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지하철, 딸은 엄마의 시를 발견했다

서울 지하철역 안전문에 걸린 한 사람의 문장, 마음 한 편이 따뜻해졌다

by 김남정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휴대전화 알림은 잦아지고 마음은 바빠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수고했다'는 말과 '고생 많았다'는 인사가 오가지만, 그 말들이 오래 마음에 머무는 일은 드물다. 그런 와중에 지인에게서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서울시 지하철 공모전, 시 게재 오늘 통보가 왔어요. 이 역들을 지나다가 눈에 뜨면 한 번 봐주세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축하의 말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편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대단한 상도, 요란한 수식어도 없었지만, 그 소식은 연말 인사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조용히 써 내려간 시 한 편이, 서울의 지하철역 안전 문에 걸리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딸의 하루와 겹친 엄마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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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인사처럼 느껴진 소식. ⓒ aaronburden on Unsplash


지인이 참여한 공모전은 '2025년 서울 시(詩) 지하철 공모전'이다. 응모 자격에는 제한이 없었고, 한 사람당 한 편만 낼 수 있었다. 형식은 단출했다. 제목과 이름을 제외하고 15줄 이내,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했다. 짧은 글 안에 일상의 언어와 공공의 공간을 함께 담아야 하는 시였다.


지인은 오래전부터 글을 써왔지만, 당선을 목표로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보여주기 위한 문장보다,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한 문장을 더 많이 써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난달 모임에서 만났을 때 공모전에 당선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잘했어요"보다는 "정말 축하해요. 용기 내셨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건넸다.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삶에, 마감과 심사를 견디는 일은 또 다른 결심이기 때문이다.



선정 발표는 가을에 있었고, 지하철 승강장 게시 위치 통보는 12월에 이뤄졌다. 선정 소식 이후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 따로 있었다. 어제 지인의 딸이 퇴근길에 지하철 승강장에서 우연히 엄마의 시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 보내왔다는 이야기였다.



늘 지나치던 안전문 앞에서, 엄마의 이름과 시 제목을 마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인은 그 사진을 내게 다시 전해주며 "퇴근길에 봤대요"라고 덧붙였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약속하지 않아도, 그렇게 삶의 한가운데서 만난 시. 엄마가 써온 시간들이 딸의 하루와 겹쳐진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시가 왜 지하철 승강장에 게시 됐는지 알 것 같았다. 집 안에서, 책상 앞에서, 혼자 써 내려간 문장들은 결국 밖으로 나와 누군가의 퇴근길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가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키워온 것들과, 딸이 견뎌온 하루가 같은 공간에서 스쳐 지나간 것이다.



도시의 일상과 만난 한 사람의 문장



지하철은 수많은 어머니와 딸이 스쳐 가는 공간이다. 함께 서 있기도 하고, 각자의 시간표를 안고 따로서 있기도 한다. 말없이 밥을 챙겨주던 손, 늦은 귀가를 기다리던 마음, 아무 말 없이 하루를 넘겨주던 날들. 이 시는 조용히 불러낸다. 키운다는 일은 누군가를 위해 사는 일인 동시에, 결국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사실은 날마다
지친 나를 돌보는
너희들."


시의 마지막 연은 어쩌면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 각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처럼 읽힌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키우며 여기까지 왔고, 동시에 누군가에게 길러지며 하루를 건너왔다. 그 사실을 잊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이, 이 짧은 시의 역할일 것이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올해도 참 힘들었다"라고. 그 말은 대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 뒤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끝까지 출근한 딸의 하루, 그 하루를 생각하며 글을 쓰던 엄마의 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 자리를 지켜온 시간들. 지하철을 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하루를 안고 움직인다.



그래서 이 시가 지하철역에 게시된다는 사실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한 사람의 문장이 도시의 일상과 만나고, 그 문장이 다시 가족의 하루로 돌아오는 일. 퇴근길에 딸이 우연히 발견해 찍어 보낸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시는 비로소 삶의 자리에 내려앉는다.



연말의 따뜻함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이렇게 스쳐가는 하루 한복판에서, 서로의 시간을 알아보는 순간에서 온다. 지하철 승강장에 걸린 그 시처럼,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마음으로.


#지하철 #서울시 #시 퇴근길 #어머니와딸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9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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