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기차의 꿈>과 <철도원>, 상실 이후에도 남아 있는 사랑

by 김남정
image.png ▲철도원영화 포스트네이버 영화



<철도원>이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래전 이 영화를 보고 적어두었던 기록 공책을 펼쳤다. 다시 극장에 갈 계획은 없었다. 다만 그 영화가 남겨둔 장면과 감정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그러다 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기차의 꿈>을 떠올리게 됐다. 올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 남편이 고른 영화다.



두 영화는 제작된 시대도, 나라와 문화도 다르다. 그럼에도 기억 속에서 장면 하나가 겹쳐졌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마지막에 선택한 동작이 같았다는 사실, 말이 아니라 포옹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순간이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더 선명해진 이 공통점은, 두 영화가 상실 이후의 삶을 얼마나 닮은 질문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우연처럼 다가왔다.



내 기억 속의 <철도원>과 최근에 본 <기차의 꿈>이 겹쳐진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두 영화 모두에서 기차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을 고정시키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닿게 된다. <기차의 꿈>의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에게 기차는 이동의 상징이기보다 생존의 조건이다, 철로를 놓고 숲의 나무를 베며 살아간다. 문명을 확장하는 이 노동은 그를 자연 속으로 불러내고,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게 만든다.



반면 <철도원>의 오토 마쓰에게 기차는 이동이 아니라 정착에 가깝다. 홋카이도의 작은 시골역은 그가 평생을 떠나지 않는 자리이며, 그의 시간은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맞춰 고정된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남자의 삶은 결국 기차라는 시스템 위에 올려진 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상태로 닮아간다.


image.png ▲기차의 꿈넷플릭스 영화 포스트넷플릭스


기차라는 구조 위에 놓인 삶은 보통 이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 두 영화의 남자들은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그들은 떠나지 않는다. <기차의 꿈>에서 로버트는 아내 글래디스와 어린 딸을 얻으며 비로소 정착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은 화재로 한순간에 사라진다. 아내와 딸을 잃은 뒤에도 그는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새로운 터전을 찾거나, 과거를 지우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철도와 숲 주변을 떠돌며, 그가 살아온 방식 그대로 시간을 견딜 뿐이다.



<철도원>의 오토 마쓰 역시 마찬가지다. 병으로 아내를 잃고, 이어 하나뿐인 딸마저 떠나보낸 뒤에도 그는 역을 떠나지 않는다. 폐선이 결정된 이후에도 마지막 날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이 머묾은 체념이나 고집이 아니라, 상실 이후에도 삶을 이어가기 위한 태도처럼 보인다.



두 영화에서 비극은 과장되지 않는다. <기차의 꿈>에서 화재는 길게 설명되지 않는다. 불행은 이미 벌어진 사건으로 남아 있고, 영화는 그 이후의 시간을 따라간다. <철도원>에서도 딸의 죽음 앞에서 오토 마쓰는 울부짖지 않는다. 다시 제복을 입고, 평소처럼 근무에 나선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상실은 삶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대신 삶을 더 길고, 더 조용한 시간으로 만든다.



이 침묵의 시간을 두 영화는 풍경으로 채운다. <기차의 꿈>은 데니스 존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실사 영화로, 장면들이 문장처럼 이어진다. 광활한 산맥과 숲, 눈 덮인 자연으로 로버트의 고독을 품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보는 경험에 가깝기보다, 읽는 감각에 가깝다. 말보다 시간과 공간이 먼저 다가온다.



<철도원>의 홋카이도 설경 역시 인물의 마음을 대신 말한다. 눈 쌓인 플랫폼과 적막한 선로는 슬픔을 밀어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두 영화 모두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는 힘을 지닌다.



영화를 보며 떠올린 것은 특별한 개인의 경험이라기보다, 일상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생각들이었다. 우리는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비교적 쉽게 떠나라고 말한다. 잊으라고, 정리하라고, 다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현실의 시간은 그렇게 단정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사랑했던 자리를 곧바로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고, 관계가 끝난 뒤에도 그 자리에 머무는 감정과 습관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두 영화 속 남자들이 선택한 머묾은 비극적인 고집이라기보다, 삶이 스스로를 지탱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두 영화는 같은 장면으로 수렴한다. 포옹이다. <기차의 꿈>에서 로버트는 죽은 아내와 딸을 다시 만난다.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 기억과 환영의 경계에 놓인 순간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두 팔로 그들을 끌어안는다. 이 포옹은 재회의 기쁨이 아니라, 평생 품고 살아온 사랑의 형태다.



<철도원>에서도 오토 마쓰는 마지막 순간,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온 딸을 만난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껴안는다. 이 장면은 기적이라기보다,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하며 살아온 삶이 응축된 결과처럼 보인다.


이 포옹들이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사랑은 떠나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꿀 뿐이다. 함께 살던 시간에서, 기억으로, 그리고 몸의 감각으로 남는다. 두 남자는 이후에 다른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다. 상실을 새로운 관계로 덮지 않고, 한 사람을 사랑한 채 살아간다. 빠른 회복과 재시작을 요구하는 시대에, 이 느린 선택은 낯설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기차는 떠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는다. <기차의 꿈>과 <철도원>은 그 남겨진 삶을 조용히 껴안는 영화다. 말 대신 풍경으로, 사건 대신 시간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포옹으로. 두 영화는 묻는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그리고 담담히 답한다. 계속된다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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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202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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