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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속의 두더지 Aug 14. 2023

다음주가 방학입니다

개학을 하루 앞두고 올려봅니다

올해는 유난히 무기력하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작년 한 해, 복직한 일 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작년의 나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많이 주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사랑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약자임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 좋은 어른이 되어 주고 싶었다. 매달 학부모에게 짧은 편지를 건넸다. 그리고 어린이날에는  편지를, 방학식에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건넸다. 어른이 되었을 때, 그 하루 만이라도 행복한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매일 한 시간이라도 아이들이 신나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그 한 시간이 아이들을 지켜줄 거라고, 거름이 되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매일 한 번씩이라도 아이들에게 칭찬을 해주어야지 결심했고 다정하게 한 마디라도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해  교원평가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따끔하게 야단쳤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보았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글을 쓴 아이의 엄마는 생활 태도가 좋은 아이의 엄마임을. 그리고 속으로 말한다. 따끔하게도, 야단도 칠 수가 없는데.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올 해의 나는 3월이 되기 전 교직원 보험을 들었다. 변호사비를 지원받을 수 있고 일을 하지 못할 경우 하루에 몇 만 원을 지원해 준다는 그 보험. 노조를 들었고 그 어떤 부정적인 언사를 하지 않는다. 늘 녹음기가 틀어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한다. 차갑고 친절한 말로 수업을 한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알았다. 화가 난 말속에 따뜻한 애정이 있음을. 친절한 말이 얼음같이 차가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해의 나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해의 나는 야단치지 않는다.  해의 나는 글씨를 예쁘게 쓰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해의 나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  해의 나는 아이들에게 농담을 하지 않는다.  해의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지 않는다. (않는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


꽃 같은 후배 교사가 죽었다. 밤새 최신순 기사를 검색한다. 그 누구도 1학년 담임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력 10년이 된 나도 나이스 업무를 쉽게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 같이 학부모의 날 선 전화를 받았을 것임을. 교감, 교장조차 사실은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관리자도 악성 민원에 정신과를 다니고 있음을, 그들도 교직원 보험을 들어놓았음을 나는 서글프게도 잘 알고 있다.


올해 3,4월에는 남편을 붙잡고 매일같이 얘기했다. 너무 억울하다고. 정말이지 너무 억울하다고. 나는 왜 교사라는 직업을 최고점에 잡았을까. 그냥 일반대학에 가서 대기업에 들어갈걸. 누칼협이라는 조롱에도 난 왜 이 직업을 그만둘 수 없을까. 5월 봄이 되었을까. 나는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나는 서비스직이다. 나는 나의 고객님이 듣기 싫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매뉴얼을 안내하고 또 반복한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 사회는 희망이 없구나 포기한다. 이 사회가 10년 뒤에 똑같이 대갚음당할 거라고. 이렇게 내 자식만 귀하게 키운 부모들은 딱 우리 교사 같은 처지가 될 거라고. 아니 돼야만 한다고. 내 말을 들은 남편은 무섭다고 말했다. 서슬 퍼런 내 이야기가 저주같이 들렸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이들이 “너희는 방학 때 놀잖아”라고 말하는 그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꽃 같은 나이의 신규 교사가 죽었다. 경력이 있었으면 병가라도 휴직이라도 썼겠지. 일단 살고는 보자라고 말해줬을 그 무엇도 하지 못하고 교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교사인 친구와 나는 말했다. ‘방학 때까지만 버티지. 방학이라도 좀 보내보지. 맛있는 것도 먹고 예쁜 것도 보고 잠깐이라도 숨 좀 돌리지.’ 남들이 놀고 월급 받는다는 방학이 교사에게 마지막 숨통인데. 마지막 마지노선인데.


아무 때나 울려 되는 전화에 나는 모르는 번호 전화는 절대 바로 받지 않는다. 하루 종일 말소리에 시달리는 나는 혼자 있는 차 안에서도 라디오를 틀지 않는다. 밤 열 시에 울리는 전화를 쉽사리 받지 못하고 밤새 무슨 일이었을지 생각하며 잠을 설친다. 그 무엇으로 전화가 와도 놀라지 말자며 다짐을 하지만 역시나 쉽지 않다. 어느 정치인이 말한 것처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쉽게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생활인이며 20년 가까이 나의 생활터전이 된 이곳, 학교를 쉽게 떠날 수가 없다.


여전히 어리석게도 마지막 희망을 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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