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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

by 김남정

젊었을 때 나는 출근해야만 '일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정해진 시간에 집을 나서 정해진 건물에 들어가 일하고, 월급이라는 결과를 받아야만 사회의 일부로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일은 곧 생존이었고, 그 생존을 위해 내 시간을 기계적으로 내어놓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이라는 단어가 내가 이해하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면서였다. 그때 떠올랐던 인물이 서머싯 몸의 <면도날> 속 래리였다.



래리는 19세기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다. 전쟁에 참전했고, 죽음을 가까이에서 여러 번 목도했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미국은 호황을 맞고 있었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라고 조언했고, 그 길이야말로 삶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래리는 그 흐름에서 한 발짝 비켜섰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고 싶은 마음 하나로 길을 떠났다. 2~3년 동안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좋은 시절에 왜 취직하지 않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낼 건지" 묻곤 했다.

여자 친구 역시 그런 그에게 묻는다.

"그래서, 뭘 찾은 거야?" 하지만 래리는 담담하게 말한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마 오 년이나 십 년 뒤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래리가 보내던 그 시간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었다. 그는 책을 읽고, 사유하고, 마음의 방향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가난했지만 시간을 확보하려 했고, 돈을 써서라도 자신을 이해하는 길을 선택했다. 겉에서 보기에는 무위(無爲)에 가까웠으나, 그 속에서는 자신을 찾아가는 더 깊은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지금 당장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해도 불안해하지 않는 태도,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믿음. 그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시간과 멈춤의 가치를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이 장면은 시간을 지나면서 내 삶과도 닮아 보였다. 나 또한 어느 시기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들의 볼 때는 시간이 늘 비어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출근하지 않고, 정해진 업무도 없고, 누군가에게 보일 만한 성과도 없다. 매일 시간이 비어 있는 듯하다. 바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초조했던 날들도 있었고, 쉬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내 하루를 들여다보면, 이 단순한 시간들 또한 분명한 '일'의 형태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방향을 천천히 조명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질문을 던지는 시간들이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내면에서는 어떤 변화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읽어두고 싶었던 책들을 천천히 읽었고, 글을 쓰며 오래 미뤄두었던 감정들과 마주했다. 숨을 고르며 걷는 동안, 작은 것들에 마음이 움직이는 감각이 회복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쉬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 일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오해받기 쉽고,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변화는 조용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젊었을 때 내가 생각하던 일은 외부에서 확인되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일이란 "나를 나답게 만드는 모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직업의 이름이 없어도, 돈을 벌지 않아도,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삶을 더 분명히 바라보기 위해 멈추는 것도 일이고, 마음속 질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일이다.



꿈도 그렇다. 예전엔 꿈이란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라고 여겼다면, 이제는 과정 속에서 천천히 드러나는 풍경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꿈은 서두른다고 빨리 오지 않는다. 때로는 다시 돌아서 오기도 하고, 멈춤을 통과하며 새로운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학입시를 앞둔 학생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 인생의 모든 시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조심히 말해 주고 싶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의 멈춤이 실패가 아니라고. 겉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중요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래리의 시간이 결국 그를 다른 삶으로 이끌었듯, 우리의 멈춤 역시 어디론가 이어지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것이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언젠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나는 모든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런 시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생각과 방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돌아보는 일은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한 일이고,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려본다. 꿈은 어느 날 갑자기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내 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리고 이 느린 시간이 내 꿈을 향해 가는 또 하나의 길이라는 것도. 보이는 움직임만이 일이 아니라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 또한 삶을 이루는 중요한 일이라고. 그래서 지금의 나는 조용히 말할 수 있다.

그래, 그렇게 살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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