뒷부분에 두만강의 물이 조금 묻었다.

저 나라로 향하는데, 마귀 할미가 나타났다. 마귀 할미는 짐미련이 자기 말을 듣지 않아서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말했다. 짐달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달라고 했다. 마귀 할미는 길을 가다 보면 '새파란 각씨님'이 나와서 살려달라고 할 텐데, 인정사정 보지 말고 용천검으로 새파란 각씨님을 내리치라고 했다.

짐달언이 저 나라로 가다 보니 마귀 할미의 말처럼 새파란 각씨 님이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외쳤다. 짐달언은 용천검으로 새파란 각씨님을 냅다 쳤다. 알고 보니, 새파란 각씨님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였다.

짐달언이 저 나라에 도착해서 군사들을 맞이했다. 저 나라 군사들은 짐달언이 대추씨만 하다며 비웃었다. 짐달언은 자신의 재주를 보여주겠다며 용천검으로 자신의 목을 잘라냈다. 그러자 적군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넋을 잃었다.

짐달언은 저 나라 군사들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외쳤다. 저 나라 군사들은 짐미련의 묘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짐달언은 온갖 가시들이 가득 찬 길 위에서 이빨로 낫과 괭이를 삼고, 혀로 함지를 삼아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그 자리에서 감장(勘葬)을 했다.

그렇게 복수를 마치고 짐달언은 천리용마를 타고 두만강으로 돌아왔다. 짐달언은 천리용마를 몰아서 두만강을 한 번에 도약했다. 짐달언을 태운 천리용마의 뒷부분에 두만강의 물이 조금 묻었다. 짐달언의 군사들은 틱틱 죽어나가다가, 머루와 달래, 오복 등을 먹고 겨우 살아났다. 짐달언은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짐달언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으니 집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며, 용천검으로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천리용마는 짐달언의 머리를 물고 집으로 찾아갔다. 베를 짜고 있던 짐달언의 어머니는 짐달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살 의지를 잃었다. 짐달언의 어머니는 옷고름에 목을 매어 죽었다.

그 후 짐미련은 배 위의 장군으로 좌정했고, 짐달언의 어머니는 성황신이 되었다. 장군 대감신을 받는 법도 마련했는데, 덕물산 최영 장군을 받는 법을 마련했다.


