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나를 위한 말] 연말이 되면 내년을 살아낼 문장을 고르며
연말이 되면 나는 늘 한 해를 설명해 줄 문장을 고른다. 그 문장은 내가 지나온 흔적을 천천히 정리하는 손잡이가 되고, 새해를 건너갈 작은 등불이 된다.
[문장 1] 살아낸 이야기를 다시 써가며 살아간다
올해를 마무리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문장이 있었다. 미국의 유명 작가 조앤 디디온이 1979년 발표한 에세이집 <The White Album>의 첫 문장이었다. 아쉽게도 국내에는 정식 번역본이 없다.
"우리는 살아낸 이야기를 다시 써가며 살아간다."
(The stories we tell ourselves are the stories we live.)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We tell ourselves stories in order to live)
여러 번 곱씹어 온 문장이다. 지나온 시간을 단순히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쓴다'라고 말한 점이 깊이 남았다. 살아온 시간을 되읽어야 할 때, 그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붙들어야 할지 막막할 때,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버텨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디디온은 그 단순한 진실을, 잔잔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장으로 건넨다. 되돌아보면 올해 나는 수없이 이 문장을 증명하며 살아왔다. 같아 보이지만 다른 하루, 반복되는 듯하지만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 상실과 회복이 교차하던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내 이야기를 고쳐 쓰고 있었다.
2025년은 내게도 그런 해였다. 올해와 내년 두 딸의 결혼을 연달아 준비하며 마음속의 많은 문장들을 지우고 새로 쓰는 기간을 보냈다. 축하와 뿌듯함 뒤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따라왔고, 그 감정은 예상보다 오래 머물렀다.
작은딸이 먼저 떠난 빈자리를 채우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큰딸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 역시 쉽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고쳐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떠나며 나의 역할도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마음이 겨우 자리 잡는가 싶을 때 남편의 아킬레스건 수술이 갑작스럽게 닥쳤다. 나이 들수록 몸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다른 언어로 말을 건넨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병원 복도에서 수술 종료 소식을 기다리던 몇 시간 동안, 일상이 얼마나 유연하게 나를 지탱해 왔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보면, 그 시간들을 버티게 한 것은 누군가에게 들려줄 만한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루하루의 작은 장면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쓰며 살아온 힘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조심스럽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맞추고 있다. 그렇게 다시 하루를 쓰고, 다시 의미를 붙여가며 살아간다.
[문장 2] 시간이 흘러야 알게 되는 것들
흔들릴 때마다 떠올렸던 또 하나의 문장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다."
이 문장을 떠올리면 늘 베를린의 겨울 공기가 스친다. 2022년 겨울, 베를린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걷던 순간이다. 한국보다 이르게 찾아온 겨울밤, 광장을 가득 울리던 계절의 음악, 나무 조형물 사이 비친 수백 개의 노란 불빛들이 점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추운 공기 속에서도 뜨거운 글뤼바인을 들고 웃었다. 그곳에는 이상하게 따뜻한 기운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좋은 겨울의 기억'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아와 보니, 그 여행은 내 안에서 또 다른 의미로 자라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상황을 상상할 수 없었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혹독한 계절을 버티게 하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빛을 향해 매일 조금씩 걸어가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행의 의미가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드러나듯 우리의 삶도 시간이 흘러야 이해되는 문장들이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베를린의 그 겨울이 왜 지금 이토록 나를 지탱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행은 끝나도 그 여행이 남긴 감각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전혀 다른 자리에서 의미가 되어 되돌아온다. 그 덕분에 올해의 삶을 견디는 방식도 조금은 달라졌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돌아와 보니, 그 겨울의 나는 분명 다독임을 받고 있었다. 한 해의 끝, 낯선 도시의 공기 속에서, '지금 여기의 나'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고, 다시 살아갈 힘을 몰래 충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나를 미래의 나에게 데려다주는 통로였던 셈이다. 그 이후로 나는 계절이 바뀌는 일에도 다른 의미를 붙이게 되었다.
겨울이 오면 움츠러들기보다,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될 작은 온기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올해와 내년 딸들의 독립과 남편의 수술을 지나며 다시 그때의 생각을 떠올렸다. 마음속에서도 늘 계절이 움직이고, 그 계절을 어떤 이야기로 채워 넣을지는 내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과 허전함 속에서도 나만의 불빛을 하나씩 켜보려 했다.
소박해도 좋은 내년의 문장
디디온의 문장과 김영하의 문장을 나란히 두고 보면, 사람은 살아낸 이야기를 나중에 다시 써가며 앞으로의 시간을 버텨낸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버티는 힘은 밖의 거대한 격려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내가 지나온 길에서 채집한 장면들, 그 조각들을 다시 읽고 해석하는 능력에서 온다. 어쩌면 2026년을 버티게 할 '한 마디'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렇게 말하면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이미 많은 이야기를 건너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써 가며 또 살아낼 것이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불의 기운이 강하다는 해라고 한다. 사람들은 불을 두려움과 파괴의 이미지로만 떠올리지만, 나는 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불은 무엇을 태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지나온 경험이 재가 되어 새로운 삶의 토양을 만들듯, 우리 삶도 그렇게 다시 써지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올해 내가 겪었던 변화들도, 시간이 지나면 훗날의 나를 성장시키는 재료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26년이 불의 해라면,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다시 태어나야 할까.
다시 한번 디디온의 문장을 떠올린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이야기한다. 그러니 2026년의 나는, 다시 쓰는 이야기로 또 한 해를 버틸 것이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이며, 그 이야기는 결국 나를 살려낼 것이다.
그래서 새해를 앞두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올해 나는 어떤 문장을 다시 썼는가. 그리고 내년에는 어떤 문장을 첫 번째 줄에 놓고 싶을까. 그 문장은 아주 소박해도 좋다.
"하루를 견디는 데 필요한 만큼의 빛을 찾을 것."
병오년의 불이 우리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앞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라며 내 이야기를 다시 한 줄 적는다. 내 삶의 다음 장면을, 다시 살아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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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88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