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갔느냐보다, 어디에서 나를 만났는지에 대하여
나는 뭔가 이질적인 것들이 한자리에 머물며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어제 쌓인 눈이 화창한 햇볕 아래서도 서두르지 않고 남아 있는 오늘 같은 날씨. 겨울과 봄 사이 어딘가에 멈춰 선 듯한 이런 날에는, 괜히 마음이 들뜬다. 가능한 먼 곳으로 나를 보내, 익숙한 자리를 벗어나 낯선 상황 속에 뚝 떨어뜨려 놓고 싶어진다.
다행히 아킬레스건 재활이 순조로운 남편과 함께 이제 산책도 한다. 며칠 강추위에 얼음 낀 한강을 보며 산책 길을 걸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를, 뽀드득 소리를 내며 둘이 나란히 걸었다. 발아래 소리는 분명 우리 동네 겨울이었지만, 마음은 마치 멀리 여행을 온 듯했다. 익숙한 풍경도 걷는 내 마음이 달라지면 낯설어질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느꼈다.
가끔은 세계지도 위에 내 걸음을 옮겨놓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꼭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좌표 하나를 마음속에 찍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다른 곳에 다녀올 수 있다. 그날은 그런 여행에 가까운 아침 산책이었다.
마침 그때, 작년 오월 결혼한 둘째 딸 부부에게서 카카오톡 알림이 왔다. 스페인을 지나 지금은 포르투갈에 있다며 사진 몇 장과 함께 안부를 전해왔다. 비 오는 포르투갈의 공기가 유난히 맑고 좋다고, 지금 이 순간이 참 행복하다고 했다. 사진 속 거리와 하늘에서 몇 해 전 포르투갈 여행 기억이 떠올랐고, 딸부부의 행복한 여행이 전해져 왔다.
나는 이곳에서, 딸 부부는 지구 반대편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건너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선명해졌다. 그들이 이번 여행에서 가능한 한 많은 장소를 체크하지 않기를, 대신 깊이 느낀 장면 몇 개를 마음에 오래 남기기를 바랐다. 많이 본다는 것은 결국 목록을 지우는 일에 가깝지만, 깊이 느낀다는 것은 자기 안에 무엇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골목에서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는지, 그때 마음이 왜 조용해졌는지. 그런 기억 하나만 남아 있어도 그 여행은 이미 충분하다. 굳이 다음 장소를 찾지 않아도 될 때, 발걸음과 함께 마음도 멈출 수 있을 때 허락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행복에 가장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여행을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여기서 걷는 산책이든, 지구 반대편 낯선 도시든, 중요한 건 어디까지 갔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나를 만났느냐라는 질문이다. 여행은 거리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간결하게 처리된 독백일 때 가장 넓어진다. 주머니를 채워 돌아오는 일이 아닐지라도, 영혼은 흐르는 강가에서 잠시 멈춰 서 있을 때, 혹은 아무 이유 없이 한 골목을 오래 바라보다가 전율을 느낄 때 비로소 살아난다. 그런 순간이 삶 속에 스며들 때, 여행은 추억을 넘어 활력이 된다.
딸부부가 보내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나는 나에게 묻는다. 여행은 어떻게 내 인생의 기억이 되었고, 다시 살아갈 힘이 되었는지를. 행복한 장면 너머에 외로움이나 불안이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낯선 도시에서 문득 말을 걸 사람이 간절해지는 그 순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멈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멀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다시 한번 나를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일상에세이 #여행의 의미 #겨울산책 #오늘의 사유 #삶의 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