<대감굿>에서 '죽음'은 2대에 걸쳐서 등장합니다. 하나는 '짐달언'의 아버지 '짐미련'의 죽음이며, 다른 하나는 짐달언의 자결입니다. 짐미련의 죽음은 <대감굿>의 서사를 추동하는 서사적 결핍으로 작용하며, 이 결핍은 <대감굿>을 ‘부친의 죽음에 대한 아들의 복수(復讎)’라는 서사로 이끌어갑니다. 짐미련은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인물이기에, 온전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죽음의 불온전함은 '원한'을 매개로 전염을 일으키기 때문에, 짐달언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죽은 곳은 두만강 북쪽에 있는 '저 나라'입니다. '저 나라'는 말 그대로 '저승'의 공간으로 이승과는 다른 삶의 논리를 보여줍니다. 불에 타고 있는 '새파란 각시'를 살려주면 죽음을 맞이하고, 죽이면 살아날 수 있는 곳입니다. '저 나라'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용천검으로 스스로 목을 쳐야만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저승에서는 죽음이 삶을 부르고, 삶이 죽음을 부릅니다.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자면, 사즉생(死卽生), 생즉사(生卽死)인 셈입니다. 그런 논리 안에서 폭력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대감굿>에서는 죽음의 불순함이 꽤 직접적으로 묘사됩니다. 일례로, 짐달언이 '저 나라'로 가기 위해 천리용마를 타고 두만강을 뛰어넘었을 때 뒤쪽에 물이 조금 묻었다고 표현됩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돌아올 때에도 뒤쪽에 물이 조금 묻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강을 건너갔다 오는 과정에서 굳이 물이 묻었다는 장면을 반복해서 삽입한 것은 '저 나라'로의 횡단 과정에서 죽음의 기운과 직접적으로 접촉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죽음과의 접촉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이후에도 죽음의 불순함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더 나아가 불순한 것이 가지고 있는 전염의 위험성에서 짐달언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전염은 짐달언 개인에게만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전장을 함께 누볐던 짐달언의 군사들도 두만강을 건너오는 과정에서 갑자기 탁탁 죽어갑니다. 건너갈 때는 멀쩡하던 군사들이 건너올 때 이유 없이 죽어간다는 설정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폭력의 전염성과 위력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짐달언은 폭력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듭니다. 복수는 끝났지만 폭력은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공간이기도 한 '저 나라'에서 또 다른 복수를 위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몰고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짐달언은 용천검으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쳐서 죽습니다. '저 나라'에서 적군을 위협할 때 쓰던 방식 그대로입니다. 원수를 갚기 위한 폭력의 방식을 그대로 자신에게도 적용해서 폭력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전환시키는 모습입니다. 해로운 폭력을 이로운 폭력으로 돌리는 것은 폭력의 원인을 단 한 사람에게 덧씌우고 그 인물을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합니다. '자발적인 죽음'은 그런 희생의 한 형태로서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는 자기희생의 신화입니다. <대감굿>에서는 짐달언의 자결을 통해 그런 자기희생의 신화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짐미련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짐달언의 죽음으로써 해소됩니다. 짐달언은 모든 죽음의 전염을 자신의 몸에 집중시키고 죽음으로써 최영 장군과 같이 대감신으로 좌정하게 됩니다. 최영 장군은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좌정한 대감신으로, 주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당이 신으로 모십니다. 최영 장군 또한 온전치 못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짐미련과 겹치는 부분이 있고, 공중을 향해 자기 목을 베어도 다시 달라붙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저 나라 군사들 앞에서 위용을 보이던 짐달언의 형상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변방에서 외적을 물리쳤던 장군으로서의 위용은 전장에서 활약한 짐미련-짐달언 부자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대감굿>은 망묵굿에서 본격적인 망자 천도를 하기 전에 온전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조상을 위로하고, 대감신을 모시기 위한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부자(父子)의 관계로 치환함으로써 죽음의 불순함을 제거한 상태로 대감신을 모실 수 있는 제의적 토대를 <대감굿>이 마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감굿>을 부름으로써 실제로는 행하지 못했던 후손들의 의무 즉, 온전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조상의 시신을 제의적 행위를 통해 수습하고 위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감굿>에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죽음이 남아있습니다. 결말부에서 짐달언의 어머니 또한 자결을 하기 때문입니다. 천리용마가 집으로 가져간 짐달언의 머리를 보고 짐달언의 어머니는 옷고름에 목을 매고 스스로 죽음을 택합니다. <짐가제굿>에서 남편이 죽은 것을 보고 자결한 손 사령의 아내와 동일한 모습입니다. 짐달언의 어머니가 보여준 극단적인 선택은 폭력의 악순환을 막는, 죽음의 불순함이 전염되는 것을 최종적으로 막는 손 사령 아내의 자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짐달언의 어머니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후에야 더 이상 해로운 폭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짐미련의 해원(解冤)이 이루어지고 짐달언이 대감신으로 좌정했지만, <대감굿>에서는 침묵 속에 이루어진 짐달언 어머니의 마지막 죽음이 위치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기희생의 신화는 희생양을 신으로 모심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짐달언이 용천검으로 장렬하게 자결하고 대감신이 됨으로써 <대감굿>의 폭력은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투기된 타자가 신이라는 대타자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투기되는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짐달언의 어머니는 '성황신'으로 모셔졌다고 서술됨으로써 짐달언처럼 신으로 좌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짐달언과는 달리 짐달언의 어머니가 신으로 좌정하는 과정은 어색하기만 합니다. 마치 <이공본풀이>에서 '원강아미'가 '저승어멍'이 되었을 때 느꼈던 그런 어색함과 같습니다.


신화는 신에 대한 이야기이자 신의 근본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믿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신화를 읽다 보면 신성한 존재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대감굿>을 읽는 과정에서 스스로 영웅적 죽음을 선택하고 죽음의 전염을 끊어냄으로써 대감신으로 좌정하는 짐달언의 모습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어색하게' 신으로 좌정하는 인물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온전하게 포착했을 때 자기희생의 신화 속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폭력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전염의 종결은 어떤 '영웅'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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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더글라스, 유제분‧이훈상 옮김,『순수와 위험』, 현대미학사, 1997.
권태효,「함경도 서사무가에 나타난 <아기장수전설>의 수용 양상」, 『한국 구전신화의 세계』, 지식산업사, 2005.
신호림,「함경도 서사무가 <대감굿>에 나타난 죽음의 두 층위와 제의적 의미」, 『한국고전연구』44, 한국고전연구학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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