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home 사이에서

명절이 끝난 자리에서 묻게 된 것들

by 김남정

며칠간 부모님 댁과 우리 집에서 북적이던 식탁이 조용해졌다. 전을 부치던 냄새와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집 안은 갑자기 넓고 조용하다.

아이들과 윷놀이를 하며 한바탕 웃고, “도다!” “윷이다!”를 외치며 괜히 더 크게 기뻐하던 시간. 떡국을 나눠 먹고, 배가 부르다며 소화도 시킬 겸 근처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익숙한 동네 길을 천천히 달리며 겨울 하늘을 함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봄이다.


며칠은 그렇게 흘렀다.


그리고 이제,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이 닫히고 난 뒤의 고요는 늘 생각보다 깊다. 조금 전까지 북적이던 집 안에 정적이 내려앉는다. 웃음소리는 기억으로만 남고, 식탁 위에는 사용한 그릇 대신 빈 공간이 남는다. 그때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같은 ‘집’을 이야기하고 있었을까.


영어에는 HOME과 home이 있다. 대문자로 쓰인 HOME은 어쩐지 변하지 않는 근원처럼 느껴진다. 태어나 자란 자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가 무엇이 되지 않아도 이미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반면 소문자 home은 조금 다르다. 지금의 내가 머무는 곳, 나의 선택과 책임으로 꾸려가는 자리. 내가 오늘을 살아내는 공간이다.


명절 동안 우리가 모였던 그 집은 HOME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래된 식탁과 부모님의 손길이 남은 부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공간. 그곳에서는 애써 단단해질 필요가 없다. 실패해도, 흔들려도, 그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


하지만 명절이 끝나고 다시 돌아온 각자의(나의) 집은 home이다. 스스로 정리하고, 스스로 불을 켜는 공간이다. 여기서는 나를 대신해 삶을 감당해 줄 사람이 없다. 대신, 내가 나를 책임진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율리에는 자신의 집에서 혼자 글을 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방황하던 그녀가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 그 장면이 지금 이 순간 불현듯 떠오른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HOME일까, home일까.


아마도 그것은 home일 것이다. 누군가의 품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자리. 사랑이 끝난 뒤에도 자신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공간. 그 집은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하다. 외롭지만 자립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매드랜드> 속 인물들에게 집은 건물이 아니다. 차 안에서 잠을 자고, 계절을 따라 이동하며 살아가는 삶. 그들에게 집은 지붕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에 가깝다. 잠시 함께 모닥불을 둘러앉는 시간, “다시 길 위에서 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


그 영화를 떠올리면 집은 벽이 아니라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HOME이 과거라면, home은 현재이고,

HOME이 나를 품어준 시간이라면, home은 내가 나를 지켜내는 시간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혼자 서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집 사이를 오가며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돌아갈 수 있는 근원이 있기에 멀리 나아갈 수 있고, 스스로 꾸린 공간이 있기에 다시 돌아갈 용기도 생긴다.


설 명절이 끝난 밤, 나는 다시 내 책상 앞에 앉았다. 윷놀이 판은 접혔고, 맛있게 먹었던 떡국도, 드라이브를 하며 나누던 대화는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이 조용한 방 안에서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차분히 한다.


이곳은 나의 home이다.

누군가의 보호가 아닌, 나의 선택으로 머무는 자리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HOME의 온기가 남아 있다.
아이들 웃음소리와 부모님의 목소리, 함께 먹던 떡국의 김처럼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남아있다.


우리는 아마 평생 두 집 사이를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길 위에서 방황하다가도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명절이 끝나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 지금,
나는 비로소 안다.


HOME이 나를 기억해 주는 곳이라면, home은 내가 나를 증명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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