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 오랜만에 극장에 앉았다. 가족영화나 코미디 대신, 이상하게도 제목이 눈에 밟힌 영화 한 편을 골랐다. <어쩔수가없다> 띄어 쓰지 않은 제목이 먼저 눈에 띄었다. '어쩔 수가 없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내뱉는 말이다. 하지만 제목에서 띄어쓰기를 지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체념의 문장이 아니라 변명의 덩어리, 무책임의 고백이 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말을 붙잡아,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것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영화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25년 동안 제지회사에서 일하다 AI 자동화라는 명분 아래 해고된다.
생계 지워버린 사회의 잔혹함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CJ ENM MOVIE
회사는 "개인 잘못이 아니다"라며 위로하지만, 그 말은 더 큰 잔혹함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남은 건 낡은 작업복과 미래의 불안뿐이다. 감독은 이 장면을 정적인 롱테이크(시각적으로 놀랍고 감정적으로 임팩트 있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영화 제작 방식)로 담아낸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인사팀장의 입술이 움직이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사회가 한 인간의 생계를 지워버리는 순간, 소음조차 들리지 않게 익숙한 절차로 처리되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그 후 만수의 일상은 무너진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그 말은 점점 도덕의 방패이자 독이 되는 언어로 변한다. 회사가 그에게서 일터를 빼앗았다면, 그는 이제 인간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단계로 향한다. 그는 자신보다 젊고 유능한 동료들을 향한 질투와 두려움은 끝내 폭력으로 번진다. 그의 살인은 차갑지만, 영화는 그를 단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그렇게 만든 시스템의 폭력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을의 전쟁'이란 말이 떠오른다. 경쟁과 효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 저지르는 폭력은 과연 개인만의 죄일까?
이병헌은 이 '무너짐의 얼굴'을 섬세하게 연기한다. 처음엔 점잖고 온화한 가장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표정엔 체념과 분노, 무기력의 미세한 떨림이 겹겹이 쌓인다. 특히 동료를 밀쳐 떨어뜨리는 장면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린다.
"어쩔 수 없었어."
그 말은 스스로를 향한 최후의 위로이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선을 넘는 순간이다.
영화 후반부, 만수가 스스로 이를 뽑는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흔들리던 어금니를 팬치로 뽑는 순간, 붉은 피가 번진다. 감독은 피 한 방울까지도 인간성의 붕괴, 죄책감의 해체를 상징으로 바꾼다. 그는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대신, "이제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 순간 관객은 알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다는 것을.
엔딩은 조용하지만 섬뜩하다. 회사는 여전히 돌아가고, AI 기계가 문서를 정리한다. 카메라는 기계의 팔이 움직이는 모습을 길게 비춘다. 인간의 손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만수가 버텨온 자리는 이제 무표정한 기계가 차지했다. 그 앞에 그의 딸 리원이 나타나 첼로를 연주한다. 초반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던 아이가 , 이제는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내며 연주한다. 감독은 여기서 작지만 확실한 희망을 놓는다. 타인의 언어를 반복하던 시대를 끝내고, 자기 목소리로 살아가려는 세대의 등장이다.
<어쩔수가없>는 단순한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쉽게 꺼내는 말, "어쩔 수 없었다"라는 언어의 폭력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자기반성의 거울이다. 정말 우리는 어쩔 수 없었을까? 혹은 그렇게 말하며 책임을 내던져온 것은 아닐까.
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171630